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얼음 바다에 불과하지만, 북극의 자원 군사 과학적 중요성은 급격히 증대되고 있다.
만년빙의 대륙 남극과 같이 얼음과 매서운 추위, 그리고 거의 6개월만에 낮과 밤이 교대되는 적막의 나라. 이런 것들이 북극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극과 남극은 극지방으로서 갖는 비슷한 점보다는 오히려 서로 대비되는 다른 점들이 더 많다.
우선 남극은 근본적으로 육지대륙인 반면 북극은 베링해협과 북대서양방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린랜드 및 북미대륙과 유라시아대륙으로 둘러싸인 심해의 지중해라는 점이다. 또 매서운 바람과 혹독한 추위는 양 극지방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이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바다인 북극이 대륙인 남극보다 훨씬 온화한 것이다. 북극의 중심부는 밑에 바다가 있기 때문에 기온은 그다지 내려가지 않는다. 한겨울의 북극해 중앙부나 그린랜드 내부의 기온은 ―35˚~―40℃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여름의 기온은 그린랜드 내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0℃가 된다. 북반구에서 최저기온을 나타내는 곳은 북극이 아니라 오히려 시베리아 동부의 내륙부와 캐나다 북부이다.
북극과 남극의 이런 차이 때문에 북극 주변의 육지는, 항상 얼음에 뒤덮혀 있는 버려진 땅들이 아니다. 1년중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하더라도 북극지방에는 영상의 기온으로 올라가는 여름이 있으며 이 기간동안 얼음과 눈은 사라지고 툰드라라고 일컬어지는 연두색빛의 평원지대는 잠시 제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환경때문에 인류는 북극지방에서 수천년이상 거주해 오고 있으며 4백여종 이상되는 다양한 식물군과 곰, 순록, 북극여우 등 수십종의 포유동물류도 번식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왜 중요한가
그러면 왜 최근들어 북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가? 북극과 인접한 소련 캐나다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가 북극에 크게 관심을 쏟고 있는 이유는 우선 이 지역에서 지난 수년동안 상당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다른 유용한 자원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알래스카 북부의 '뷰포트'해(Beaufort Sea), 소련 '콜라'반도 북부의 '바렌츠'해(Barents Sea), '카라'해(Kara Sea)대륙붕에서는 이미 수천억 배럴 이상의 석유와 수백억조 ㎥ 이상의 천연가스 매장량이 확인되어 시추작업이 한창이다. 이들 이외의 금 아연 납 등 유용한 광물자원의 매장가능성도 높게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북극의 중요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한 핵잠수함의 발달로 북극해 해저항해가 빈번하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증대되고 있으며 바다얼음에 대한 시추기술과 쇄빙선의 발달은 북극해를 태평양이나 대서양과 거의 같은 평상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과학적으로는 북극의 해빙(海氷 : sea ice)과 빙상(氷床 : ice sheet)이 지구전체의 기상변화에 미치는 영향도 재평가되고 있으며 1982년 제3차 유엔(UN)해양법협약의 채택에 따라 북극과 인접한 국가들이 관할권을 확대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도 북극에 대한 관심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다.
이렇게 높아가고 있는 북극의 자원, 군사전략, 과학 및 법률적 중요성때문에 미국의 유명한 국제정치학자 '오란 영'(Oran Young)교수는 지금으로부터 수년내에 곧 '북극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을 서슴없이 내리고 있다.
다양한 북극의 정의
우리가 흔히 북극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북극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위도지방의 지역을 일컫는다. 그러나 고위도지방이 갖는 독특한 자연환경에도 불구하고 북극지방의 단일한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정의가 여러가지로 내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북극지방의 경계선으로서는 북극권(Arctic Circle), 수목의 북한선(北限線 : tree line), 영구해빙 경계선(sea-ice coverage) 영구동토대(permafrost)등을 들 수 있다.
이들중 북극권은 밤과 낮이 정확히 6개월씩 교체되는 북위 66˚33' 이내의 지역으로서 대체로 하절기인 3월15일경부터 9월20일경까지는 하루 24시간 내내 낮만이 계속되고 그 나머지 기간은 밤만이 계속되는 지역의 위도 경계선이다. 따라서 이 위도를 벗어나면 하루 24시간 중 비록 불균형하더라도 낮과 밤이 모두 존재한다. 일례로 하절기동안 북극권을 벗어난 북위62˚부근에서는 하루 낮길이가 20시간이며 밤길이는 4시간이 된다. 이러한 경계선은 남극에서 정반대로 적용된다. 즉 남위 66˚33'를 기준으로 남극권(Antarctic Circle)에서는 3월15일경부터 9월20일경까지는 하루 24시간 내내 밤만이 계속되고 나머지 기간은 낮만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나 밤과 낮의 길이를 기준삼아 북극지방의 범위를 나타낼 수는 없다. 북극권과 상관하지 않고 비슷하게 일어나는 자연현상때문에 이 위도선은 북극지방의 적절한 경계선이 되지 못한다. 앞서 인용된 수목의 북한선, 해빙경계선, 영구동토대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들도 북극지방의 절대적인 경계선은 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북극지방의 가장 적절한 경계선은 하절기의 절정기간(7월)중 기온이 섭씨 10˚도가 되는 지역을 연결한 '10℃ 능온선'이 되고 있다. 이 '10℃등온선'은 대체로 눈으로 감지할 수 있는 수목북한선 또는 툰드라경계선과 같은 자연경계선과 일치하고 있으며 위도상으로 유라시아대륙쪽에서는 북극권 내부에, 그린랜드·캐나다 동북부 및 베링해협쪽에서는 북극권보다 훨씬 남쪽인 위도 55˚선까지 남하하고 있다. 북극지방의 경계선을 '10℃ 등온선'으로 삼을 경우, 이 선안에 포함되는 지역은 1천2백㎢ 넓이의 북극해를 비롯하여 그린랜드, 캐나다동북부의 도서지방, 아이슬랜드 북부 등 모두 2천만㎢이상에 이르게 된다.
3~4m의 얼음으로 뒤덮인 가장 작은 바다
북극지방의 중심이 되는 북극해는 지구의 5대양 중 가장 면적이 작은 바다이며 그 크기는 정확히 1천2백25만7천㎢로서 인도양의 6분의 1이 조금 넘는다. 음파로 측정한 북극해의 가장 깊은곳은 노르웨이 북단 스피츠버겐군도 근처의 리트케해곡으로 그 깊이는 약 6천m에 이르며 북극해 전체의 평균수심은 지구 5대양 중 가장 얕은 1천80m를 기록하고 있다. 북극해의 가장 큰 특징은 어느 무엇보다도 남극주변과 같이 바다의 대부분이 평균두께 3~4m의 영구해빙으로 뒤덮혀 있다는 점이다. 북극해의 얼음두께는 곳에 따라서 12m까지 이르기도 한다. 겨울동안 북극해의 얼음은 1천1백70만㎢까지 확대되나 여름에는 5백20만㎢로 줄어든다.
북극해의 얼음은 바다중심부부터 얼어 있는데다 바다자체가 대륙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남극의 얼음보다 더 서서히 녹고,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름에 떨어져 나간 북극해의 얼음은 부빙군(浮氷群)을 이루면서 해류를 따라 북대서양으로 남하한다. 이 부빙군들이 곧 빙산인데 그 크기는 대체로 길이 1백50m, 넓이 60m에 두께는 30m가 넘는다. 이들은 그린랜드해류와 라브라도르(Labrador)해류를 따라 매년 1만여개씩 캐나다 동부의 뉴파운드랜드 섬지역의 북위 50˚선까지 흘러간다. 이 빙산들이 여름동안 북대서양을 항해하는 선박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가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12년 세계최대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Titanic)호는 바로 뉴파운드랜드 섬 앞바다 북위 42˚ 부근에서 이들 빙산중의 하나와 충돌하여 침몰, 수천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이다.
바다밑을 보면, 북극해의 해저는 20세기 중엽까지도 거대한 단일 분지로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950년 이후의 본격적인 과학탐사에 의해 복잡한 해저지형의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북극해의 해저지형은 하나의 거대한 분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해저중심부를 가르는 3개의 해령(海嶺 : submarine ridge)으로 나누어진 4개의 분지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 해령의 중심부는 캐나다 북부 '엘레스미어'섬 대륙붕으로 부터 극점을 통과하여 뉴 시베리아군도까지 연결되어 있고 그 길이는 약 1천8백km에 이른다.
이러한 거대한 해저산맥의 북극해지형은 소련의 과학자이자 시인이며 언어학자인 '미하일 바실예비치 로모노소프'(Mikhail Vasilyevich Lomonosov)에 의해 1948~49년 수행된 탐사결과로 밝혀졌는데(논문은 1954년 발표) 이 때문에 북극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해저산맥은 '로모노소프' 해령(Lomonosov Ridge)으로 명명되어 있다.
북극해 해저의 또다른 특성은 유라시아대륙쪽으로 대륙붕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북극해 총면적의 3분의 1은 깊이 2백m내외의 대륙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베리아 북부와 베링해협상부의 '추크치'(Chukchi)연안쪽에서는 대륙붕의 넓이가 무려 4백80km에서 1천8백km까지 확장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의 관측에서 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을 지닌 고대 그리스인들은 북극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문관측을 통하여 저 너머 북쪽에는 한 여름밤에도 빛나는 태양이 있으며 한 겨울에는 어둠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추정했다. 그들은 북풍이 불어오는 저너머에는 조용한 땅이 있으며 북녘하늘 밑의 상춘(常春)의 나라에서는 극북인(極北人 : Hyperborean)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적인 상상은 자연스럽게 북극탐험을 유인하였고 새로운 지식과 부를 추구하려는 탐험가들은 앞을 다투어 북극도전에 나섰던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북극지방을 탐험한 사람들은 서기 870년에 '콜라'반도의 남부해안을 항해한 노르웨이인들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이후 아이슬랜드 및 그린랜드까지 진출하여 정착했으며 일부 노르웨이인들은 북위 70˚이북의 스피츠버겐(스발바르드라고도 불림)군도와 '노바야 젬라야'섬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극탐험은 영토의 20%이상이 북극권내에 위치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지배층 귀족의 재정적 지원을 받은 상업 탐험대들이 북극을 탐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1733년에는 '피터'대제와 '바이터스 베링'의 후원을 받은 제2차 캄차카 탐험대(대 북방탐험대라고도 불림)가 러시아의 미발견 북방영토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항로를 찾기 위해 10여년간이나 지속적으로 북극탐사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피터대제 등이 지원한 이 모험은 비록 항로발견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탐험의 결과로 화이트해에서부터 추크치해에 이르는 러시아의 북방영토 해안지도가 완성되었으며 탐험대는 알류산열도와 북미대륙의 북서해안을 횡단하고 큐릴열도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였다.
러시아인의 북극탐험이 국가적 지원하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반면 북극과 인접한 캐나다 노르웨이 등 다른 나라들의 탐험은 보다 소규모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또 이들 나라의 북극탐험은 대부분 해안지역의 지리적 탐사에 주요목적이 두어졌거나 아니면 1845년 북극탐험에 나섰다 실종된 영국인 존 플랭클린경의 탐사대를 수색 구조하기 위한 것에 두어졌다.
플랭클린경을 수색 구조하기 위한 탐험활동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으며 이 활동이 비록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북극지방의 많은 부분이 알려지게 되었다. 노르웨이의 로알드 아문젠이 1903~06년에 걸쳐 처음으로 캐나다 동북부에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이른바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를 배로 횡단한 것도 이 때에 얻어진 지리적 자료덕분이었다.
아문젠이 북서항로를 발견함에 따라 각국의 북극탐험 주요목적은 극점도달경쟁과 과학자료수집에로 그 양상이 변모되었다. 북극점에 도달하기 위한 초기의 시도로 인하여 그린랜드 및 '엘레스미어' 섬 북부해안의 지리적 특성이 밝혀졌으며, 노르웨이의 '난센'은 1893~96년에 프람(Fram)호로 극점도달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북극해의 부빙군(浮氷群)에 대한 많은 해양과학적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다. 난센은 특히 뉴시베리아군도 앞바다에서 스피츠버겐 군도 해안까지 표류하면서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빙에 대한 자료와 북극해의 수심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이다.
북극점도달은 1909년 4월 6일 마침내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에 의해 성취되었다. 피어리는 엘레스미어섬 북부에서 개썰매로 출발, 인류최초의 북극점도달 위업을 성취한 것이다. 이 때에 북극점도달 경쟁에 실패한 아문젠은 1910년 자신이 탄 배(1893년 난센이 사용했던 프람호)의 선수를 남으로 돌려 남극탐험에 도전, 1911년 12월4일 인류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은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공중에서 처음으로 북극점에 도달한 사람은 미국 해군장성 '리차드 버드'로서, 그는 1926년 5월9일 스피츠버겐으로부터의 왕복비행에 성공했다. 또한 이틀후에는 아문젠과 이탈리아의 '노빌레' 등은 똑같이 스피츠버겐에서 비행선으로 알래스카까지의 북극횡단에 성공하였다. 버드는 특히 북극왕복비행에 성공한 3년후인 1929년 최초로 남극점통과 비행에도 성공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북극탐험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동력(핵 엔진), 해양기술(특히 쇄빙선의 건조), 항해술(특히 관성유도항법 및 인공위성의 이용)에 있어서의 눈부신 발달은 1958년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Nautilus)호와 스케이트(Skate)호로 하여금 얼음밑으로 북극점 통과를 가능케 하였으며 1977년 소련의 쇄빙선 아르크티카(Arktika)호는 얼음을 깨고 북극점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북극의 곳곳에는 1957~58년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을 전후하여 캐나다 소련 미국 등에 의해 설치된 3백여개의 관측소로 부터 각종 기상과학자료가 수집되고 있으며 알래스카 북부의 '프루도'만(Prudoe Bay), '뷰포트'해 등에서 석유 및 천연가스가 발견됨에 따라 북극지방의 탐험은 새로운 개발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몽고인과 코카서스인
북극지방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상상했던 단일인종의 극북인(Hyperborean)들 대신에 다양한 인종적 기원을 갖는 토착민들이 살고 있다. 인류가 본래 열대성동물(tropical animal)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북극지역은 이제 막 탐사가 시작된 남극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정착한 마지막 지역임에 틀림없다.
북극의 토착민들이 언제부터 북극지방에 살게 되었는지 그 기원은 확실치 않아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우선 유라시야대륙쪽의 토착민 조상은 수천년전 중앙아시아에서 사냥을 위해 북으로 진출했던 인종들로 추정된다. 유럽쪽에서도 사냥을 위해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거쳐 콜라반도까지 진출한 코카서스인들이 이 지역 토착민들의 선조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북미대륙의 경우, 에스키모선조와 아메리칸 인디안의 북극진출경로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에스키모기원에 대해서는 첫째, 물개사냥 등 겨울생활에 쉽게 적응한 아메리칸 인디안들이 자연적으로 에스키모인이 되었다는 설과 둘째, 이미 아시아대륙에서 동토생활에 익숙해진 인종들이 그들의 선조가 북미대륙으로 이동한 훨씬 이후에 신대륙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이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어느 이론이 옳든 지간에 베링해협연안과 북미대륙에서 사냥도구를 포함한 에스키모인의 유적은 기원전 2~3천년의 것까지 발견되고 있다.
현재 북극지방에 사는 토착민들은 크게 2개의 인종집단으로 나눠진다. 하나는 아시아계통의 몽고인종(Mongoloid)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계통의 코카서스인종(Caucasoid)이다.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 그린랜드, 시베리아 동북부 등 서부 북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 이누이트, 아메리칸 인디안, 추크치족들은 몽고계 인종이며 예니세이강을 기준으로 우랄산맥북부와 콜라반도 등 동부 북극 지방에 사는 '칸트' '만시' '코미' '랲' 족들은 기본적으로 백인계인 코카서스인종이다. 이들의 인구총수는 1백만이 채 안되는 약 85만명이며 대부분 북위60˚와 75˚사이의 해안영토에 흩어져 사냥과 유목으로 살아가고 있다.
북극의 혹독한 기후환경과 제한된 식량공급원때문에 북극토착민들의 생활형태는 많은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얼음위를 걸을 수 있는 눈신발, 순록·백곰의 가죽 및 털로 만든 외투, 사냥기술, 독특한 주거형태, 가족단위의 사회조직 등은 서로 매우 유사하다.
북극의 토착민들은 생활형태만이 비슷한 것이 아니다. 혹독한 기후 및 생활환경에 적응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인종적 기원에 관계없이 공통된 신체적 특징을 지닌다. 북극토착민들의 가장 두드러진 외형적 특징은 신체가 왜소하다는, 더욱 정확히 말해서 키가 작다는 점이다. 시베리아 동북부에 사는 추크치족을 제외한 북극 토착민들의 성인 평균키는 1백50cm가 겨우 넘을 정도이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공통된 신체적 특징은 몸길이에 비해 허리가 크며, 몸통에 비해 팔·다리가 짧고(특히 팔목과 손사이, 무릎과 발사이는 그 상반부에 비해 더욱 짧다), 비교적 작은 손과 발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혹독한 추위에 적응하면서 자연적으로 진화된 변화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옷을 입고 바깥에서 활동할 때 팔다리가 짧고 손발이 작을수록 외부공기에 노출되는 부분도 그만큼 적어져 추위를 덜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들의 신체적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냥을 위주로 한 북극지방토착민들의 전통적인 생활형태는 근대에 들어 백인탐험가와 무역상들을 접촉하면서부터 많이 변모되었다. 창 칼만을 사용하던 사냥무기에 라이플 장총 등 화력무기가 추가되었고 무역상들에 의해 술이 소개되는 바람에 알콜중독자가 늘어나는 것도 북극지방토착민들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지난 10여년이상 미국 캐나다 등은 사냥산업의 사양과 함께 에스키모, 이누이트인에 대한 집단정주정책(集団定住政策)을 펴 이들에게 현대식 학교 주택 의료제도 등 모든 방면에 걸친 20세기의 문명을 유입시킴으로써 북극지방 토착민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은 점점 더 백인들의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더욱이 최근 붐이 일기 시작한 알래스카북부와 프루도만 등 북극지방의 유전개발로 인하여 일부 토착민들에게는 보다 더 근대적인 직업이 제공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의 북극지방토착민들은 사냥을 위주로 한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대문명의 과대한 도입은 오히려 이들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위협하고 있다.
일례로 국제포경위원회(IWC)가 1977년 전세계적으로 고래의 포획을 금지하면서 북극지방토착민들에게도 1년에 12마리 이내로 고래포획을 제한한 것은 이들의 생계유지수단을 크게 박탈한 것이다. 언어와 문화적 유산이 비슷한 캐나다 미국 그린랜드의 북극토착민들이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적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지난 1977년 알래스카에서 사상 처음으로 개최했던 제1차 극지방토착민 국제회의(First Inuit Circumpolar Conference)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었다.
증대되는 군사·전략적 가치
최근들어 북극의 중요성이 고조되고 있는 또 다른 큰 이유는 이 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군사·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핵무기관련 과학기술의 발달은 북극해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군사활동이 활발하고 전략상 중요한 지역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북극은 이제 더 이상 동토의 버려진 영토가 아니라 유사시에는 미사일 유도탄이 날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더욱이 북극은 급속히 유전개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의 안보에 모두 중요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북극이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북극 자체가 적대적인 미·소 두 강대국의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미국의 알래스카와 소련의 동부 시베리아는 베링해협을 두고 90km정도 떨어져 있으나 미·소 두 강대국은 기본적으로 북극을 사이에 둔 지리적 인접국이다. 알래스카의 프루도만은 미국 수도 워싱톤에서 무려 5천km이상이나 떨어져 있지만 북극을 사이에 두고 소련의 무르만스크기지로부터는 겨우 2천5백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북극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련의 핵잠수함(SSBN)은 성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그 수도 증가하고 있다. 소련이 북극해에 배치하고 있는 주종 핵잠수함은 타이푼(Typhoon)급 잠수함으로서 얼음밑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것이다. 이들 핵잠수함의 미사일 사정거리는 9천km 이상이므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주요 공업국가들은 모두 소련의 북극함대 사정거리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의 선제공격에 대비하여 북극주변에 많은 수의 미사일 조기경보장치를 설치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북극이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북극해가 북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다는 특정한 사실에서도 연유한다. 콜라반도 무르만스크에 기지를 두고 북극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련의 핵잠수함들은 그린랜드 아이슬랜드 영국북부로 이어지는 공해대(公海帶)―즉 덴마크해협 및 노르웨이해―를 이용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방어의 최일선이 될 수 있는 북대서양에 언제든지 진출, 서방세계를 위협할 수 있다.
영유권 분쟁
미개척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국가간의 영유권분쟁이 일기 마련이다. 북극과 인접한 국가는 미국 소련 캐나다 노르웨이 그리고 덴마트(그린랜드) 등 5개국인데 육지경계에 대해서는 분쟁이 없으나 인접해양에 대해서는 관할권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북극해에 대한 연안국의 관할권범위에 대해서는 인접 5개국간의 합의가 없어 이들 연안국들이 행사할 수 있는 관할권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냐 하는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고 스피츠버겐(스발바르드)군도 대륙붕자원에 대한 노르웨이의 배타적 권리행사주장과 바렌츠해에서의 노르웨이―소련간의 대륙붕경계도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북극지역의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 바다와 육지의 구별이 어렵다는 사실은 북극과 관련된 국제적인 분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북극해에 대해 처음으로 관할권행사를 표명한 나라는 캐나다이다. 캐나다는 1907년 자국영토의 동쪽끝(서경 60˚지점)과 서쪽끝(서경 141˚지점)에서 북극점을 연결한 뒤 이 부채꼴안에 포함되는 북극해 부분은 캐나다의 관할권아래 두어진다는 이른바 선형이론(扇型理論 : sector theory)을 주장했다. 소련도 이 이론을 따라 1926년 동경 32˚04'35"지점과 서경 168˚49'30"지점에서 북극점을 연결한 뒤 이 선안에 포함되는 지역을 자국의 관할권영역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캐나다와 소련에 의해 제시된 선행이론은 이후 남극에도 적용되어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등 7개국은 이 이론에 따라 현재 남극대륙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선행이론은 국제사회에서 적법하게 인정되지 않고 있으며 연안국관할권의 범위를 정하는 타당한 국제법적인 지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1982년 채택된 제3차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르면 연안국은 해안선으로부터 12해리까지의 영해, 그리고 2백해리까지의 배타적 경제수역권리만을 갖고 있으므로 이 범위를 벗어나는 북극해의 해역은 모두 공해(公海)로 간주된다.
북극해의 관할권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논쟁이 되었던 것은 그린랜드 서부 배핀만(Baffin Bay)해역에서 캐나다 북방도서 사이를 지나 베링해협으로 빠지는 이른바 북서해로(Northwest Passage)에 대한 미국과 캐나다의 서로 다른 견해이다. 미국은 1969년 유조쇄빙선 맨하턴호에 의한 북서항로통과가 성공한 다음 1985년 7월 해안경비대소속 쇄빙선 '폴라 씨'(Polar Sea)호에 의한 제2차 북서항로통과를 시도했다.
캐나다는 이 북서항로가 캐나다의 내해(內海)이므로 외국선박에 의한 항로통과는 허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은 북서항로가 국제항해에 이용되는 해협이므로 공해와 같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폴라 씨'호는 캐나다의 허가없이 북서항로를 통과했지만 이 사건은 캐나다정부로 하여금 북극지방 도서지역의 끝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12해리 영해를 선포하기 위한 직선기선(直線基線 : straight baseline)제도를 도입했다.
한편 캐나다정부는 맨하턴호가 북서항로를 통과한 직후 1970년 북위 60˚ 이북의 캐나다연안 해양오염방지를 위해 '1백해리 북극해역 오염방지법'을 제정, 선포한 바 있다.
북극은 자원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전략 과학 국제법 등 모든 면에서 국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오란영'교수가 '북극시대'의 도래를 예측하고 있고,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1987년 가을 북극문제 논의를 위해 모든 관련국 대표가 참가하는 국제회의의 소집을 제의했던 것은 점증하는 북극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북극점 탐험대 -2월중순 현지적응훈련 떠나
남극의 열기 속에서 북극탐험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는 팀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축간 관계 기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이봉훈(43)대장 이하 이주삼(42)부대장, 이강삼(37) 허영호(35) 최종열(31) 대원 등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 중 허영호 최종열 대원은 세계 최정상인 히말라야 에베레스트(8천8백48m)를 정복한 바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알피니스트들.
이들은 2월15일경 현지 적응훈련을 위해 베이스캠프 예정지인 캐나다 '레절루트'로 떠나 45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90년 북극점 본격 도전에 나설 예정이다. 원래 예정은 올1월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2월1일 바로 북극점에 도전할 생각이었으나, 완벽한 성공을 위해 현지 적응훈련 기간을 설정한 것. 이런 이유 때문에 이 팀의 정식 명칭이 '대한민국 북극점 탐험대 1989'였다.
산을 타는 사람들이 극지를 선택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이봉훈대장은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하고 이를 진취적으로 정복한다는 탐험정신에 있어 산이나 극지는 다를 것이 없다. 특히 북극이 자원과 군사·전략적 요충지로 각광받고 있는 시점에서 아직 우리는 한번도 탐험을 시도한 바 없어 북극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 북극점탐험대는 현재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극탐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남극탐사가 남극의 자연조건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탐사라 한다면 북극점 탐험은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여 개척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탐험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인류의 지구개발 역사가 몇몇 모험정신이 충만한 진취적 탐험가에 의존한 바가 큼을 생각할 때, 븍극점탐험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이들이 처음 북극탐험을 생각한 것은 86년초 이봉훈대장과 허영호대원이 히말라야 다우제봉(6천8백54m)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였다. 일본팀과 함께 등반했으나 일본팀 대원이 1명 사망하고 하산해버려 고군분투 끝에 한국팀만으로 등정에 성공한 후 좀 더 새로운 탐험을 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것.
이후 이들은 북극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북극점탐험에 성공했던 팀들의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하는 등 본격 준비에 들어갔다. 허영호 대원은 장비구입과 현지 조사차 캐나다와 일본에 자주 들렸고 이봉훈대장과 연대 농업개발원 교수인 이주삼부대장은 북극탐험에 성공한 일본대학팀을 직접 만나 경험담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치밀한 준비끝에 이들이 선택한 탐험로는 레절루트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워드헌트를 거쳐 북극적에 도달하는 7백80km 구간. 워드헌트에서 북극점에 도착하는 기간은 45일 정도로 잡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영하 50℃ 이상의 혹한과 세찬 바람. 이밖에도 언제 있을지 모르는 북극곰의 습격와 얼음이 갈라지는 크레바스현상 등도 복병이라면 복병이다. 실제로 북극곰이 나타나 장비를 부수거나 가져가 탐험을 중도에 포기한 경우도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는 것.
잘 알려진대로 북극권은 6개월은 낮만 계속되고 6개월은 밤만 계속되는 지역. 더군다나 얼음판이 계속 떠돌면서(유빙) 얼음지역이 줄었다 늘었다하는 얼음바다이므로 북극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 때문에 1년 중 탐험이 가능한 기간은 2월말부터 5월초까지 3개월뿐이다.
실제로 이제까지 수십개 팀이 북극탐험을 시도했으나 북극점까지 도달한 팀은 9개국에 17개팀에 불과하다. 1909년 미국 정부의 지원 아래, '피어리'가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이래 영국 이탈리아 소련 노르웨이 핀란드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일본 등에서 북극점탐험에 성공했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1970년대 이후이고 작년에만 3팀이 성공해 앞으로 점점 북극탐험대의 수가 많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북극탐험대원의 프로필을 보면 국전 특선 경력이 있는 동양화가 이강삼씨가 눈에 띈다. 이씨는 산악인도 아니고 또한 모험가도 아니지만 극지의 모습과 이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어 동참했다고 한다. 북극으로 출발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팀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한 체력훈련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5억원 이상 드는 예산 거의 전부를 혼자 부담하다시피 하고 있는 이봉훈대장은 "탐험이란 것이 대부분 개인모험가의 열정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정부에서의 지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의 발자취를 남기는 일은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명예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