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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시설

황무지를 황금들판으로 바꾼 '만석거'

수리시설은 노동력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전통 과학기술이다. 자연 앞에 겸허하면서도 그 순리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우리 민족은 지금으로부터 8천여년 전인 신석기시대 후반부터 농사를 지어왔다. 이때부터 사실상 농사짓는 데에 필요한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수리도구를 제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벼농사는 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각종 수리시설의 축조 기사는 벼농사와 연관된 것이다.

벼농사의 성패는 물대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농법의 발달로 이앙법(移秧法)이 일반화되자 물문제 해결은 더욱 시급해졌다. 우리나라 기후의 특성은 여름철에 강우가 집중되고 봄철에 가뭄이 빈번하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수리시설의 축조를 통한 관개가 절실히 요구됐다. 수리시설의 발달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시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 왔고 주로 어떤 도구들이 이용됐는지 살펴보자.


서기 330년에 시축한 벽골제. 수거(水渠)의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판목을 삽입해 수문을 만들었다.


벼농사 성패는 물대기

수리시설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시설들이다. 경작지에서 고여있는 물을 빼내거나, 필요할 때 경작지에 물을 대주는 작업을 자연적인 도랑에 의지하지 않고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해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의 수리시설을 충남 부여군 궁남지(宮南池)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수전(水田)과 함께 발굴된 인공 수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이다. 이 수로는 나무 말목(抹木, 가늘게 깎아서 무슨 표가 되게 막는 말뚝) 판재 등으로 보강된 둑과, 수로에서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물막이 시설용 말목으로 이뤄져 있었다.

330년 백제는 전북 김제지역에 둑의 길이가 1천8백보에 이르는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했다. 이 시설은 벼농사가 중요해지면서 치수(治水)공사가 저수지를 만드는 단계로 발전한 것을 보여준다. 한편 신라도 일찍부터 수리시설의 축조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통일신라 시기인 8-9세기 제방의 증축과 보수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국가적으로 추진된 대규모 저수지 축조공사로는 제천의 의림지, 상주의 공검지, 밀양의 수산제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수리시설로는 제언(堤堰, 저수지)과 보(洑, 둑을 쌓아 흐르는 물을 막다둔 곳)가 주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치수에 만전을 기울였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인종 21년에 제언들을 보수하고, 인종 24년에 벽골제를 고쳤고, 명종 18년에 다시 제언들을 고쳤다는 기록들이다.

14세기 이후 농업기술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해를 번갈아 경작지를 놀리는 휴한농법에서 같은 경작지를 매년 이용하는 연작상경법으로 농업 기술이 발전했다. 벼농사에서는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 무논에 발아시킨 볍씨를 직접 파종하는 기술)이 주로 이용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조선의 중앙정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언의 축조에 총력을 기울였다. 태종 때의 벽골제 수축(고침)과 세종 때 전라도 고부에 있는 눌제(訥堤)를 축조한 것은 대표적인 일이었다. 각각 1만여명의 인부와 3백여명의 감독자가 동원된 엄청난 공사였다.

우리나라의 수리시설을 대표하는 제언은 형태면에서 산곡형(山谷形)과 평지형(平地形)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둑을 쌓아 계곡물을 받아두는 산지형이 많이 이용됐다. 그러나 호남지역처럼 들판이 넓고 지대가 낮은 곳에선 둑을 쌓아 빗물이나 용천수를 받아두는 형태의 평지형이 주로 이용됐다.

산의 계곡 사이에 둑을 쌓아 저수하는 경우, 둑은 목책을 세워 흙을 메워 만들었다. 둑의 안팎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그 기반을 든든히 했다. 수문은 돌기둥과 판목으로 만들었다. 벽골제의 수문에서 볼 수 있듯이 돌기둥과 판목을 이용해 물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해 물을 가두고 뺀 것이다. 제언 수문의 발달은 둥근 자연목과 자연석을 이용한 방식에서 돌기둥에 홈통을 만들어 판목을 끼워 사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수차, 뿌리 못내린 건 토양 때문

제언을 반영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유지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투입해야 했다. 허물어진 제언은 몇사람의 힘으로 수축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방관이나 중앙정부가 -그 지역의 농민들을 동원해 농한기인 겨울철에 수축했다. 하륜(河崙, 1347-1416)은 1412년 진주에서 제언을 수축하고자 백성들을 동원했다. 그는 미리 향촌의 어른들과 상의해 제언을 고치기로 결정하고, 각자의 재물을 내게 한 다음 공사의 감독자를 정했다. 그리고 다음해 2월 인근 백성들을 분대(分隊)로 나눠, 각 분대마다 한 무더기씩 돌을 쌓도록 해서 10일만에 제언 수축공사를 마쳤다.

태종과 세종 때에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이용되고 있었던 수리도구인 수차(水車)의 도입이 시도됐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토질은 엉성해서 물을 제대로 담수하지 못하고 관개수가 쉽게 삼투된다는 점에서 수차의 이용이 어려웠다. 수차는 조선후기에도 중앙정계에서 꾸준히 관심사로 제기됐다. 특히 숙종 영조 정조는 수차를 도입하는 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때 중국식 수차 이외에 용미차(龍尾車) 등의 서양식 수차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수차는 제언이나 보와는 다른 차원에서 하천수를 관개수로 이용하는 수리도구다. 수차는 하천의 자연 유속을 이용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경작지에 퍼올렸다. 당시 우리나라 하천의 흐름이 느리다는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했지만 지질문제 때문에 수차의 보급은 이뤄지지 않았다.
수리시설과 관련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강우량 측정이다. 우리나라 재래의 강우량 측정은 전통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세종 때 세계에서 최초로 측우기(測雨器)가 만들어졌다. 측우기는 하늘에서 내린 비의 양을 객관적인 수치로 파악한다.

이와 함께 비가 내릴 당시의 토지의 수분 함량을 감안해 호미나 쟁기와 같은 농구(農具)를 이용한 강우량 측정법이 사용됐다. 가뭄이 심할 때 내린 비의 양과 장마 때 내린 비의 양이 절대적인 수치로 비슷할지라도 실제 농사에서의 의미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농구를 이용한 측정법은 실제의 농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우량 측정법으로서, 수리시설을 이용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자연 이치 따른 제언과 보

측우기 제작과 수차의 시험에 깊이 관여했던 문종(文宗, 재위 1450-1452)은 하천수를 활용하는 다른 방법, 즉 천방(川防, 보)의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16세기에 광범위하게 이뤄진 보의 보급은 중앙정부의 노력 뿐 아니라 성리학을 공부한 지방의 중소지주들의 주도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보는 하천에 나무 돌 흙을 섞어 만든 축물(築物)로 둑을 설치해 물의 흐름을 정지시키거나 둔화시켜 저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런 다음 둑 옆으로 수로를 내 모아놓은 물을 끌어내 관개하는 방식으로 이용했다. 이때 축물로 쌓은 둑은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큰 비가 내리면 휩쓸려 내려갔다. 그렇지만 적은 노력으로 쉽사리 축조할 수 있었고, 휩쓸려 간 즉시 수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삼남지방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보는 물의 자연적인 흐름에 크게 역행하지 않는 수리시설이었다.

보에서 물길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무로 만든 홈통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나무 홈통은 낙차가 큰 개울에서 간단히 물을 논에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로 이용할 수 있었다. 둑을 쌓는 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하천의 상류지점에서 물을 뽑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취수구에 수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보는 제언에 비해 소규모였지만, 그 중에서 큰 것은 제언의 효과에 버금갔다.

1592년부터 7년간 일본과의 전쟁을 치른 다음, 황폐화됐던 제언 보 등의 수리시설에 대한 보수가 점차적으로 진행됐다. 이때 실학자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김제의 벽골제와 고부의 눌제, 그리고 익산과 전주 사이의 황등제(黃登堤)를 완전히 개수한다면 노령(蘆嶺) 이남의 가뭄 피해를 영구히 없앨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벼농사는 수경직파법에서 이앙법(현재의 모내기 기술)으로 바꿨다. 이앙법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 보급됐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본전(本전田)에 물을 이앙기에 적절히 공급해야 하고 수리시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이 큰 규모의 제언을 직접 축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경상도 풍산현 백성을 대신해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올린 글을 보면 그 상황을 알 수 있다. 현의 북쪽5리 정도에 있는 옛날 큰 제언을 수축하도록 허락해줄 것과 연이은 가뭄으로 살기조차 힘든 상황이니 비용과 물력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던 내용이다.

국왕들도 수리시설의 축조와 보수에 주목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비변사에 제언을 전담으로 관장하는 당상관을 배치하고 제언을 크게 개수했다. 정조(正祖, 재위 1777-1800)도 제언의 수리를 명하고 '제언절목'(堤堰節目, 제언 수축에 대한 각 시행항목)을 팔도에 반포했다.

정조, 수원을 농업 신도시로 키워

정조 대 제언 수축과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수원에 남아 있는 만석거(萬石渠)다. 정조는 자신의 생부인 장헌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 아래(현재의 융릉)로 옮기면서 1794년부터 2년에 걸쳐 화성(지금의 수원)을 건설했다. 정조는 화성을 이상적인 농상업 중심의 신도시로 건설하면서 국가의 직영농장인 둔전(屯田)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만석거를 만들었다.

정조는 만석거 수로의 입구에 수문을 설치하고 매년 준천(개천을 파서 쳐냄) 등의 보수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만석거는 이름 그대로 수원의 북문인 장안문 밖의 황무지였던 대유평(大有坪)을 논으로 바꿨다. 이러한 만석거 축조는 당시 벼농사가 거의 전적으로 이앙법으로 재배되고, 또한 밭을 논으로 만드는 반전(反田)이 광범위하게 행해지던 상황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정조는 이때 각 고을의 수리시설의 현황을 조사하고 다음해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수리를 마치고 비변사에 보고하게 했다. 1798년 11월 30일 정조가 내린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명령'(勸農政求農書綸音)에서 수리의 진흥을 농업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조건으로 지적했다. 만석거는 이와 같은 정조의 수리 정책에 따라 축조된 것이었다.

그런데 2백년 전 수많은 백성들의 땀으로 건설됐던 만석거가 지금은 제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도시화에 밀려 파괴되고 있다. 몇년 전 만석거는 3분의 1쯤 매립돼 택지로 팔려 옛모습을 일부 잃어 버렸다. 현재는 도로공사와 택지개발 공사 때문에 물이 거의 빠진 상황에서 나머지 매립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정조와 수원 농업의 상징인 만석거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농촌 현실을 웅변해 준다.


맞두레(위)와 용두레(아래)를 이용해 물을 대고 있는 모습


지레 원리를 이용한 농기구들

조선 후기에 수많은 농촌 지식인들이 수리기술의 개발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과 관리들은 중국에 파견돼 발흥하고 있던 서양의 자연과학을 배웠다. 그 가운데 수리에 대한 학문, 즉 수리학(水利學)도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서명응(1716-1787)의 '본사'(本史), 박지원(1737-1805)의 '과농소초'(課農小抄),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등은 수리 시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문적인 연구 내용을 담고 있다.

제언이나 보와 같은 수리시설 이외에도 논밭에 물을 대는 수리도구가 많았다. 이것들은 개울이나 물웅덩이의 물을 퍼 전토에 담는 데 이용됐다. 두레 맞두레 용두레 무자위 등은 대표적인 수리도구다. 이 도구들은 우리나라의 지형과 논밭의 형태에 알맞게 고안된 도구들로 근대적인 양수기가 이용되기 얼마전까지만도 광범위하게 이용되던 농가의 필수품이었다.

두레는 건널목인 둥근 나무의 한 끝을 논밭의 두둑에 얹어놓고 다른 한 끝은 기둥 세개를 세워 만든 받침대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리고 건널목 가운데에 한 끝은 물통이나 두레를 단 물채라는 긴 나무를 올려놓고 다른 한 끝은 혼자 또는 여러 사람이 서서 노를 젓는 것처럼 당기고 밀고 하면서 물통에 물을 담아 논밭에 붓게 돼 있다. 두레는 용두레를 사용하기 힘든 깊은 바닥의 물을 퍼올리는 데 사용했다. 물채의 길이에 따라 물을 퍼올리는 높낮이를 조정할 수 있었다.

맞두레는 바닥이 좁고 위가 넓은(윗변의 길이는 30-40cm정도) 나무통을 만들어 네 귀퉁에 줄을 달아 두사람이 마주 서서 두줄씩 잡고 물을 퍼올리는 도구다. 줄의 길이를 조절해 물대는 작업의 깊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이러한 농작업을 맞두레질이라고 했다.

용두레는 한사람이 사용하는 장비다. 2m 정도되는 통나무를 배모양으로 길쭉하게 만든 후, 깊이 30cm 정도의 홈을 파서 몸통을 만들고 몸통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가는 나무를 끼우고 여기에 끈을 매었다. 이 끈을 긴 작대기 세개를 모아 원통형으로 세워놓은 꼭대기에 매달았다. 그리고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해 자신의 힘과 물의 양을 조절하면서 물을 퍼올릴 수 있는 도구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는 쪽 나무로 직사각형의 통을 짜고 바닥에 긴 자루를 달아 쓰기도 했다.

무자위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품어올리는 농기구로서 최근까지 염전지역에서 이용됐다. 한 개의 축 둘레에 나사모양의 판을 많이 붙여 전체적으로 마차바퀴 모양이 되도록 만들었다. 받침대 끝부분에 긴 작대기를 두개 붙이고 사람이 여기에 의지해 발판을 밟으면 바퀴가 돌아간다. 이때 아래의 물은 나무로 만든 홈통을 따라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보다 높은 곳으로 물을 퍼올리기 위해서 이단으로 무자위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물풍구라는 수리도구가 있었다.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풀무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통안에 장치된 피스톤은 왕복운동을 하면서 물을 품어낸다. 수리도구의 이용은 제언이나 보를 축조할 수 없는 작은 개울이나 웅덩이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수리시설을 보완하는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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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염정섭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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