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학의 아버지 라브와지에는 화학명명법의 개혁에 착수하면서 '과학의 진보는 전적으로 그 언어의 진보에 의존한다'는 계몽철학자 콩디야크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언어는 기호에 의해 개념을 나타내지만 새 지식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불완전한 언어는 틀린 개념을 전달하며 일단 고정된 틀린 개념은 버리기 어려운 편견이 된다. 과학용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서구과학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동양사람들은 생소한 개념을 적절히 표현하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화기에 중국과 일본의 과학용어가 뒤섞여 혼란이 더욱 심했다. 일제시대에는 물론 일본 용어로 통일이 되었지만 해방과 함께 영어로 된 과학책이 직수입되면서 또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과학학회 가운데는 대한화학회 한국물리학회처럼 일찍부터 용어제정사업을 벌여 성과를 거둔 데도 있다.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과학기술용어 제정심의의원회를 구성하고 여러 학회의 산발적인 작업을 종합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 뜻깊은 사업은 과학기술용어집의 발간으로 열매맺은 바 있다. 지금은 중단상태다.
과학용어 제정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지만 예산의 뒷받침이 없어 한번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나 재단의 지원이 절대로 필요한 사업이다. 이미 경험이 있는 과총을 통해 계속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작업에 과총이 적임인 또 하나의 이유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달리 쓰이고있는 용어의 조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새로 발족한 국립국어연구원도 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용어 제정에는 순수과학이 응용과학보다 적극적이었다. 순수과학에서 우리말에 바뀐 용어가 응용과학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일본식 용어가 그대로 통용되는 수가 많다. 예컨대 화학에서 만든 용어가 공학 농학 의학분야에서 잘 반영이 되지 않고 있다. 플루오르 시트르산 글루탐산이 여전히 일본식 용어인 불소 구연산 글루타민산으로 쓰이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다.
새로 제정된 과학용어는 교과서에 반영되므로 학생들에게는 신속히 보급된다. 그러나 각종 사전류와 많은 과학출판물에는 여전히 낡은 용어가 쓰이고 있다. 이런 것들을 찾아내 바로잡는 운동이 절실히 요구된다. 잘못된 용어의 통용을 방치할 때 시정은 요원하며 두고두고 부작용을 남길 것이다.
신문 방송 TV도 잘못된 과학용어를 남발하고 있어 걱정된다. 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황산과 질산(일본이름은 각각 유산 초산)은 이제 굳어가는 것 같다. 혹성 유성 등 일본말이 횡행하더니 이제는 행성으로 어지간히 자리잡혔다. 그러나 자기장과 양성자를 자장과 양자로 쓰는 일은 아직도 흔하다. 황을 유황으로 쓰는 것도 고질이 되어버렸다.
얼마전 떠들썩했던 이산화티타늄은 이산화티탄이 맞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신문과학면은 그래도 나은 편인데 외신면 사회면의 과학용어는 엉뚱한 것이 많다. 이런 오류를 걸러내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끝으로 남북한의 과학용어가 크게 다른데 이를 단일화하려는 노력이 시작될 때에 이르렀다. 우선 상대방의 과학용어를 철저히 연구한 다음 유엔을 통해 단일화협상을 모색해야 한다. 완전통합은 현단계에서 불가능하겠으나 간격을 좁힐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