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물질과학의 화려한 등장을 예고한 X선. 파장이 짧은 이 빛은 어떻게 발견되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음극선 발견에서 출발, 방사선의 등장까지 숨가쁘게 이어지는 X선 탄생드라마를 추적해보자.
20세기 과학에 대한 시대 구분을 할 때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1895년을 그 기점으로 잡는다.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을 발견한 해였다. 뢴트겐이 이 새로운 광선을 발견한 뒤에 이에 자극되어 그 이듬해 프랑스의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다. 1897년에는 영국의 J.J 톰슨이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1899년 경에는 음극선의 입자성이 강력하게 부각됐다. 톰슨에 의한 음극선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성이론이 출현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방사선의 발견은 핵변환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핵분열이 발견되어 우리는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과학은 X선의 발견을 계기로 해서 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1858년 독일의 수학자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lücker, 1801-1868)는 자력이 기체 방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실험을 하던 중 자석 근처에서 기체 방전이 어느 정도 휘는 것을 관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듬해 방전관의 음극근처에서 밝은 녹색의 발광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사용했던 '진공관'의 진공도가 그다지 높지않아서 더 이상의 정밀한 실험을 할 수 없었다.
물질의 제4상태 음극선
한편 1855년 독일 본의 유리기구 제작자인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ssler, 1814-1879)는 개스킷이 필요 없는 수은 진공펌프를 발명했는데, 이것으로 기체 방전관 내의 진공도를 대기압의 1만분의 1정도로 낮추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1864년에는 독일 태생의 기구제작자인 륌코르프(Heinrich Daniel Röhmkorff, 1803-1877)가 불꽃 유도 코일을 개발해서 1ft 이상의 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고전압을 발생시킬 수 있게 됐다.
가이슬러의 수은 진공펌프와 륌코르프의 고전압 발생장치를 이용해서 플뤼커의 제자였던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는 1869년 고진공 방전관속에서 '글로우 광선'(Strahlen des Glimmens)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광선이 고체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등 음극에서직선으로 전파된다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고 유리에 닿으면 발광을 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뒤 플뤼커와 히토르프의 실험을 확인한 독일의 물리학자 골트슈타인(Eugen Goldstein, 1850-1930)에 의해서 이 광선에는 '음극선'(Kathodenstrahlen)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1878년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는 고진공관(Crookes tube)속에서 나타나는 전기 방전 현상을 연구하여 방전관내 어두운 부분(Crookes dark space)의 두께가 방전관 내의 분자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넓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음극선이 고체를 통과할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연구를 종합해서 크룩스는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보통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와는 다른 물질의 '제4상태'라고 불렀다.
음극선이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서 물질의 제4상태에 해당한다는 크룩스의 주장에 대해서 음극선을 에테르적인 파동으로 해석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가했다. 우선 1883년 킬 대학에 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글로우 방전에 관한 자신의 실험을 바탕으로 음극선이 정전기장에 의해서는 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헤르츠는 음극선이 빛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음극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는 것도 빛의 펀광면이 자장에 의해서 회전되는 광자기회전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헤르츠의 이런 생각은 하인리히 비데만(Heinrich Wiedemann, 1826-1899), 골트슈타인 등과 같은 독일의 다른 중견 과학자들도 받아들였던 생각이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아서 슈스터(Arthur Schuster, 1851-1934)가 방전관 내에 있는 음으로 하전된 입자가 자장에 의해서 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실험의 결과로서 1890년 그는 글로우 방전관 내의 음으로 하전된 입자들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해서 이것이 ${10}^{3}$과 ${10}^{6}$e.m.u.사이에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극대치인 ${10}^{6}$을 고려했다면 그는 1897년 J.J.톰슨이 측정한 양인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대치를 고려하지 않고 분자의 이온에 해당하는 중간의 양만을 신뢰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은 음극선의 본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체에 있어서의 패러데이 전해질 법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슈스터의 이 실험은 방전현상을 연구하던 당시의 영국 과학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J.J.톰슨도 분명히 이 논문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가 슈스터의 영향으로 나중에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톰슨이 이 실험을 하게 된 데에는 1895년의 X선 발견과 그 이듬해의 방사선 발견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에서 행한 전자파 확인 실험으로 유명해진 뒤 본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헤르츠는 1892년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성질들을 관찰했지만, 그 역시 헤르츠의 견해를 받아들여 음극선을 빛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레나르트의 이 실험이 곧이어 나타나게 될 뢴트겐의 X선 발견 실험으로 이어진 것이다.
뢴트겐의 X선 발견
뢴트겐(Wilhlem Conrad Röntgen, 1845-1923)은 독일의 레네프에서 독일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65년 입학시험을 통해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869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의 조교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뒤 쿤트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1874년 교수자격과정(Habilitation)을 이수하고, 그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학교에서 교수를 잠시 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센대학에서 1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1888년 마침내 프리드리히 콜라우시(Friedrich Kohlrausch)의 후임으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5일 뢴트겐은 레나르트에게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쓰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서 뢴트겐은 레나르트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하던 중 뢴트겐은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할 수 없었다. 1895년 10월 말 임기를 마친 뢴트겐은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았다.
1895년 11월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노벨물리학상 첫수상자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 발생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한 결과,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 나갔다.
12월22일 그는 자신의 아내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다.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1896년초에 뢴트겐은 이 짧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1월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했다.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1월9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이 새로운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이 날아왔다. "본인은 우리의 조국 독일에 인류를 위한 커다란 축복이 될 새로운 과학의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1896년 1월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다.
그해 2월24일에 베크렐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처럼 X선 발견은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정전기 발생 장치에서 나오는 스파크에서도 이미 X선이 발생했을 것이고, 1879년 쿠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관을 제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 발견에 대해서 발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투과력이 강한 이 광선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우선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를 들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뢴트겐 자신과 루트비히 볼츠만, 영국의 켈빈경에 의해서 제기된 견해로서 X선이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횡파라는 것이다.
X선의 본성
당시에 빛은 압축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종파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이어야만 했다. 만약 에테르가 압축가능하다면 빛의 횡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 J.J.톰슨,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등에 의해서 주장된 견해로서 X선을 에테르 내에서 순간적으로 불연속하게 전파되는 충격파(impulse)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었다.
1899년 네덜란드의 윈드(C.H. Wind)와 하하(H. Haga)는 격자에 의해서 X선이 회절되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 회절 사진에 대해서 당시 괴팅겐의 사(私)강사였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펄스의 간격을 계산하는 등 충격파 가설을 이론적으로 설명했다. 이어 1904년 영국의 바클러(Charles G. Barkla, 1877-1944)는 X선이 편광된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X선의 본성에 대한 충격파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1905년까지 충격파 가설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한편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펄스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에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근거로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포텐셜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가설(triggering hypothesis)을 제기했다.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다.
그러나 방아쇠 가설이 옹호하고 있는 X선에 대한 펄스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도 나타났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의 강한 투과력은 X선이 펄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X선이 두 하전입자가 같은 평면에서 회전하는 중성쌍(neutral pair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만 보다 잘 설명된다는 입자론적 해석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펄스 가설을 옹호하는 바클러와 입자론적인 중성쌍 가설을 새로이 제기한 브래그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다음부터 독일에서는 X선에 대한 양자적인 해석이 나타난다.
특히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X선의 성질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양자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광양자 가설을 전개해나갔다. 이처럼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점차로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다.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하게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마침내 1912년 당시 뮌헨의 좀머펠트 이론물리연구실에서 일하던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 발터 프리드리히 (Walther Friedrich, 1883-1968)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 1883-1935)이 이 문제를 해명할 결정적인 실험인 결정격자에 대한 X선 회절실험에 성공함으로써 X선은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그들은 결정격자에 X선을 쏘아서 X선이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여러 반점(라우에 반점)들을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실험은 X선이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뒤 X선 결정학 분야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출현되게 하는 계기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