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혁명이라 일컬어질 만큼 우리 생활 주변의 수많은 분야가 디지털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오랜 세월을 사이좋게 공존해왔다.
최근 들어 우리 주변의 수많은 분야에서 디지털 방식이 아날로그 방식을 대체하고 있다. 1993년 위성 방송의 전송 방식을 둘러싸고 정보통신부의 디지털 방식과 공보처의 아날로그 방식이 서로 대립하다가 마침내는 디지털 방식이 승리한 것은 그 한 예. 또한 무선전화 운영방식도 점차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함께 공존해왔다.
아날로그 방식은 불연속적인 정수나 단위를 사용하는 디지털 방식과는 달리 연속적인 변수를 쓰고 있다. 한가지 예로 바늘로 표시되는 자동차 속도계를 살펴보자. 자동차 구동 축에 연결된 발전기에서 전압을 얻어 움직이는 전형적인 아날로그 방식의 기계다. 최근에 나타난 몇몇 자동차에서는 아예 속도계를 숫자판으로 대체한 경우도 있다. 이는 속도계 자체에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장치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결국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을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는 혼성 방식의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에 필요한 대부분의 데이터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수를 발견하고 여러 계산법과 이에 상응하는 논리적 연산을 발전시키면서 디지털 방식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날로그가 전부이던 시절
인간이 최초단계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계산을 신속하게 하기란 무척 힘이 들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허용되는 오차의 한계 내에서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아날로그 기계를 발전시켜왔다.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아날로그 계산기로는 고대로부터 천문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던 천문 관측의(astrolabe)를 들 수 있다. 천문학자들이 천문 관측의로 무려 1천여가지 이상의 천문관측과 계산을 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건축 토목 기계학을 비롯해서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날로그 계산기의 일종인 계산자(slide rule)를 이용해서 복잡한 계산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었다. 계산자의 발전은 1614년 존 네이어가 발표한 로그 개념이 확산되는 것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다.
로그가 발명된 뒤 1622년 윌리엄 오트레드는 원형의 형태를 띤 최초의 계산자를 발명해냈다. 1650년대에 이르면 계산자는 오늘날과 같이 두 개의 고정된 나무판 사이를 움직이는 슬라이드를 지닌 형태로 발전했다.
그 뒤 계산자는 거의 2백년 동안 거의 발전하지 못하다가 1850년 프랑스의 포병장교였던 만하임이 매우 간단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계산자를 발명한 이후 여러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계산기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계산자는 1970년대에 휴대용 전자계산기가 보급되기 이전까지 많은 현장 기술자들에게 애용되던 '기술자의 필수품' 이었다.
조수간만의 차를 예보하기 위한 조수 예보기(tide predictor) 역시 이미 오래 전부터 발전한 아날로그 계산기의 일종이었다. 이미 15세기에 서양에서는 조수 예보기가 등장했는데, 이런 목적의 계산기로 가장 발달된 형태는 아마도 1872년 영국의 켈빈 경에 의해서 고안된 방식의 조수예보기일 것이다.
복잡한 진동파의 형태를 지닌 실제 조수를 예보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사인파(sin wave)로 구성된 조화 진동을 계산해야 했는데, 켈빈 경이 고안한 아날로그 계산기는 최대 12개의 코사인(cosin)항을 동시에 계산할 수 있었다. 그 뒤 이 장치는 미국에서 17개와 37개의 항을 처리하는 기계로 발전됐으며, 심지어 80개의 사인파 항을 처리하는 조화합성기(harmonic synthesizer)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1931년 미국 MIT의 전기 공학자였던 부시는 아날로그 계산기의 역사 속에서 가장 획기적인 작품이었던 미분해석기(Differential Analyzer)를 창안해냈다. 부시가 고안한 이 기계적 계산기는 그 뒤 전세계의 수많은 연구소에 설치돼 디지털 컴퓨터가 나오기 전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최소한 5대 이상의 부시 기계 복제품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필라델피아의 무어 공대와 MIT에 설치된 미분해석기는 전쟁기간 중 많은 미분방정식을 포함하고 있던 탄도 계산을 하는데 광범위하게 활용됐다. 하지만 부시의 이 기계적 미분해석기는 곧이어 등장한 아날로그 및 디지털 컴퓨터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부시가 만든 원래의 장치는 1960년대 초 고철로 팔려나갔고, 이제는 몇몇 유사장치만이 MIT와 런던의 과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형편이다.
전쟁과 함께 발전한 기술
현재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컴퓨터는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으나 초창기에 만들어진 컴퓨터 가운데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초기의 아날로그 컴퓨터는 방공 체계의 구축을 위한 탄도 계산 분야에 활용됐다. 즉 목표물의 고도, 위도와 경도, 대기 온도, 목표물의 속도 등 다양한 변수를 아날로그 형식으로 입력하고 연산 과정을 거친 다음 각종 장비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도록 출력을 아날로그형식으로 산출시키는 것이다.
항공기나 방공 체계 장비에서 필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장비의 효율적인 작동이다. 이 일은 아날로그 방식으로도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컴퓨터는 정확도와 신뢰도에 있어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고도로 정밀한 장치에는 곧이어 놀라온 속도로 발전한 디지털 컴퓨터가 사용됐다.
디지털 계산기도 아날로그 계산기 못지 않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에서 오랜 전부터 사용됐던 주판은 광의로 해석한다면 디지털계산기의 일종이다.
1642년 프랑스의 파스칼이 아버지 사업을 돕기 위해 제작했다고 하는 계산기도 정수로 세는 장치였기 때문에 디지털 계산기에 속한다. 파스칼의 장치는 기어를 이용해서 치고 8자까지의 수를 더하고 뺄 수 있었는데, 1674년 독일의 수학자 라이프니츠는 파스칼의 이 장치를 더욱 개량해서 곱셈과 나눗셈, 그리고 제곱근 계산을 가능하게 했다.
근대적 컴퓨터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찰스 배비지가 1834년에 제안한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 역시 천공카드에 의한 입출력, 연산장치, 기억장치, 그리고 제어장치를 갖추고 있는 등 근대 디지털 컴퓨터에 해당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배비지의 생각은 1930년대에 재발견됐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폰 노이만에 의해서 분명한 형태의 저장 프로그램 전자 컴퓨터의 형태로 발전됐다. 근대적 컴퓨터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는데는 1945년 미국 해군이 추진하던 모의실험 비행장치 개발계획인 '선풍계획'(Project Whirlwind)이 디지털 방식을 채택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애초에 이 계획은 부시의 미분해석기를 응용한 아날로그 컴퓨터를 활용해서 조종사의 조종 행동에 대한 반응을 시뮬레이션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이용 가능했던 아날로그 기술로는 계산속도가 너무 느려 실시간 내에 조종사의 반응을 계산해 모의 비행장치를 조절해낼 수 없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풍계획'팀은 1945년 말에 이르러 기존에 활용하려고 했던 아날로그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대안이었던 디지털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리하여 항공기 모의 실험 장치를 비롯한 여러 항공 시설의 통제 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한 노력은 디지털 컴퓨터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게 됐던 것이다.
통신분야에서 대활약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은 전화와 전신이라는 중요한 통신수단을 개발해서 실용화시켰다. 전신과 전화는 모두 전기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함께 발전했지만, 전화는 음성을 전기적으로 연속적으로 변화시키는 아날로그 방식을 채택했다. 반면 전신은 모스 부호와 같이 불연속적인 코드를 이용하는 디지털 방식을 채택했다.
1872년에 이르러 프랑스의 보도는 시분할 다중화(time-division multiplex) 인쇄 전신 체계를 창안, 근대적인 텔레타이프라이터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 텔레타이프라이터 역시 전신과 마찬가지로 디지털방식으로 작동하는 기계였다.
한편 전화와 전신이 서로 다른 범위의 주파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해서 하나의 전선으로 전화와 전신을 동시에 사용하기 위한 노력이 행해졌고, 이에 따라 주파수 분할 다중화(frequency-division multiplex) 방식이라는 새로운 전송 방식이 창안됐다. 텔레타이프라이터의 전신 신호를 변조시켜 전화선과 함께 사용하게 되면서 텔레타이프라이터는 급속히 발전했다. 훗날 개인용 컴퓨터 통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모뎀이 나타난 것도 이 과정에서다.
컴퓨터가 아날로그 신호보다는 디지털 신호를 정보 처리의 기본 단위로 채택하게 되자 통신 쪽에서도 기존의 전화에서 채택한 아날로그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디지털 방식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고화질 텔레비전(HDTV) 방송 체계에서 아날로그 방식을 채택했지만 미국은 컴퓨터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최근에 우리나라의 이동통신 업계에서도 무선전화 코드 분할 다중접속 방식(CDMA)이라는 디지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어느 시기에도 보지 못하던 '디지털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의 출발은 태극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이나 개념의 양은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것도 있고,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자면 바늘이 움직이는 시계는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아날로그 시계고, 숫자로 표시되는 시계는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계다.
사전을 찾아보면 아날로그는 '어떤 수치를 길이 각도 전류 등의 연속된 물리량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아날로그의 반대 개념인 디지털은 '데이터를 수치로 바꾸어 처리하거나 숫자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돼 있다.
연속적 아날로그 신호가 자연적인 신호처리라면 불연속적인 디지털 신호는 인간이 만들어낸 신호처리다. 디지털 방식은 아날로그에서의 파를 잘게 짤라 무수히 많은 0과 1로 다시 정리한다. 이진법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이다.
유럽의 과학사상을 추적해보면 근대 수리논리학의 태두인 라이프니츠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1671년 그가 25세 때 세계처음으로 4칙연산을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1684년 그는 뉴턴과 거의 동시에 독자적인 미적분의 연구를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의 2진법은 동양의 태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1701년에 강희제의 측근이었던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부베(Bouvet, 白晋)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우연히 두 장의 태극도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태극도의 64괘 배열이 바로 0에서 63에 이르는 2진법 수학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태극을 정보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주역을 해석하는 디지털적 사고가 필요하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우주공간에서의 상태 변화 현상을 서양과 달리 거시(marcro)현상으로 파악했다. 우주 대자연의 현상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자연법칙을 음양의 디지털 개념을 이용한 2진3비트인 8수(2³)의 이치로 설명한 학설이 주역이다.
태극의 출발점은 무극(無極), 즉 음과 양이 아무것도 없는 혼돈상태다. 무극이 한 번 분화하면 양의(兩儀, 음과 양)가 된다. 그리고 음양이 분화하면 사상(四象)으로 나뉘어지며, 사상이 분화하면 8괘(卦)형태로 변한다. 이 8괘는 자기복제에 의해 64(2³=8, ${2}^{6}$=64)괘로 변화하면서 만물을 표시하는 것이다.
태극도형은 주역에서 출발한 것이니 중국의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 주렴계가 태극 도형을 처음 만든 것은 1070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태극 상징을 사용해 왔다. 1985년 12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한 신라시대 감은사 석간에서 태극도형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감은사 준공연대는 서기 682년이니, 주렴계보다 무려 388년이나 앞서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가야지방에서 발굴된 청동 태극 도형은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설령 중국 것이라 해도 중국이나 다른 동양 국가에서 태극을 국기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문호 · 전북대 정보통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