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가라면 실현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도전해야 합니다."
올해로 발명인생 30년을 맞는 원인호씨(57)는 지난 6월 한달을 그 어느해 보다도 바쁘게 보냈다. 7년세월을 투자한 발명품 '건강신발'을 6월 중순 서울에서 열린 국제신발 및 기자재전을 통해 세상사람들에게 소개하느라 동분서주 초여름답지않은 비지땀을 흘려야 했기 때문이다. 남보기에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신발에다 좁쌀만한 구슬을 빽빽이 달아놓은 듯 간단한 모양이지만 원씨로서는 자신의 발명이력에 한 획을 긋는 소중한 자식이기에 이 신발을 단장해 남들앞에 내놓는데 남다른 감회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량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수출품목으로 3번째에 꼽히는 게 신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간 너무 안이했어요 손재주는 세계 최고로 쳐주는데도 OEM(주문자 생산방식)으로 그저 하청만 받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우리 브랜드를 못키웠잖아요. 제가 만든 신발이 수출부진으로 위기상황에 빠진 우리 신발산업계에 활력을 줄거라고 믿습니다." 6월초 대학로 귀통이 자신의 조그만 연구실에서 기자를 만난 원씨는 들뜬 목소리로 연신 건강신발을 들어가며 한국의 신발산업과 자기 발명품의 중요성을 힘주어 설명했다.
그저 입심좋은 한 발명가려니 치부하기에는 원씨의 관심사가 너무도 다양하고 국가경제에 일조해야한다는 그의 사명감도 보통 이상인 감이 없지 않다. 한참 신발얘기로 열을 올리는 그에게 말허리를 끊으며 '왜 발명가가 됐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나오는 대답이 뜻밖이다.
"4·19때문이죠."
농촌운동가로 변신
발명가 원인호씨는 그의 연배로도 어림잡을 수 있듯이 4·19세대다. 그러나 그냥 그 세대라고만 부르기에는 원씨가 치러낸 4·19의 의미가 너무 크다. 만학의 경제학과(국민대) 3학년 학생으로 결혼식 날짜까지 잡아놓았던 그가 이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쪽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지 않았던들 지금쯤 그는 발명가 아닌 다른 직함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시위대의 앞줄에 섰던 그는 머리와 다리 두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총탄이 머리를 스쳐가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한동안은 고향인 천안에 내려가 요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은 개천에서 용난 격으로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 배지를 달았지만 사실 그의 집안이나 고향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논밭에 엎드려 사는 농투성이들이었다. 오랫만에 고향에 내려온 그의 눈에 비친 농촌은 달라진 것 없는 예전 그대로의 가난과 무지였다.
결국 이 요양기간을 통해 민주화에 앞장섰던 원씨의 생각은 '나라를 구제 하려면 농촌구제부터 해야겠다'는 것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마침 4.19의 격랑이 밀고간 뒤는 학생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벌이던 시기. 그러나 원씨의 활동방향은 계몽보다는 농기구개선 등 영농과학화에 더 큰 관심을 둔 것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첫 발명품도 서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든 개량형 호미. 농촌 부녀자들의 1년중 가장 큰 농사인 메주담그기를 간소화 하기위해 개량메주를 만든 것은 물론 자신의 아이디어로 새롭게 고안한 농기구들의 도안을 가지고 그는 전국의 농촌을 누비며 '과학영농, 농공병진(農工竝進)'에 목청을 높이는 강연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한 10년 농촌에 마음을 붙이고 살던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만든 분말 쇠고기 가루가 식품위생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졸지에 옥살이를 하게된 것이 이유, 지금도 그 자신은 '눈엣가시처럼 바른 말 잘하던 농촌운동가 한명을 정치적으로 탄압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사건 이후 그의 발명품에서 식품이나 발효품은 일체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그는 막 시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청계천 세운상가에 윤성전자라는 조그만 공작소를 하나 내게 된다.
대체에너지 개발이 숙원
가게가 그럭저럭 자리를 잡자 그는 새로운 발명품 제작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를 사로잡은 주제는 대체에너지 개발. 이미 7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겪으며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필요성은 절실히 제기됐지만 막상 연구단계에 들어가서는 국내 학계에서조차도 머리를 내저을만큼 작업의 성과가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이 대체에너지 개발이기도 하다. 유체역학 강의 한번 들어보지 못한 원씨가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의욕만으로 뛰어들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제가 고학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 돼서 버텼죠. 안 그랬으면 벌써 손 털었을 겁니다."
전문서적과의 씨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관상대(현 기상청 )조차도 전국 각지의 풍력이나 풍향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던 시절. 원씨는 전국의 해안을 발로 누비며 풍력발전에 최적 조건이 될 수 있는 지역을 찾아헤맸고 그러다가 어떤 때는 간첩으로 오인돼 군부대나 경찰서에 끌려가는 수모도 겪어야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 그대로 82년 제네바 국제 발명전에서 태양열을 함께 이용한 그의 풍력발전기가 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모델은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 응용에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 우선 발전 메커니즘의 핵심부품인 도르래가 너무 무거워 신소재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경제성있는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풍력발전장치를 여전히 숙제로 남겨둔 채로 원씨는 83년부터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발명품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바로 지압의 원리와 원적외선을 이용한 신발과 양말의 제작. 그가 '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제네바 발명전에서 부터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발명가들이 동양의학의 원리까지 동원해가며 발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각종 제품을 개발해 내놓은 것을 주의깊게 보았다. 일이 되려고 그랬던지 83년에는 군화착용 때문에 무좀 등에 자주 걸리는 군인들을 위해서 새로운 신발을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도 받게 된다.
"지압신발 같은 것은 이미 우리도 낯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 일본서 들어온 것이지요 제 신발은 동양의학의 경혈 원리를 이용해 발바닥은 물론 발등까지 지압해 주어 나이 든 분들이 피로감을 훨씬 덜 느낀다고 하더라구요 또 구리를 구슬의 소재로 쓰고 있는데 구리는 이미 2차대전 때 연고제로 만들어져 군인들의 무좀 치료제로 쓰였던 물질입니다."
신발에 앞서 실험용으로 만든 양말은 이미 갓 창업한 모험기업에 그 기술을 팔았고 신발도 이번 국제 신발전을 끝낸 뒤에는 국내기업에 기술을 팔았으면 하는게 그의 소망이다. 그러나 건강신발이 뉴렌베르크와 피츠버어그 제네바 등의 국제발명전에서 금은동상을 휩쓸만큼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신기술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지는 그도 의문이다.
"한국에 나와있는 세계적인 신발 메이커 L 기업 등 몇군데서 기술을 팔라는 제의를 하더군요. 하지만 팔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하나야 배부르겠지만 가뜩이나 수출부진으로 허덕이는 국내 신발업계에 보탬이 되자고 한 일인데 어떻게 외국 기업에 기술을 그냥 넘겨줄 수 있겠어요."
자신의 발명시대 제 3기를 정리하는 이 작업이 끝나면 그는 다시 풍력 에너지 개발에 뛰어들 생각이다. 전문학자들조차 가망없는일이라 한다해도 발명이란 원래 1백개중 하나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할 때도 쓸데없는 짓 한다는 비웃음을 많이 샀습니다. 현재의 기술수준으로 안되는 것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하면 안되죠. 발명가라면 실현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도전해야 합니다."
민주투사로 시작해서 발명가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원인호씨. 굴곡많은 그의 인생사를 그래도 올곧게 지탱해온 것은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 보겠다는 발명가로서의 의지 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