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춘근고(Chungungo) 마을은 연중 짙은 안개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는 거의 오지 않는 곳이다. 이곳 주민들이 마실 물조차 부족한 정도. 이 안개에서 물방울들을 모으려 큰 망을 산봉우리에 쳐두었더니 하루 10t 이상의 물이 고였다.
'구름잡는 이야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 넓은 세상에는 실제로 구름을 잡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칠레 해안의 작은 어촌, 춘근고(Chungungo) 마을이 그곳이다. 이곳에 사는 약 2백50명의 주민들은 산 위에 쳐둔 나일론망으로 지표부근에서 발생하는 안개의 수분을 채집, 음료수 등의 생활용수로 이용하고 있다.
기상용어로 말하는 '구름'과 '안개'는 그것이 지표에 접해 있으면 안개, 그렇지 않으면 구름으로 실질적으로는 같은 것.
목욕도 마음대로 못하던 마을
칠레 본토는 태평양과 접한 남아메리카에 있다. 북쪽은 적도에 가깝고 남쪽은 남극에 가까울 정도로 길게 뻗어 있어 기후도 위도에 따라 크게 변화한다. 그중에서도 춘근고를 포함한 북부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고 하는 아타카마사막이 퍼져 있고 대낮의 기온도 매우 높다. 고로 인간들의 생활에 적합한 장소라 할 수가 없다.
춘근고 마을에서 6백km 남쪽에 있는 수도 산티아고는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를 띠지만, 이와는 크게 다른 가혹함이 북부 풍토의 특징이다.
그러나 북부에는 동이나 철 등 지하 자원이 풍부하다. 이들을 채굴함으로써 '한탕'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되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고 마을이 건설된다.
춘근고마을도 배후에 있는 엘 토포산이 철광산으로 번창하던 시기에 광석을 운반하는 항구로 번영했던 곳이다. 그러나 1954년 광산을 폐쇄한 이후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조개들을 주워 근근이 연명하는 어촌이 됐다.
춘근고에는 아직 전기도 전화도 들어와 있지 않다. 단 한 대의 비상전화가 있을 뿐. 이런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서 가장 문제였던 것은 연간강수량 4백mm, 풀이 겨우 자랄 정도의 강수량이었다.
이 지방 주식은 밀가루로 만든 소박한 빵. 농사는 지을 수 없으므로 주식도 야채도 80km 떨어진 시장에서 모두 구입한다. 생활용수는 정부가 급수 트럭으로 옮겨온 물을 1L당 2페서(약 40원)에 사먹었다. 가격의 절반은 정부가 부담.
마을사람들은 드럼통 하나정도의 물을 2주 이상 사용하고 빨래는 1주 한번, 목욕도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약 2년전. 1992년 5월 갑작스레 이 마을에 세워진 '안개잡이'망의 덕이다. 이 기술은 물부족을 획기적으로 해결, 야채재배조차 가능하게 했다.
'안개를 잡아라'
이 '안개잡이'기술의 정체는 무엇일까. 안개속을 걸으면 옷이 젖는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개나 구름의 정체가 물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공기중의 수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로 돼 있는데, 공기가 그 속에 얼마만큼의 수증기를 포함할 수 있는가는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1㎠의 공기속에 수증기 형태로 포함될 수 있는 물의 최대량은 30℃에서 30.4g이지만 20℃에서는 17.3g, 0℃에서는 4.8g, 영하 30℃에서는 0.44g이 되는 등 온도가 내려갈수록 적어진다.
혹 어떤 이유로 수증기를 많이 포함한 공기가 식게 되면 내려간 온도에서 포용될 수 없는 수증기는 물방울이나 얼음입자가 되어 나타난다. 그것들은 직접 지표나 암석의 표면에 부착되거나 공기중의 작은 먼지 등을 핵으로 하여 무리를 지어 떠다니게 된다. 이것이 지표 가까이에 있으면 안개, 하늘에 있을 때는 구름이라 불리는 것이다.
비란 이같이 하여 구름이 된 작은 알갱이가 수없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 구름 알갱이의 반경은 평균 수십 미크론 정도고, 빗방울의 반경은 0.1-1mm. 즉 구름의 물알갱이가 10만-1백 만개 모이지 않으면 한방울의 빗방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춘근고 마을이 있는 칠레 북부연안 일대, 해발 4백-1천2백m의 산지에는 토착 인디오들 사이에서 수천년간 '카만차카'라 불렸던 짙은 안개가 일년내내 발생한다.
카만차카는 아열대 사막의 강렬한 태양빛으로 따뜻해진 육지위 공기에 태평양 위에서 흘러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부딪쳐 식으면서 형성된다. 태평양 부근은 남극에서 오는 한류인 훔볼트해류의 영향으로 해수의 온도가 낮다. 식은 공기 속에서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수증기가 짙은 안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물자원' 카만차카는 칠레 북부의 대지를 적시지 못한다. 강렬한 태양열 때문에 오후 늦게 정도까지 모두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지표에는 한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는다. 이같은 상황이 '안개잡이'작전을 만들어냈다.
과거에도 안개를 이용한 예는 있다. 시리아 사막에서는 돔모양의 가옥 지붕에 밤 사이 발생한 안개(방사냉각에 의한다)의 수분을 부착시켜 주위의 홈통으로 받아서 이용하는 일이 몇 세기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또 페루의 케추어족은 수천년 전부터 수목의 사이에 끼는 안개의 물방울을 채집, 음료수로 이용해왔다.
환경오염 걱정 없는 신기술
1992년 5월 15일, 표고 8백m의 엘 토포산 산정부근 산등성이에 기묘한 물체들이 세워졌다. 지표에서 뻗어나온 많은 나무들 사이로 가늘고 긴 검은 막같은 것이 차례로 세워져 산등성이를 스치는 바람을 품었다. 모두 78장.
이것이 춘근고의' 안개잡이' 비밀 무기다. 이들을 설치한 것은 칠레, 캐나다 양국 정부와 과학기술연구진의 힘을 결집한 '엘 토포 프로젝트' 연구 팀이다. 안개에서 물을 얻는 최신기술은 캐나다국제개발연구센터에 의해 칠레에 옮겨지게 됐다.
'안개잡이' 비밀무기의 정체는 검고 평평한 폴리플로필렌섬유를 삼중구조로 짜낸 결이 고운 망이다.
이 망을 안개의 흐름이 지나가는 길목에 세워둔다. 그러면 안개를 구성하는 작은 물방울들이 섬유질 망의 매듭에 부착되어 섬유에 스며든다. 이 물방울을 회수하여 저장하는 것이 이 '안개잡이' 장치의 구조다. 이렇게 간단한 원리로 물이 모이는 것이다.
안개가 어떤 물체에 부딪히면 안개를 구성하는 작은 물방울은 그 물체의 표면에 달라붙게 된다. 고원 등에서 밤에 비는 오지 않는데 비가 오는 듯한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밤 사이 발생한 안개 물방울이 나뭇가지 등에 붙어 있다가 점차 커져서 떨어지는 소리다.
엘 토포 산 위에 세워진 망에도 마찬가지로 부딪힌 안개의 물방울이 불어 망의 매듭을 통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형태로 플라스틱 용기에 모이게 된다. 이 물은 파이프를 통해 몇차례 여과를 거치면서 6백m 아래에 있는 물탱크에 저장된 뒤 살균되어 춘근고마을의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장치로 모인 물의 양인데, 연간 평균 채취수량이 하루 1만5백80L에 이른다. 수도설비를 한 각 가정에 매일 1백20L의 물이 공급되는 정도의 '수확량'이다.
단 안개가 적은 가을과 겨울에는 며칠간 단수가 있기도 한데, 이전에 겪었던 물부족 사태를 생각하면 마을사람들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한편 안개가 많을 때는 물 채수량이 망 1㎠당 35L에 이른다. 망 하나의 면적이 48㎠이고 이런 망이 78장 있으므로 단순계산으로 13만1천L에 이른다.
지구표면의 약 30%는 구름에 싸여 있는데, 구름속 수분은 작은 적운 하나로도 10만-1백만L에 이른다. 이 공기속의 수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은 지구에 어떠한 오염도 끼칠 염려가 없다. 게다가 한번 설치로 6년은 쓸 수 있는 나일론망 한장당 가격은 3백 3달러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술이 향후 세계 22개국 47개소에서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