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내성이 생기지 않고, 주변 정상 조직에 손상을 주지 않는 항암제가 속속 개발되고 있다.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요인들중 의학분야에서 20세기 최대 과제를 꼽으라면 암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세기말에 접어든 90년대에 이르러 과연 인류는 암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무한정 늘어나고
암의 가장 주요한 특성중의 하나는 그 증식속도가 정상조직에 비해 현저히 빠르고, 증식의 한계가 없다는 점이다. 증식속도 자체만으로 본다면, 정상조직도 간혹 빨리 증식하는 경우가 있다. 신체부위에 따라 또는 시기에 따라 또는 생리적 환경적 요인에 따라 재생과 증식이 촉진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조직의 이러한 증식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암과 다르다.
예를 들면 70%의 부분 간(肝)적출술을 받은 동물의 경우, 2주일도 못돼 원상복귀될 만큼 간세포들이 빠른 속도로 분열·증식된다. 하지만 일단 원래의 크기에 이르면 더 이상의 증식은 없게 된다.
둘째 암세포는 몸안의 주변조직들을 쉽게 뚫고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원래의 암괴(癌塊, 암덩어리)로부터 쉽게 떨어져 나간다. 이 암괴는 혈액 또는 림프를 따라 신체 다른 부위로 이동, 새로운 이소성 병소(異所性病巢)를 형성한다. 이와 같은 암의 침윤성(浸潤性)과 전이성(轉移性)이 바로 암을 가공스러운 질병으로 만드는 직접 원인이다.
셋째 암세포는 정상세포보다 생존력이 훨씬 강하다는 점이다. 양자의 생존력은 시험관내 배양조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정상세포와는 달리 암세포들은 열악한 여건에서도 쉽게 적응, 끈질기게 살아 남는 것이다.
또한 암세포의 이물질(異物質) 대사계는 정상세포의 그것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항암제들에 대한 내성(耐性)은 암세포가 월등히 높다. 암세포는 항암제를 세포 밖으로 밀어내는 기능이 뛰어나고 항암제의 세포내 대사를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암제에 대한 해독기능이 커짐으로써 강한 약제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넷째 암세포는 정상세포와 형태적·구조적으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겉모양으로도 쉽게 구분되며, 특히 병리조직학적으로 분석해보면 확연히 식별된다. 또 암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들과 그 구성비가 정상세포와 크게 다르다. 아울러 이들의 구성방법에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세포 구성성분의 차이는 정상세포와 암세포가 면역학적으로 다름을 의미한다.
BRM의 부작용
암치료방법중 의학적으로 가장 널리 권장되는 방법은 외과수술적 제거다. 실제로 특정 부위에 발생한 암종의 조기제거는 암치료의 첩경이다. 또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더욱이 수술 기술과 각종 보조요법의 발전은 암종의 외과적 제거를 보다 용이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암종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대안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외과수술이 불가능한 환자를 위한, 암치료의 두번째 방법은 약물요법이다. 이미 30여종의 항암제가 임상에 이용되고 있는데 이들중 대부분은 암조직의 빠른 분열·증식을 억제함으로써 항암작용을 나타내는 약제들이다.
일반적으로 세포가 증식하려면 무엇보다 핵산대사가 왕성해야 하고, 여기서 생합성된 퓨린(purine) 및 피리미딘(pyrimidine) 뉴클레오티드(nucleotide)들이 DNA복제에 원활하게 이용돼야 한다. 따라서 대개의 항암제들은 이러한 뉴클레오티드 생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들의 활성을 방해하는 물질들로 구성돼 있다. 이같은 기능을 가진 것들중 부작용이 비교적 적은 제제가 선택돼 임상에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포증식 억제형 항암제는 '시력'이 별로 좋지 않다. 암조직에만 '힘'을 발휘해야 하는데 정상조직중 분열속도가 빠른 세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상적이지만 유독 재생이 왕성한 조직들로는 위장관의 상피세포, 조혈기관의 혈구조성세포, 피부의 모발형성세포 등을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암환자가 항암제를 복용하게 되면 방금 예로 든 세포들이 영향을 받아 부작용을 일으킨다. 공통적인 부작용으로는 소화기능과 위장관 장애, 조혈기능 부전(不全)에 의한 혈액이상, 탈모 등을 들 수 있다.
항암제의 부작용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게 아니다. 실제 임상에서 보면, 암세포들은 항암제에 대한 내성을 매우 빠르게 획득한다. 그러면 항암제의 사용량을 증가시켜야 효과를 볼 수 있으므로 정상조직에의 부작용은 더욱 늘어나 결국 약물요법의 한계점에 이른다.
암치료의 세번째 방법으로는 물리요법이 있다. 이 요법은 각종 방사능이나 열선 등을 이용, 직접 또는 세포내의 기(基, radical) 생성을 유도하는 간접방법으로 암세포의 DNA에 타격을 가해 암세포를 괴사시킨다.
이러한 치료방법의 요체는 방사능을 표적이 되는 세포에 정확하게 일정량 조사시킬 수 있는 물리적 장치의 개발이다. 아울러 몸안 깊숙이 숨어 있는 심층암(深層癌)조직에 이를 수 있는 강력한 방사선을 찾아내는 일이다. 실제로 감마(γ)선 엑스(X)선 양자선 그리고 헬륨(He)이온을 이용한 저(低)LET 소립자선, 중성자나 네온(Ne)이온과 같은 고(高)LET 소립자선들이 개발돼 일부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방법은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그 치료방법 자체가 정상세포를 암화(癌化)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암조직 주변의 정상조직들에 미치는 여러 부작용을 배제할 수 없으며, 특히 전이암종(轉移癌腫)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암치료의 네번째 방안으로는 최근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는 면역요법과 BRM(생체활성 조절물질)을 활용하는 것이다. 즉 암세포와 정상세포의 면역학적 성상이 다름을 이용, 생체내 면역기능을 항진시켜 암세포를 죽인다. 이 요법의 주역은 각종 인터루킨(interleukin)류 인터페론(interferon)류 LAK세포(Lymphocyte Activated Killer cell) TIL세포(Tumor Infiltrated Lymphocyte cell)등과 같은 새로운 BRM들이다.
특히 이 방법은 유전자 재조합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생체내에 극미량 존재하던 것들을 대량생산해낼 수 있게 됨에 따라 그 활용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BRM의 사용시에는 여러 각도에서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암치료방법들을 정리해 보고 그 문제점들을 제시해 보았다. 이들을 요약해 보면 새로운 암치료 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다.
요컨대 암치료의 난관으로는 다음 세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항암제의 암조직 선택능력 부족에 따른 부작용 발생, 둘째 암세포의 치료제들에 대한 재빠른 내성(耐性)획득, 셋째 전이암종에 대한 치료방법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항암제를 무력하게 하는 물질 찾아내
암치료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제기됐던 문제점들의 해결이 선결조건이다. 따라서 그러한 측면에서 여러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항암제를 사용하거나 방사선을 조사함으로써 암을 치료하고자 할 때 암조직을 잘 선별하는 능력을 항암제나 방사선에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물리적 방법을 얼른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암 발생부위로 공급되는 동맥혈에 항암제를 투여하거나, 기계적 조작을 통해 방사선을 특정부위에 조사하는 방법 등은 이미 시행하고 있다.
물론 그런 방법도 어느 정도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나, 본격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 항암제나 방사선의 '시력'을 높이려면 암조직 고유의 대사계, 즉 정상조직에는 전연 없는 암조직 특이효소를 발견해 그 효소에 대한 선택적 저해제를 개발하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또 암조직 특이항원을 찾는 것도 암정복의 지름길이다. 암조직 특이항원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 항원에 대한 모노클로날항체(단클론항체, monoclonal antibody)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클론항체 자체 또는 그 항체에 각종 항암제를 결합시켜서 암환자의 몸안에 주입하면 암세포만을 골라서 죽일 수 있다.
암조직 특이항원에 대한 단클론항체는 흔히 환상의 마법탄환(magic bullet)으로 불리고 있다. 체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원발성 암 뿐 아니라, 전이암들까지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클론항체는 치료제로서의 응용 가능성은 물론이고, 암의 진단 및 영상화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둘째 암치료시 항상 동반되는 정상조직의 손상과 암조직의 약제 내성획득을 억제하는 방안이 개발돼야 한다.
항암제나 방사선조사시 세포가 죽는 이유는 이렇다. 이들이 세포내에서 만든 기(基)들이 세포의 DNA나 주요 단백질들과 결합, 그 기능을 떨어뜨림으로써 세포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직손상 메커니즘을 잘만 응용하면 만사가 해결될 수 있다. 방사선이나 항암제의 사용시, 암조직 내의 기들은 왕성하게 생성되도록 도와주고, 정상조직에 기가 생기는 것은 막아 주면 되는 것이다. 또 정상조직에 이미 생성된 기들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방안을 개발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의 하나로서 현재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물질이 있다. 생체세포 내에 있는 기 제거에 특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글루타치온계다.
좀 더 자세히 그 과정을 점검해 보자. 암세포 내에 존재하는 글루타치온의 생합성을 따라 다니면서 방해하는 약제인 부치오닌설폭시민을 사용하면 암세포 내 글루타치온 함량이 감소된다. 따라서 각종 약제나 방사선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하게 높아진다. 반대로 정상세포들의 글루타치온 함량을 보강시켜 주는 방법으로는 옥소치아졸리딘 카르복실산 감마글루타밀다이시스테인 글루타치온에스테르 등의 투여가 있다. 그러면 정상세포 안에 있는 기들을 제거시켜버림으로써 세포의 저항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암조직들이 항암제를 깔보기 시작할 때면 공통적으로 항암제의 세포내 활성화 기능이 떨어진다. 동시에 해독기능 증가, 세포외 배출기능 항진, DNA손상 수복능력 증가를 보인다. 따라서 항암제의 효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암세포의 활성 또는 유전적 발현에 영향을 주는 방안이 가능해진다.
최근에는 약제내성에 관여하는 '주범'이 발견돼 연구에 활기를 띠고 있다. 항암제들을 세포밖으로 배출시켜버리는 분자량 1백70KDa정도의 P-당단백질이 암세포의 세포막에 존재함이 밝혀진 것이다. 이 P-당단백질은 약제내성이 높을수록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 P-당단백질이 칼슘채널억제제 등에 의해 그 기능이 차단되면 항암제의 세포외 배출이 억제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다시말해 칼슘채널억제제 등을 항암제와 함께 복용하면 항암제의 유효농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고, 약제내성이 생기는 것을 지연시킬 수 있다.
전이를 차단하라
셋째로 암치료시 가장 까다로운 문제인 암의 전이(轉移)방지 방안의 개발이다. 실제로 암이 다른 부위로 옮겨다니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암은 특정 부위에 국한될 것이다. 그러면 단순한 외과적 수술만으로도 암을 근치(根治)시킬 수 있게 된다.
암이 다른 부위로 옮겨 가는 과정은 몇 단계로 나뉜다. 먼저 암조직으로부터 암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이들 암세포가 혈액 또는 림프를 따라 이동, 특정한 표적세포에 부착해 증식된다. 만일 이러한 전이과정중 어느 한 단계라도 차단시킬 수 있다면 암의 전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면역요법도 암의 전이과정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혈액 또는 림프를 따라 이동되는 암세포들을 찾아 죽이지만 그 효과는 매우 제한된다.
최근에는 보다 확실하게 전이계단을 차단시키는 새로운 방안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다. 특히 암세포가 암괴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과정에서 제4형 콜라겐(collangen)분해효소가 관여함이 밝혀져 관련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이미 이 효소에 대한 선택적 억제제의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 억제제를 이용하면 암세포가 암괴로부터 혈액으로 빠져나오는 과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는 암세포가 표적조직에 부착되는 과정도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피브로넥틴을 포함하는 여러 종류의 넥틴단백질과 이들의 세포막 수용체(receptor)인 인테그린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연구에 활기를 띠게 되었다. 넥틴과 인테그린의 결합을 방해할 수 있는 방안이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결합부위의 공통구조가 넥틴류의 특정 펩티드(peptide) 서열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똑같은 펩티드를 합성해 동물실험을 해 보았는데 좋은 결과를 얻었다. 표적세포의 인테그린을 펩티드들이 봉쇄해 버리면, 암세포가 부착될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암의 전이가 억제되는 것이다.
암과 싸워 이기려면 보다 정확하고 정밀한 암의 조기 진단방법이 시급히 확립돼야 한다. 또 항암제의 부작용을 줄이고 효능을 증진시키는 새로운 병합요법, 각종 BRM의 개발, 강력한 방사선 조사장치, 방사선보다 세포독성이 적은 열선을 이용한 온열치료방법, 암환자의 영양과 재활을 위한 각종 보조요법 등의 개발이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