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있다. 기원전 1만년에서 5천년 사이로 추정되는 이 그림에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멧돼지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멧돼지의 다리는 4개가 아니라 8개이다. 아마도 멧돼지가 도망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는 당시의 감각적 표현 기법일 것이다. 오늘날 애니메이션의 조상격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이는 그림을 만드는 것은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 꿈은 영사기라는 기계를 통해 영화로 현실화되는데, 애니메이션의 원리도 기본적으로 영화와 같다. 그러나 영화가 현실을 복제했다면 애니메이션은 사물에 생명성을 불어 넣어 운동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움직이는 의도적인 그림’인 것이다.
‘그리기’라는 막대한 노동력 투자를 제외한다면, 애니메이션은 거의 무한대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고, 정형화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모습도 그릴 수 있으며, 어떠한 상상력도 허용되는 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의 매력이다.
‘생명을 불어넣다’ ‘영혼’ ‘정신’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anima’에서 유래된 애니메이션(animation)은 문자 그대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만화영화라는 뜻으로만 받아 들여지고 있지만 원래 그 범위는 훨씬 넓고 다양하다.
예를 들자면 비현실적인 영상 이미지의 대부분은 비록 실사 영화라 하더라도 그 기법은 애니메이션에 기초한 것이다. 어떤 영상물에나 빠짐없이 들어가는 자막 글자 처리도 애니메이션이다. 또 광고와 비디오 등에 직·간접적으로 애니메이션 기법이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애니메이션은 현대 사회의 영상 이미지 표출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키마우스의 탄생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붙은 나무가지를 돌릴 때 불그림자 같은 원이 생기는 것이 어떤 이유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눈에는 모든 대상이 거꾸로 보이기도 하지만, 영상이 잠시동안(1/16초) 지속되기도 한다”고 망막잔상의 원리를 설명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환등기의 등장 때문에 가능해졌다. 환등기는 요즘의 슬라이드 영사기와 비슷한 것이다. 환등기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646년 독일의 과학자 키르허의 저술에 나타난 것이 가장 오래됐다.
환등기의 원리를 이용한 다양한 기구들이 연이어 발표되는데, 애니메이션의 기원이 될 만한 것은 1826년 의사인 존 에어튼 파리스가 만든 소마트로프(Thaumatro-pe)이다. 원반 위에 새가 새집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연속 그림을 그린 뒤 원반을 돌리면 새가 움직이는 것 처럼 보이는 장남감 같은 기계였다.
1834년에는 미국인 윌리엄 조지 호너가 디달럼(Deadalum)을 만들었다. 원통의 안쪽에 말이 달리는 그림이 있고 이것을 회전시키면서 바깥쪽 원통에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보는 장치다. 디달럼은 특허를 얻기도 했는데, 조토로프(Zoetorope) 또는 ‘살아있는 차’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1878년 에드워드 머이브릿지는 24대의 사진기를 늘어놓고 말이 달리는 코스에 셔터와 연결된 가는 실을 쳐놓았다. 말이 카메라 앞을 지나면 실이 끊겨 자동적으로 셔터가 눌러졌다. 머이브릿지는 이렇게 해서 말이 달리는 연속적인 영상을 얻는데 성공했다. 머이브릿지의 사진총은 환등기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영사기 시대를 활짝 열었다. 에디슨은 머이브릿지의 실험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는 친구가 재채기 하는 모습을 1분짜리 키네토스코프로 제작해 돈을 받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머이브릿지류의 움직이는 사진이 1백가지 이상 등장했고 점차 ‘제대로 움직이는’ 그림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진정한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필름, 즉 셀룰로이드가 필요했다. 때맞춰 1869년 미국의 화이어트 형제가 셀룰로이드를 발명했다. 망막잔상의 원리와 환등 기술, 사진과 셀룰로이드의 결합이 드디어 새로운 예술, 영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사기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과 함께 존 랜돌프 블레이는 투명한 셀에다 배경을 그려서 동화 위에다 겹치게 해 촬영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한편 얼 허드는 이와 반대의 순서로(현재의 방법) 애니메이션을 작업했고 둘은 결국 합작을 통해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했다.
영사기를 사용한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프랑스의 에밀 콜이 1908년에 제작한 판타스마고리와 판토슈이다.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 싱어’가 발표되면서 무성영화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
월트 디즈니도 이무렵 토키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고 매달렸다. 그는 작품 속의 여러 캐릭터들의 대사뿐 아니라 음악과 음향효과도 그림에 맞춰 삽입시키기로 했다. 목소리를 그림에 덧붙이는 것은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매우 중요하며 음악이나 음향효과는 새로운 맛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디즈니는 소리를 곁들인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를 1928년에 발표했다. 미키 마우스가 바로 증기선 윌리에서 탄생했다.
가상 공간으로, 디지털 애니메이션
1960년대 컴퓨터의 등장으로 애니메이션의 세계도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그림을 대신 그리기도 하고, 기본 동작이 되는 그림만 입력해 주면 그 사이의 움직이는 그림은 컴퓨터가 알아서 그린다. 또 움직임의 표현도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이제는 컴퓨터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무엇을 할 수 없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컴퓨터는 인간의 창의력에 따라 조정되는 기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최초의 영상작품은 1963년 벨 연구소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자작의 ‘두 회전의 묘사’이다. 이 작품은 육면체의 단순화된 형태로 인공위성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컴퓨터를 예술 표현도구로 끌어들인 사람들은 컴퓨터 예술, 즉 컴퓨터그래픽스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탄생시켰다. 1967년 스탠리 반더빅과 케네스 놀턴은 최초의 컴퓨터 순수 미술작품 ‘인간과 그의 세계’ 그리고 ‘시의 세계’를 내놓았다. 영화에 컴퓨터그래픽이 처음 사용된 것은 ‘미래의 세계’에서였다. 트리플 아이(I.I.I)가 제작한 이 영화는 주연인 피터 폰다의 얼굴이 거친 목조에서 매끄러운 금속 질감으로 변해가는 과정이었다.
초기 컴퓨터그래픽은 평면 이미지인 2차원(2D)이었으나 이후 공간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는 3차원 이미지, 이어서 3차원의 정지된 공간에 시간의 축을 더한 4차원 이미지로 점차 발전했다. 4차원 이미지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뜻하기도 한다.
컴퓨터그래픽(CG, computer graphic)이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년 전의 일이었다. 월트 디즈니사는 1986년 ‘위대한 생쥐‘에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비행할 때 변화하는 배경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했다. 이때부터 디즈니사는 그들의 컴퓨터그래픽팀을 CGI라는 이름으로 출범시켰다.
‘알라딘’에 등장하는 날아가는 양탄자의 섬세한 무늬, ‘미녀와 야수’에서 두 주인공이 춤을 출 때 빙글빙글 도는 무도회장의 배경과 질감있는 대리석 기둥의 무늬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것이다.
‘라이온 킹’에서는 들소떼가 질주하는 스펙터클한 장면이 2분 30초나 계속되는데, 손으로 그린 배경과 3D로 만든 들소들을 완벽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8백마리의 들소를 복제하는 작업을 컴퓨터가 해냈다. 8백마리의 들소는 일반인들이 보면 하나하나가 다른 모습이지만, 실제로 그 원형은 4,5마리에 불과하다. 계속해서 컴퓨터그래픽 소프트웨어가 개발됐는데,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을 유지하면서 컴퓨터로 트레이스(선 베끼기), 채색, 합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개발됐다.
카메라 없이 영화 제작
1995년 디즈니사와 픽사사는 첫 장편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제작했다.드디어 카메라 없이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필요하던 여러 가지 재료를 컴퓨터 하나만 가지고 해결할 수 있다. 더 이상 셀 인형 종이 흙 등의 소재나, 물감, 조명장치, 편집기, 촬영기 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디지타이저, 타블렛을 사용해 연필, 펜과 똑같은 조건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채색도 보다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캐릭터 설정에서도 일단 설정된 자료를 컴퓨터 기억장치에 저장해 두면 반복해서 그릴 필요가 없다. 캐릭터의 동작만 조종하면 된다.
또 원화만 그리고 그 변형에 대한 자료를 주면 중간의 그림 동화는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컴퓨터는 선을 자유롭게 처리해 주고, 중간 프레임 수를 증감, 수정할 수 있다. 카메라 위치를 바꾼다거나, 어떤 대상물을 완전히 다른 물체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가령 큰 바위가 기구로 변해 하늘로 뜨는 장면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컴퓨터의 용량과 성능의 문제일 뿐이다. 부드럽고 깊이있는 번짐효과, 구름, 안개, 물의 반사나 수시로 변하는 파도의 색깔 같은 고난도의 특수효과도 컴퓨터는 쉽게 처리한다.
컴퓨터는 하루가 다르게 그 성능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고 애니메이션의 제작도 컴퓨터의 발전 속도에 맞춰 인간의 손에서 컴퓨터로 옮겨가고 있다. 아마 애니메이션의 종착역은 컴퓨터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은 세계 3위권 안에 든다. 그러나 대부분 외국 애니메이션 작품을 하청 수주한 것에 불과하다. ‘기술은 있지만 머리는 없는’ 단순한 노동 집약 산업이 현재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은 어느 정도 보편화된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창의력이 보태지면 무한대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한 자국 문화 파급효과를 도모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미국, 일본과 같은 대중 문화 강국들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고 문화 소비국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컴퓨터 그래픽스 분야의 연구에 투자와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