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일어권에서 개발된 컴퓨터를 우리 문화에 짜맞추려고 한글을 뜯어 고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문화에 맞고 우리가 쉽게 쓸 수 있는 컴퓨터를…
우리가 컴퓨터를 도입하여 사용한지 20년, 비록 개인용이지만 국내에서 컴퓨터 생산을 시작한지도 10년이 되었건만 컴퓨터사에서 한글의 사용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물론 극히 단순한 문자 입출력기능은 제공되고 있지만 영어권, 심지어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문서편집기에 비하면 매우 초라하다. 그동안 '학문적 연구가치가 낮다'든지 '사업상 이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든지 하는 등의 이유로 한글사용에 관한 컴퓨터상에서의 연구개발을 소홀이 한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왜 그동안 한글문제를 심각히 다루지 않았는가 그 배경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컴퓨터가 국내에 처음 소개될 때에는 그 기능 및 용도가 산출계산기능으로 국한되어 있었고 일부 전문가만이 사용하기 때문에 한글입출력기능은 필요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후 자료처리용으로서 컴퓨터가 자리를 잡아갈 때 비로소 한글입출력기능의 요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최소의 노력으로 요구하는 기능을 부여하기 위하여 단기적으로 임기응변식의 대응을 하였다. 영문 프린터에 한글자판을 끼워 넣어서 한글을 세줄로 찍었던 70년대의 전화요금계산서를 기억하시는 분은 쓴 웃음을 지으실 것이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에 힘입어 컴퓨터의 개념이 사무실의 필수품으로 확장되고 문서작성 등의 일상적인 업무에 컴퓨터를 이용하면서 고도의 한글입출력기능이 요구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요구에 대비가 없었다. 70년대에는 컴퓨터의 운용기술을 배우기에 급급했다.
반(反)문화적인 '컴퓨터 한글'
우리나라는 곧 정보화사회로 진입한다고 한다. 정보화사회라고 하면 정보의 창출, 전파 이용이 대중화되는 민주사회이리라. 정보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국민복지면 컴퓨터가 단순한 사무용품으로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국민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장비, 나아가서는 문화창출의 동반자로서 인식될 것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창작활동에 컴퓨터의 활용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컴퓨터가 일상생활의 이기나 문화창출의 동반자로 인식될 때는 단순한 한글의 입출력이 된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와 한국어로 대화하고, 컴퓨터가 한글로 쓰여진 정보를 읽고 멋진 문장을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컴퓨터와 우리 문화의 관계는 주종이 뒤바뀐 관계였다. 우리 문화를 창달하기 위하여 컴퓨터가 보조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영어권에서 개발된 컴퓨터에 우리 문화를 끼워 맞추려고 우리 문화를 뜯어 고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키보드자판의 구성이 그렇고 완성형 한글코드의 발상도 그렇다.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하니 일본에서의 해결책을 모험답안으로 생각하고 옮겨오기에 급급했다. 요즈음 컴퓨터와 한글을 비롯한 우리 문화를 새로운 컴퓨터문화와 결합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기술적 문제의 체계적인 연구없이 단기적인 얀목으로 문제를 모면하려 했다는 데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1987년 많은 논란 끝에 결정된 완성형 한글코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표준으로 결정된지 2년이 채 안되는 이 시점에서 필요로 하는 글자를 만들 수 없다는 불평이 나오고 심지어 반문화적 발상이라는 혹평이 나오는 등 반대의견이 높아지고 있다. 즉 그들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이래 이어오던 '자소를 모아서 글자를 만든다'는 우리의 한글문화전통을 뿌리채 뽑아버린 것이라고 흥분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의 유지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한 연구와 실험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비록 우리의 지난날은 그렇다할지라도 이제는 우리의 정보산업계 및 학계도 본격적인 한글관련 연구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난 20년간 국내에서의 컴퓨터관련연구는 수출증대 수입체효과 등의 기업형 연구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다.
즉 하드웨어는 외국기종과 호환성 있는 제품의 생산이 목표였고 소프트웨어는 응용부분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국내의 전산기술도 괄목할만큼 발전하여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 힘으로 중형컴퓨터를 만들고 운영체제를 설계하며 프로그램언어를 독창적으로 개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컴퓨터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술적 바탕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보화사회에 알맞는 한글문화를 키워나겠다는 국가정책 차원의 결연한 의지와 연구투자이다. 이러한 연구투자는 국내정보시장의 확대와 시장개방압력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컴퓨터의 사용이 편해지면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찾을 것이고 컴퓨터의 응용분야가 확대될 것이다. 우리가 한글관련기술을 확보하여 우리 시장에서 훨씬 다양한 기능, 우수한 성능의 상품을 공급할 때 외국상품의 침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PRINT'를 '찍어라'로(?)
한글과 한국어를 기반으로 컴퓨터와 대화하고자 하는 연구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즉 한국어 한글을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기본언어로 하기 위한 컴퓨터시스템 요소의 연구와 한글 및 한국어 입출력장치의 개선에 관한 연구, 그리고 컴퓨터에게 한국어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 연구분야가 칼로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한 분야의 연구를 위해서는 다른 분야의 연구 결과를 필요로 하는 등 상호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첫째 컴퓨터 요소의 연구는 컴퓨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운영체계의 연구로부터 시작된다. 한글을 자연스럽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한글을 염두에 두고 운영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십여년간 외국에서 개발된 소프트웨어에서 한글을 사용하기 위하여 임기응변적인 조치에 많은 노력을 낭비한 후 운영체계로부터 한글이 지원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점을 배웠다. 물론 이러한 차원에서 한글코드문제도 재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단순히 컴퓨터가 한글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 한구어를 기본으로 컴퓨터와 의사소통한다는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한국어를 기본으로 한 컴퓨터에서는 모든 명령어 및 프로그램언어 데이터 베이스 질의어가 한국말로 되어 있어야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하여 영어단어를 먼저 배워야 한다면 컴퓨터가 어찌 우리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언어 명령어 또 요즘 많이 사용되는 메뉴에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능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한국말이 무엇인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한 예로써 'PRINT'기능에 해당하는 한국어 명령어를 '찍어라'라고 하기에는 뭔가 어색하다. 명령어 프로그램언어 메뉴의 선택자는 매우 짧은 어절로 복잡한 기능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에 국문학자 시인 소설가 등의 연구참여로 아름답고 기능적인 컴퓨터 한글어휘를 개발하여야 한다.
한글문서를 작성하고 편집할 수 있는 문서편집기 및 데스크톱출판시스템의 연구도 계속되어야 한다. 지난 몇년에 걸쳐서 몇 종류의 한글문서편집기가 시장에 출현하였지만 그 기능이나 성능이 영어권에서 개발된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 소위 'What you see is what you get'(WYSWYG)이라고 할만큼 문서의 상태를 직접 보면서 편집할 수 있고 만족할만큼 다양한 서체, 다양한 크기의 한글을 쓰기 쉽게 지원하는 시스템을 아직 보지를 못했다. 또 외국에서는 이미 실용화되고 있는 철자법상의 실수를 지적하고 자동으로 교정해주는 시스템, 문장의 형식을 분석하고 보다 좋은 표현 방법을 제안하는 시스템 등의 한국어판의 개발이 문서편집기 사용의 활성화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왼손이 혹사당한다
두번째 연구분야는 한글 한국어 입출력시스템의 연구이다. 입력장치로서 지난 20년간 깊은 연구없이 영어권에서 개발된 키보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과연 그런 형태의 키보드시스템이 한글입력을 위하여 적절한가 한번 의문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 공업진흥청의 표준자판배열에 관하여 불평의 소리가 높으니 더욱 그렇다. 왼손과 오른손의 업무분담에 균형을 잃어서 왼손이 혹사당하고 있다고 개선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다. 차제에 만지면 감응하는 그래픽을 이용하여 자판의 배열 및 키의 크기를 사용자가 조정할 수 있는 입력장치 등을 심각하게 연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첨단입력방법으로서 문자인식 및 음성인식의 연구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문자인식의 경우는 인쇄체 한글의 자동입력은 제한적이나마 실용화되고 있고 필기체의 경우에도 필자가 제한되어 있을 때 높은 인식률을 얻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음성을 이용한 입출력시스템도 많은 응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많은 연구진전이 있다. 한글의 출력은 주로 글씨모양에 관한 문제들이다.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찍어내는 데 급급하여 글씨의 모양에 대하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데스크톱출판시스템과 레이저프린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많은 회사에서 더욱 예쁜모양의 글씨체를 준비하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우리 출판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인본의 인쇄기업체의 영향이다. 미적감각은 길들여지는 것이라서 글씨체를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아름답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서둘러서 우리의 글씨체를 개발하여 일본에서 개발된 한글서체를 배척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글자모양생성기 등의 연구도 게을리 말아야 한다.
언어학과 전산학의 만남
세번째 연구분야는 한국어의 이해분야이다. 입력장치를 통해 들어온 한국어 문장을 이해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지능적인 컴퓨터의 개발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개발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하여는 한국어에 대한 언어학적 문법적인 연구조사부터 수행하여야 한다. 기초연구가 없는 상태에서 졸속으로 언어이해시스템을 개발하고자 하였던 무모한 시도를 반복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문장은 구조적 분석과 의미론적 분석을 거쳐야만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구조적 분석과정은 언어마다 그 특성이 다양하여 우리말을 위해서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연구를 수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연구를 지원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전산화된 한국어사전이다. 언어이해시스템을 위한 사전은 사람을 위한 사전과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구성 및 내용도 달라야한다. 이러한 사전의 편찬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방대한 작업으로서 관련국어학자 사전편찬학자 전산학자들의 협력과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에서 문화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원하여야 한다. 한국어 이해능력이 조금이라도 갖추어지면 이 능력을 이용한 응용시스템들을 개발하여야 한다. 전문가시스템과의 대화라든가 데이터베이스의 검색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할 수 있는 날이 곧 도래하기를 소망한다.
한글문화를 위한 컴퓨터기술의 연구는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시작하여야할 우리의 사업이다. 우리의 문화에 맞지 않는 외국기술이 시장을 장악할 때 우리의 문화를 그들의 기술에 맞추어야 하고 마침내는 예속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정보화사회를 우리 민족문화를 더욱 빛내고 계승한다는 민족자존의 차원에서 또 소프트웨어 개발인력의 생산성을 제공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에서 추진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