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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글자' 라는 교육을 쉴새 없이 받아온 사람들도 왜 '과학적' 인지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컴퓨터에서의 한글 표현이 쉽지 않다는 이유로 한글이 '비과학적' 이라고까지 주장하는데… 하지만 결론은 역시 '한글은 과학적' 이다.

세상에는 2천여 종의 언어가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문자만도 2백50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처럼 문자 창제를 기념하는 국경일을 제정해 언어와 문자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나라는 없다고 하니, 우리 겨레의 우리 말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알만 하다(물론 몇년 전부터 한글날은 국경일에서 제외됐지만).

해마다 한글날이 가까워 오면 많은 언론매체에서는 한글날을 기념하는 기획 기사를 앞다투어 싣는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수도 없이 한글의 우수성이나 과학성에 대하여 배웠으면서도, 매년 한글날이 되면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논의가 으레 빠지지 않는다.

또한 한글 전용론과 국한문 혼용론이 끝없이 대립하고, 한글을 기계화하는 데 있어서조차 자판 배열 방식에 대한 논란이 거듭되는 일 등을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언어생활을 통해 한글이 우수성이나 과학성에 대해 그다지 절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학교에서는 한글이 우수하고 과학적이며 세계에서 둘도 없는 글자라고 배웠지만, 일상의 문자 생활에서는 과학적인 점이나 우수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져 있는 듯 하다. 한글 세대로 자라난 글쓴이 역시 일상의 문자 생활 속에서 한글의 과학성이나 우수성을 절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문자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는 생각을 자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라 자부하는 한글이 사실은 비과학적인 문화 유산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한글이 과학적이라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며, 사람들이 비과학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일까? 글쓴이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독자와 같이 찾아보고자 한다(여기에서는 한글 창제 과정에 있어서 그 제자(制字)상의 과학성보다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한글은 글자다. 글자는 인간의 의사소통 수단인 말을 기록하는 기호 체계다. 따라서 우리가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할 때는 말을 기록하는 기호로서의 관점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은 청각적인 언어를 시각적인 기호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호 체계를 지녔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시각적 모양과 기능이 조화이룬 글자

기호는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데, 가능한 한 적은 숫자로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고, 체계가 단순할수록 기호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기호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면 기호로서의 전달성에 장애가 된다. 또한 일정한 양의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의 양이 너무 많다거나 복잡한 구조로 기록해야 한다면, 그 기호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의미 전달이 어려운 기호는 기호로서의 가치가 없다.

한글은 적은 수의 기호로써 많은 소리를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19 개의 닿소리(자음)와 21 개의 홀소리(모음)를 조합해 만들 수 있는 글자의 수는 무궁무진하다(정확히 1만1천1백72 가지).

또한 한글은 소리글자이므로 뜻글자에 비해 청각적인 음성 언어를 시각적인 문자 언어로 훨씬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다. 한글은 음절 단위의 표기 방식(모아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음소 단위의 표기 방식(풀어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 로마자에 비해 뜻을 표현하는 데 있어 시각적인 효과가 높다고 한다.

아울러 한글은 닿소리 글자와 홀소리 글자가 각기 서로 높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ㄱ-ㅋ-ㄲ, ㅏ-ㅓ, ㅗ-ㅜ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리와 글자 사이에 연관성이 있으므로 쉽게 익힐 수 있는 기호 체계이다. 로마자도 소리글자이기는 하지만 글자 사이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 a-e-i-o-u와 같이 홀소리 글자들 사이에 연관성이 없으며, 도리어 소리의 연관성이 없는 b-d, v-w 등의 글자는 연관성이 있어 보일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레드야드(G. K. Ledyard)는 "한글의 가장 독특하고 신기한 요소는 시각적인 모양과 시각적인 기능 사이에 멋진 조화가 있다는 점이다. 닿소리 글자의 모양은 홀소리 글자의 모양과 아주 유형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 큰 두 갈래는 낱글자가 제 모양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잘 조화돼 있다. 이처럼 멋과 뜻을 갖춘 합리적인 낱소리 글자는 세상에 다시 없다"고 한글을 극찬했다. 즉 한글은 글자의 발전 단계로 볼 때 음소글자의 차원을 뛰어 넘은 독특한 소리글자라는 것이다.

한글은 닿소리 글자 전체가 저마다 음소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음소의 음성학적인 요인 곧 소리바탕(음운자질)까지를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홀소리도 밝음과 어두움을 "안과 밖"('ㅏ'와 'ㅓ'), "위와 아래 "('ㅗ'와 'ㅜ')로 구분해 음성학적인 요인을 조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 두고 영국의 언어학자 샘슨(G. Sampson) 교수는 한글이 음소 글자라기보다는 한 차원 더 발달한 "소리바탕 글자"라고까지 격상시켜 불렀다.

한글은 또한 표기법이 매우 규칙적이다. 규칙적인 표기법은 한글이 발음 기호에 가까울 정도로 글자와 소리값이 1:1의 관계를 가지는 데서 알 수 있다. 한 개의 낱글자(자모)는 한 가지 소리로 나고, 하나의 소리를 적는 데는 한 개의 낱글자로 나타낸다 (예: ㅏ[a], ㅣ[i]. [e]ㅔ, [o]ㅗ 등). 이에 비하여 영어에서의 로마자는 한 개의 낱글자가 여러 소리로 나고, 하나의 소리를 적는 데 여러 가지 글자로 적는다(예: a[아-father, 애-cat, 오-ball, 에이-april]. 오-poll, ball, caught : o, a, au등). 한글은 1:1의 단순하고 규칙적인 관계인데 비해 영어는 n:m의 복잡하고 불규칙적인 관계인 것이다.

요즘 컴퓨터를 이용한 자연어 처리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소리와 글자 사이의 1:1의 관계가 유지되는 자연어는 보기 드물다. 따라서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자연어 처리는 우리가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한다.

글자는 음성 언어를 기록하는 기호이므로, 그 말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글자를 널리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를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정보의 공유를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의미 전달을 위한 기호로서의 측면으로 본다면 바로 이 글자의 대중성이 오늘날의 문자 기호가 갖추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글은 모든 사람들이 익혀 사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글자인가? 여기에는 한글만큼 대중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자도 없을 것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기호로서의 선명성이나 연관성, 규칙적인 표기법, 소리글자인 점 등에서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글자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한글은 우리들이 평소에 부러워하는 로마자와 비교해 보아도 같은 소리글자이면서도 더욱 조직적인 구조와 기호로서의 선명성이 돋보이는 글자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글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과학성을 지니고 있는 우수한 글자라는 점을 새삼 확인한 셈이다.

한글 기계화의 장벽

지금까지 글쓴이는 한글이 구조적으로도 우수한 글자이면서,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각자는 실생활에서 한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 불편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글이 이론적으로만 우수한 글자이고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글자라는 얘긴가?

현대를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 만큼 매일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문자정보다.

글자로 표현된 정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량의 문자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지름길은 문자 생활의 기계화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자 생활이 낙후돼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자 기계화에서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로마자에 비해 한글의 기계화는 어느 정도인가, 또는 로마자만큼 기계화하기 쉬운 글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는 1백여 년 전(1868년, 크리스토퍼 R. 숄즈)에 글자 찍는 기계인 타자기를 발명했다. 대소문자 로마자 52 개와 숫자와 기호 20여 개만 있으면 연필로 글을 쓰는 대신 기계로 글자를 찍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나 일본이나 중국은 글자 찍는 기계를 발명해 생활에 활용하는 데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세 나라 사람들은 타자기를 사용하는 한, 자기네들의 문자 체계를 기계화할 수 없는 결정적인 제약이 있다고 느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실용적인 한글타자기가 1949년 우리 나라 최초의 안과 개업의인 공병우 박사에 의해 발명되었으나, 국한문혼용 관습 때문에 반세기 동안 대중적인 문자 기계로 자리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한글의 기계화(전산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한글 타자기를 써 본 사람들은 답답하고 느리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몇번이나 한글 타자기 글자판 표준화 사업이 시행되었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한글의 전산화 문제를 놓고도 역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지금도 조합 가능한 모든 한글 글자를 처리하지 못하고 20% 안팎의 글자만 수용하고 있는 완성형 한글 코드에 대한 시정의 요구가 높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한글 기계화나 전산화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시각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글 타자기는 글자판이 영어 타자기에 비해 복잡하다거나 한글 타자기는 영문자나 한자는 쓰지 못하여 불편하다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한글 타자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고, 제한된 타자기 글쇠에 예쁜 글씨모양만을 위해 여러 벌 수의 자모를 넣었기 때문에 복잡해진 것이며, 작은 기계 하나로 영문자나 한자까지 쓰려고 하는 문화적 관행에 문제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타자기의 생명은 글자를 정확하면서도 신속하게 찍는 데 있다. 이 원리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제작된 타자기가 1949년에 발명돼 실용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번씩이나 느리고 오타가 많은 다른 방식을 표준 글자판으로 채택한 데서 오는 정책 추진의 무지에 원인이 있었다.

이 타자기는 속도도 빠르고 오타도 적으며, 한글과 영문 소문자까지 하나의 타자기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특정인에게 특혜가 주어진다는 둥의, 말도 되지 않는 빌미로 반세기가 가깝게 매번 표준에서 제외돼 왔다.

예를 한 가지 더 들어 보자. 타자기에서는 해당 활자가 없으면 그 글자를 종이에 찍을 수 없듯이 컴퓨터에서는 해당 글자의 코드(code;글자종류를 나타내기 위해 컴퓨터 중앙 처리장치에 미리 정해 놓은 부호 체계)가 없으면 입력도 출력도 할 수 없다. 컴퓨터의 글자 코드 종류는 무한정 넣을 수 있지만, 호환성을 위해 자리수를 일정하게 제한하고 있다(7비트 코드, 8비트 코드, 16비트 코드 등과 같이 자리수로 코드 체계의 종류를 나타내고 있다. 물론 자리수가 많은 것이 많은 글자수를 표시할 수 있다).

이 제한된 글자 표시 영역인 코드에 서양인들은 로마자와 숫자, 기호 등만 배당하면 됐지만,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이 배당한 글자 종류에 한자를 수천 자씩 추가로 배당해야 했다. 일본인들은 한자 이외에 가나를 배당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 모든 글자 종류와 함께 한글을 코드에 배당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서양을 제외하더라도 문자 기계화 전산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 나라가 동양 3국 중에서 가장 부담스런 덩치를 안고 있는 것이 된다.

개인용 컴퓨터(PC)에서의 한글 처리는 타자기처럼 영문자를 덜어내고 한글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료의 호환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PC에서는 영문자를 그대로 둔 채로 한글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어느 정도까지 영문자와 호환시키느냐에 따라 한글 처리가 원활하게 되느냐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게 생기게 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한글 DOS에는 영문자와의 호환성을 우선적으로 배려한 한글 코드가 표준으로 채택되어 있기 때문에 한글 처리가 불완전하게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찦'이나 '숖', '똠'을 PC에서 표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PC는 미국사람들이 영어를 사용하는데만 역점을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영어로 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은 손쉬우나 한글로 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는 힘이 많이 든다. 미국 사람들이 창안한 기계이므로, 하드웨어나 프로그래밍 개발 언어가 영어를 사용하고 처리하기 위한 환경(라이브러리)이 모두 제공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도 함께 제공된 라이브러리를 이용하면 영어를 구현하기 위한 별도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므로 간단하고 손쉽게 일이 끝난다.

그러나 PC에서 한글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하드웨어나 프로그램 개발 언어에서 한글 사용을 위한 환경이 거의, 또는 전혀 제공되지 않으므로 각 개발자가 한글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낱낱이 별도로 작업해야 한다. 바로 이 과정이 무척 힘들기 때문에 PC에서 한글로 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어렵다고 한다. 이것은 로마자 문화권 이외의 사람들이면 모두가 당면하게 되는 어려움이지만, 우리 개개인에게는 그것이 한글을 사용하면서 겪는 어려움으로 은연중에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타자기와 컴퓨터의 예를 들어 보였지만, 일반인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문자 생활의 불편은 훨씬 다양한 사례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양한 불편 사례들이 한글 자체의 비과학성이나 비실용성보다는 하나같이 언어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생활 자체가 서구 지향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양상이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글자에 잘 맞지 않은 탓인 것이다. 한글의 구조적인 단점 때문인 것이 아니라, 서구의 문자 언어인 로마자와 딱 떨어지는 조화가 어렵기 때문인 것이다. 그 어떤 문자 체계보다 과학적이고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평소에는 모두에게 불편하게 느껴지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생각되는 까닭은, 문자 언어(글자)와 음성 언어(말)는 서로 한몸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언어 습관에서 오는 불편함을 음성 언어에서 오는 불편인지 문자 언어에서 오는 불편인지 일반인들은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 글꼴을 만들고 있는 모습. 굳이 네모꼴 안에 한글을 가둬두길 고집하지 않는다면 한글 기계화는 어렵지만도 않은 일이다.
 

67개 서체로 모든 한글 표시

최근에 글쓴이는 한글을 사용하면서 느끼는 불편한 점에 대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거기서 나온 얘기들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느리고 답답한 한글 타자기'와 '어색하고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컴퓨터 한글 코드' 항목은 바로 앞에서 이야기했으므로 제외시켰다.

'받침이 복잡하다. 띄어쓰기가 어렵다. 글자 구별이 어렵다. 예쁜 글씨가 부족하다. 빨리 읽혀지지 않는다. 약어를 만들어 쓰기가 힘들다. 글씨 모양이 다양하지 못하다. 다양한 글씨체를 개발하기가 힘들다. 입력 과정에 이상한 중간 글자가 나타난다' 등등.

그러나 위와 같은 이유들은 한글의 비과학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받침이나 띄어쓰기는 올바른 발음을 위한 노력, 즉 음성언어에 대한 교육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씨 모양이 다양하지 못하다거나 예쁜 글씨가 부족하다거나 다양한 글씨체를 개발하기 힘들다고 하는 소리는 한자글자꼴을 만드느라고 서체 개발 인력을 낭비하기 때문이며, 모든 글자를 획수에 상관없이 꼭같은 네모틀 속에 넣어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과학 동아'의 표지 글씨처럼 탈네모꼴글씨들이 많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탈네모꼴글씨 한 종류를 만들려면 영문자 한 벌정도에 해당하는 초-중-종성 총 67개만 개발하면 되기 때문에, 모아쓴 글자 별로 2천이나 3천 자를 개발해야 한 서체를 완성할 수 있는 네모꼴 글씨의 개발 기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짧아 손쉽게 여러 종류의 한글서체를 개발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영문자는 대소문자를 합쳐서 52자를 개발해야 한 서체가 완성된다.)

빨리 읽혀지지 않는다거나 글자 구별이 어렵다는 것도 획수와 무관하게 네모꼴 속에 한글을 맞추었기 때문이며, 탈네모꼴 글씨에서는 각 낱글자 별로 일정한 크기가 있어서 변별력이 높아지므로 이런 제약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현행 두벌식 표준 글자판 배열은 풀어쓰기를 지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한글을 풀어쓰기할 것이라면 과도기적으로 두벌식을 쓸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모아쓰기를 계속할 것이므로 한글의 최소 구성 요소인 초성-중성-종성에 따라 세벌식으로 글자판 배열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만 언급해두겠다.

네모꼴 고집할 이유없다

우리가 현대 문명을 주도하는 서구에서 나온 첨단 문자 기계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로마자 문화권이 아닌 한, 이유와 원인이 어떻건 문자 생활에서의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한글의 과학성으로 말미암아 가장 합리적이고 우수한 기계화나 전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에서 한자 타자기가 실용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일본 가나 타자기 또한 속도나 정확성 면에서 크게 떨어지는 기계였다. 한글 타자기는 1949년에 속도나 정확성에서 영문 타자기보다 높은 세벌식 타자기가 개발돼 1965년 첫번째 글자판 표준화 사업을 추진하기 전까지 가장 널리 보급, 사용됐다. 물론 지금까지도 이 세벌식 한글 자판은 텔레타이프와 전동 타자기, 전자 타자기, 컴퓨터에 이르도록 꼭같은 방식으로 무리없이 적용돼 사용되고 있다.

컴퓨터 입력 시스템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수십 가지 종류의 입력 방식이 개발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마땅히 선택할 만큼 속시원한 해결책이 없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은 자기 나라의 글자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문 발음으로 입력해 컴퓨터 프로그램이 적절히 한자나 가나와 간지로 변환해 주고 있다.

이에 비해 한글 글자판은 타자기처럼, 로마자 글자판처럼 기계적으로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기계적인 처리가 가능한 글자는 로마자를 제외하면 그리 흔하지 않다.

과학적인 한글의 우수성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영문자 타자기가 발명된 것은 2백여 년 전의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2백년 이상을 로마자 기계화를 위해 개발을 해 왔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한글의 기계화를 위해 쏟은 노력과 기간과 비용은 어느 정도인가?

보통 사람들이 실생활에서도 불편없이 쓸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인가? 그것은 문자 혁명을 수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기계적으로 처리하기 편리한 방향으로 개선하고, 거기에 맞추어 우리의 습관을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습관에 머물러 미래에 대한 발전적인 대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후손들에게도 현재와 똑같이 불편한 상황을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된다.

약간의 습관을 바꾸면 크게 나아갈 수 있다 네모꼴 글씨 습관에서 탈피해 탈네모꼴 글씨로 바꾸어 나가자.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적으로 바꾸어 나가자는 것이다. 네모꼴 글씨는 같은 낱글자 별로 여러 가지의 모양을 만들어 써야 한다. 같은 글자에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는 것은 기계적인 처리를 막는 길이 된다.

같은 글자면 오직 한 가지 모양만 가지도록 함으로써 변별력도 높이고 기계적인 처리도 간단히 끝낼 수 있도록 하자. 모아쓰기를 하는 관습은 유지하되, 로마자처럼 낱낱의 자모가 종류 별로 한가지 모양만을 갖도록 하면 서체 개발도 매우 쉬워지며, 기계적인 처리도 아주 간단해진다. 문자 혁명을 하지 않고도 로마자가 가지는 장점 또한 취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면 한글은 그 누구에게도 불편없고 당당한 글자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어떤 경우에는 서서히, 다른 어떤 경우에는 과감히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하자, 슬기롭게 그리고 합리적으로.
 

한글과 영어 일어 한문이 뒤섞인 이태원 한 상가의 모습. 이들 문자를 모드 한 코드체계에서 구현해야 하는데 따른 어려움은 은연중 한글을 비과학적 문자로 치부해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1994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박흥호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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