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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한 발견이 역사를 뒤바꿔

고무에서 합성플라스틱까지

1910년대에 이미 플라스틱제품이 생산됐으나 과학자들은 30년대까지 스타우딩거의 고분자설을 믿으려들지 않았다.

분자량이 큰 화합물(대개 1만 이상)을 고분자(macromolecule)라 부른다. 고분자 과학의 역사는 60여년 밖에 안되지만 인간은 이 지구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고분자를 의식주의 가장 중요한 재료로 사용해 왔다. 생명체의 기본물질인 DNA와 단백질이 고분자인 것을 생각하면 유기고분자 화합물의 역사는 생명의 기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인류가 소비하고 있는 합성섬유 합성고무 합성플라스틱 등의 합성 고분자와는 달리 DNA와 단백질은 천연 고분자이다. 다른 천연 고분자의 예로는 천연고무 셀룰로오스 그리고 양모와 생사(둘다 단백질)가 있다. 따라서 고분자를 언급하려면 천연 고분자에 얽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화학이 과학보다 기술(가령 연금술)로 먼저 발달했듯이 고분자 분야도 기술 쪽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고분자(커다란 분자사슬)의 존재는 독일의 헤르만 스타우딩거(1881~1965, 1955년 노벨화학상 수상)의 실험적 노력에 힘입어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인정받게 되었으나, 인류에 의한 천연 고분자의 이용은 수천년의 역사를 갖는다.

끈적거리는 성질을 없애려고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고무나무를 자르면 우유같은 흰 액체가 나오는데 이 수액을 라텍스(latex, 라틴어로 유체라는 뜻)라 부른다. 라텍스는 단백질 탄수화물 염 등의 묽은 수용액에 고무방울(직경 0.0005~0.001mm)이 에멀션되어 있는 혼합물이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인들은 수백년전에 이미 라텍스를 응고시켜 만든 공을 갖고 놀았으며, 동아시아에서는 16세기에 새를 잡는 아교로 고무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고무의 특성인 탄성과 점착성을 인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고무에 해당하는 영어 rubber라는 1770년에 영국의 E. 내르니가 만든 단어다. 내르니는 연필 글씨를 지우는데 그때까지 사용하던 빵부스러기보다 라텍스로 부터 얻은 탄성 물질이 훨씬 효과적인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지우개(rubber)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rubber는 고무를 의미한다.

그후 영국의 S. 필은 1791년 고무로 코팅한 직물의 생산에 성공하였고, 찰스 매킨토시는 1826년에 나프타(방향족 화합물이 많이 들어있는 석유부분)가 고무의 좋은 용매임을 발견하였다. 현재도 비옷을 영국 사람들이 '매킨토시'(mackintosh) 혹은 '맥스'(macs)라고 부르는 연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옷은 더운 날씨에 들러붙어 사용하기 불편했으므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즉 고무의 탄성은 유지하고 점착성은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천연고무의 끈적거리는 성질이 그 속에 포함된 '액체'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무를 건조시켜 액체를 제거했지만 끈적이는 성질을 없애는데 실패했다.

미국인 찰스 굿이어는 그 '액체'를 흡수할 건조제를 첨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1831년부터 9년간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건조제를 시험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황(S)이었다. 그는 빨리 건조하려고 황가루를 첨가한 후 조금 데워주기까지 했으나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날 건조제로 황과 산화아연가루를 고무와 함께 섞어서는 별 생각 없이 그 혼합물을 뜨거운 오븐에 얹어 놓은 채 밤새도록 내버려 두었다. 다음날 놀랍게도 끈적거리는 성질이 다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탄성이 크게 증가한 '마른' 새로운 고무가 생겼음을 발견하였다.

굿이어는 자본주를 찾지 못해 이 발견을 5년이나 숨기고 있다가 1844년에 특허를 출원하였다. 그동안 토마스 핸코크도 같은 공정을 발견했다. 이 공정은 열과 황을 동시에 사용하는 점에 로마신화에 나오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 불칸(Vulcan)의 이름을 따 'vulcanization'(가황)이라 불리고 있다. 핸코크가 굿이어의 발견을 모르고 완전히 독자적으로 가황 공정을 발견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가황의 발견으로 가황고무의 생산이 1850년부터 시작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타이어를 이처럼 가황한 천연고무로 제조하였다. 물론 1850년이라면 '고분자'니 '중합체'(polymer)니 하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이었으며, 당시만 해도 고무라는 재료의 화학 구조도 모르면서 사용하고 있었다.

찰스 굿이어의 동생인 넬슨 굿이어도 형의 발견을 거울삼아 형보다 훨씬 많은 양의 황을 천연고무에 섞어 1851년 매우 단단한 에보나이트(Ebonite)의 제조기술을 발명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870년에 이미 8천여t의 고무가 소비되었다. 현재 고무의 소비량은 연간 1천5백만t 정도이며, 3분의 1 가량이 천연고무다.
 

라텍스를 응고시켜 만든 공


폭발하는 당구공

목화솜을 현미경으로 보면 작은 세포(cell)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1838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파양은 무명을 les cellules라 불렀고 이를 프랑스 학술원이 받아들여 면의 주성분을 cellulose라 명명하였다. 셀룰로오스의 ose는 글루코스 프락토스에서 처럼 당(糖)의 이름에 쓰이는 어미이며, 셀룰로오스는 실제로 '중합된' 당인 고분자다. 면으로 시작된 근대 섬유산업도 고무산업과 비슷한 때에 발전하였다.

1846년 스위스 바겔대학 교수였던 독일인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쇤바인은 믿지못할 경험을 하였다. 쇤바인은 자기집 부엌에서 실수로 염산과 질산의 혼합물(왕수)이 담겨있던 병을 깨뜨렸다. 왕수는 곧 바닥에 퍼졌고, 왕수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쇤바인은 급히 곁에 있던 자기 부인의 무명 앞치마로 바닥을 닦고는 산을 없애려고 물로 대강 헹군 후 뜨거운 난로 앞에 걸었다. 그러나 앞치마는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불이 붙어 타버렸다. 이를 재미있게 여긴 쇤바인은 같은 실험을 거듭해, 가연성이 크고 때로는 폭발적이며 탄성적인 새로운 셀룰로오스 유도체(질산  셀룰로오스)의 합성에 성공하였다.

초기에 이 물질은 폭발성 때문에 큰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질산셀룰로오스는 면화약의 기본이 되었다. 질산셀룰로오스는 다른 셀룰로오스와는 달리 알코올과 에테르 혼합용매에 녹아 점성용액을 만들기 때문에 상처에 바르는 액체 반창고(콜로디온)로도 사용되었다.

질산 셀룰로스의 특성들은 여러 발명의 촉매 노릇을 하였다. 존 웨슬리 하이야트는 1869년 질산셀룰로오스와 장뇌(camphor)를 섞어 표면이 매끈하고 단단한 성형물을 만드는 발명으로 특허를 얻었으며, 그로부터 훌륭한 당구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하이야트는 지금 돈으로 1억여원에 해당하는 상금을 탔다.

하이야트의 발명 전에도 당구공 제조업자들은 상아로 만든 당구공에 질산셀룰로오스로 표면을 매끈하게 도장하였다. 그러나 폭발성 있는 재료로 표면을 포장하였으니 이들 당구공들이 강하게 충돌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 때문에 당구치던 사람들이 놀라 권총까지 빼들고 난리를 쳤다니.

질산셀룰로오스는 가열하여 가공이 가능하므로 셀룰로이드(celluloid) 필름을 만들 수 있었다. 초기 영회는 질산셀룰로오스 필름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영화를 영어로 필름(film)이라 부른다. 셀룰로이드는 1865년 영국의 알렉산더 파케스의 발견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가열하여 변형시킬 수 있는 첫 열가소성 고분자 재료였다.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인 쿠 루이 마리 일레르 베르니고드 드 샤르도네(1839~1924)는 누에들이 병들어 프랑스에서 성황을 이루고 있던 비단산업이 타격을 받자 천연 비단을 인조섬유로 바꿀 수 있는가를 궁리하던 중, 1884년 질산셀룰로오스를 용액상태에서 방사해 새로운 샤르도네실크를 제조했다. 5년후 샤르도네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이 인조견사를 전시해 관심을 모았다.

드디어 1891년 이 인조견의 공업적 생산이 시작되었으나 예상했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이 신기한 새 비단은 난로 가까이만 가면 불이 붙는 고약한 성질을 보였던 것이다. 면화약으로 섬유를 만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실은 질산셀룰로오스 섬유를 처음 만든 사람은 샤르도네가 아니고 조세프 스완이었다. 스완은 1883년 질산 셀룰로오스 섬유를 압출법으로 만들었으나, 공업적으로는 샤르도네가 성공하여 스완은 오늘날에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첫 합성플라스틱 배클라이트

1897년 독일의 발명가 빌헬름 크리쉐와 아돌프 스피텔러는 우유속에 포함된 단백질을 포름알데히드와 화학반응시켜 인조뿔을 만들어 이를 갈라리트(Galalith, 희랍어로 gala는 우유를 뜻하고, lithos는 돌을 의미함)라 이름붙였다. 앞에서 말한 에보나이트 셀룰로이드 및 갈라리트는 모두 천연물을 화학반응시켜 화학구조를 변화시킨 반합성(semi-synthetic) 고분자이다. 완전한 합성 플라스틱의 발명은 미국으로 이민간 벨기에 인 레오 H. 배클란드의 공헌에 의해 이루어 진다.

1900년 A. 스미스는 페놀수지 합성에 관한 미국 특허를 획득하였으나 이를 생산할 공정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배클란드는 1905년부터 페놀과 포름알데히드 반응에서의 산 알칼리의 촉매작용을 연구했는데, 페놀이나 포름알데히드를 과량 사용해 중간체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 무기섬유나 톱밥 등을 섞어 가압 가열하여 유용한 가공품을 만드는 가공법도 발명하였다. 이 제품은 배클라이트(Bakelite)라는 이름으로 1910년 독일과 미국에서 생산되었다.

이 합성고분자는 절연성이 우수하고 내열성이 좋아 현재에도 전기소켓 전열기손잡이 낚싯대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들 제품은 일단 성형후에는 재가공을 통한 변형이 불가능한 열경화성수지의 대표적인 예다. 배클란드는 이후 배클라이트의 발견으로 얻은 수입으로 연구실을 꾸며 여러가지 새로운 고분자 재료를 발명하였다. 이처럼 1910년대에 이미 순합성 고분자인 배클라이트가 대량 생산되어 새로운 재료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으나, 과학자들은 고분자의 존재를 1930년까지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플라스틱


비운의 천재 캐로더스

우리는 저분자량의 단위체(monomer)가 연속적으로 결합하여 중합체가 만들어지는 반응을 중합(polymerization)이라 부른다. 중합체라는 말은 1866년 마르셀린 베르텔로(1827~1907)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일찍이 1839년에 에듀어드 시몬은 스토락스(storax, 방향족 수지의 일종)를 증류해 액체를 얻었고 이를 스티롤(styrol, 영어로는 styrene)이라 칭하였다. 시몬은 스티렌을 2백℃까지 가열해 젤라틴 같은 고체를 만들었다. 이 고체의 조성 및 구조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이 논란은 고분자의 존재가 인정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르텔로가 1866년에 이를 polymère resineux(영어로 resinous polymer)라 불러 중합체(polymer, poly와 mer는 각각 희랍어로 '여럿'과 '단위'라는 의미)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합체라는 말이 사용되었어도 '이것이 강한 화학결합으로 연결된 매우 큰 분자'라는 스타우딩거의 고분자가설(macromolecular hypothesis)을 당시 화학자들은 대부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콜로이드와 같이 작은 분자들이 화학결합 보다 약한 2차결합력에 의해 화합되어 있는 저분자의 집합체라고 믿었다.

고분자의 실체를 이해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화학자는 미국 듀폰사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월러스 흄 캐로더스(1896~1937) 였다. 캐로더스는 아이오와주 버링턴이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실험을 매우 좋아했다. 대학 시절 이미 그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상급학년 재학시 대학강사로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그후 일리노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교수가 되었으나, 2년후(1926년) 하버드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항상 연구와 실험에 열중한 반면 만족을 몰랐던 캐로더스는 또다시 직장을 옮겨 1928년부터 듀폰 연구실에서 고분자 합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당시 듀폰사는 유능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어떤 연구든지 본인이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권장하였고, 그들의 독창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연구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스타우딩거의 고분자설을 굳게 믿었던 캐로더스는 디아민과 디카르복실산을 반응(중합)시켜 고분자량의 나일론 합성에 성공하였으나, 처음에는 매우 실망하였다. 생성물이 별 특성이 없어 보여 쓸모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날 캐로더스와 함께 연구하던 힐이라는 화학자가 우연히 합성해 놓았던 나일론 덩어리를 잡아당겨 긴 실모양을 만들어보니 놀랍게도 이 실이 비단실같았을 뿐만 아니라 강도도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발견이 나일론 섬유 개발의 시초였다. 캐로더스는 나일론 이외에 네오프렌(폴리클로로프렌)도 발명하였다.

캐로더스는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고전음악과 시를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자기가 완전하지 못함을 비관하는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1937년 4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의 어느 호텔방에서 자살했다.

우연히 발견된 폴리에틸렌과 테플론

의도하지 않았던 관찰을 놓치지 않고 위대한 발견으로 이끈 영국 ICI사 얘기를 하나 더 하자. ICI의 과학자들은 1933년 네덜란드에서 새로 구입한 기계를 사용하여 에틸렌 기체를 고압으로 압축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압하에서 에틸렌의 거동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에틸렌이 중합하여 폴리에틸렌이 되었다. 이 실험을 반복하였으나 결과의 재현성이 전혀 없어 어느 때는 폴리에틸렌이 생기고 어느 때는 그렇지를 못했다. 도저히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고압장치를 철저히 조사하기로 하였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한 후에야 그 장치에 매우 작은 균열이 있는 것을 알았다. 즉 공기(산소)가 그 균열부를 통해 들어가 에틸렌의 중합을 유도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들은 연구의 방향을 돌려 에틸렌의 중합 자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산소를 너무 소량 넣으면 중합이 진행되지 못함을 발견했으나, 반대로 너무 많이 사용해 공장이 폭발하는 경험도 겪었다. 결국 최적량의 산소가 얼마인지를 알아내었고, 이 공정이 바로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저밀도 폴리에틸렌 제조법이다.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은 레이더 장치에 사용하기에 적합한 저밀도 폴리에틸렌의 발명에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1938년 듀폰사의 다른 화학자 로이 플렁케트는 퍼플루오르에틸렌(${CF}_{2}$=${CF}_{2}$)의 합성 및 화학반응에 관하여 연구를 하고 있었다. 우선 이 화합물을 약 50kg 합성하여 여러 강철 실린더에 나누어 저장하였다. 그 후 이 기체를 사용하려고 한 실린더의 밸브를 열었으나 틀림없이 나와야할 기체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다른 실린더에서는 예상대로 퍼플루오르에틸렌 기체가 나왔다. 이상하게 여긴 플렁케트는 쇠톱으로 기체가 나오지 않은 실린더를 잘라보니 놀랍게도 흰가루가 조금 들어있었다. 더구나 이 가루의 화학조성은 그 실린더에 넣은 기체의 조성과 같았다. 이 가루는 어느 용매에도 용해되지 않았고 연소도 되지 않았다. 그 까닭을 면밀히 살펴본 플렁케트는 퍼플루오로에틸렌을 충전하기 전에 공기(산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그 실린더에 넣은 ${CF}_{2}$=${CF}_{2}$ 기체가 중합하여 고분자가 된 것을 알았다. 현재 테플론(Teflon)으로 불리는 이 고분자 재료는 음식이 들러붙지 않게 조리용기에 도장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석유화학산업 연 지글러와 나타

배클라이트의 발견이 합성 플라스틱공업의 효시라 본다면, 현대 석유화학공업은 에틸렌과 프로필렌의 저압 중합을 실현시킨 독일의 칼 지글러와 이탈리아의 길리오 나타의 연구결과로부터 시작된다.

지글러는 에틸렌에서 출발해 알루미늄 알킬의 합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에틸렌이 기체이므로 그는 고압 용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지글러는 반응 용기중 한 용기속에 액체인 알루미늄 알킬 대신 고체가루(폴리에틸렌)가 생긴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아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다. 그 까닭을 모른채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그때까지의 관찰을 종합해본 지글러는 폴리에틸렌이 이상하게도 한 고압용기에서만 생기는 것을 알았다. 용기를 세밀히 조사해 보니 매우 작은 머리털 같은 금이 있음을 알았다. 그 금이 간 곳에 먼저 실험에서 사용했던 니켈 화합물이 소량 남아 있었다. 그는 니켈 화합물과 알루미늄 알킬이 함께 에틸렌의 저압 중합을 개시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후 지글러는 전이금속의 염화물과 알루미늄알킬의 조합을 조직적으로 연구하여, 드디어 1953년 그들이 에틸렌의 저온 중합을 도와준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전까지 산소 등을 촉매로 하여 고온 고압에서 에틸렌을 중합하여 현재 비닐하우스 덮개로 많이 쓰이는 저밀도 폴리에틸렌만을 합성할 수 있었으나, 지글러는 온화한 조건에서 에틸렌을 중합하여 결정성이 더 크고 기계적 강도가 훨씬 우수한 고밀도 폴리에틸렌의 합성에 성공한 것이다.

나타는 지글러의 관찰을 확장하여 같은 촉매를 사용하여 그때까지 중합이 불가능하던 프로필렌을 중합하여 입체 규칙성을 갖는 이소택틱폴리프로필렌의 합성에 성공하였다. 이런 공로로 지글러와 나타는 1963년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지금도 ${TiCl}_{4}$/Al(C₂${H}_{5}$)₃ 같은 촉매를 지글러-나타 촉매라 부른다. 이들의 발견은 그후 다른 올레핀 중합에 적용되었고 석유 화학에 기초한 현대 고분자공업의 장을 열었다.
 

1950년대 국내 최초로 합성수지를 생산하는 장면


박식한 과학자는 발명에 실패한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을 모두 우발적 사건으로 돌리기에는 여러 면에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굿이어의 가황공정 발견이나 쇤바인의 질산셀룰로오스 합성법 창안, 플렁케트의 테플론 발명 등이 모두 우연한 행운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들 모두가 우연한 관찰을 무심히 보지않고 과학적 통찰력과 분석력으로 그 관찰의 원인과 결과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지체없이 경주하였다는데 공통점이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즉 루이 파스퇴르가 말한 바와 같이 "관찰에서 우연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플렁케트가 만약 한 실린더에서 아무런 기체가 나오지 않았을 때 자기가 잊고 그 실린더에는 기체를 저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지나쳤던들, 또 강철 실린더에 생긴 흰색가루를 잘못해서 들어간 먼지 정도로 생각하고 넘겨버렸던들 테플론의 발명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으리라.

과학적 발명이나 발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가지 요인은 그에 관여하는 과학자가 너무 박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학식을 과신하는 과학자는 새로운 관찰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자기대로 설명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박식한 과학자가 모두 그렇지는 않으나 고집스런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학자를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본다. 저분자의 회합체인 콜로이드라 주장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타당한 스타우딩거의 고분자설을 받아들이지 않던 수많은 학자들의 편견으로 말미암아 현대 과학의 총아라 불리우는 고분자 과학의 발전이 얼마나 지연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밝은 눈과 열린 마음을 가진 과학자만이 행운의 여신을 인지할 수 있으며,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한 과학자만이 결실의 단맛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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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진정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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