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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학자들의 철학적 논쟁으로부터 시작한 진공의 역사, 그후 토리첼리와 파스칼을 만나면서 한층 세련되고 오묘해져 갔다. 진공펌프의 개발과 더불어 기체역학을 낳게 하기도 햇던 진공은 20세기의 상대론적 양자역학과 관련돼 인류가 걸어온 과학사의 한 단면을 꿰뚫고 있다.

우리는 사진이나 필름을 통해 달에서 작업하는 우주비행사들을 보고 많은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커다랗게 부푼 우주복을 입고 산소통을 들러맨 채 성큼성큼 뛰어가는 우주인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무중력(無重力)'이나 '진공' 따위의 개념들을 배우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공기가 없으면 모든 생물을 살 수가 없구나, 진공은 무서운 것이구나'라는 나름대로의 근심도 하게 된다. 차차 진공이란 곧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늘 존재하는 공기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같이 진공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미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인류가 진공에 대해 생각하고 '아무 것도 없음'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역사와 진통을 가지고 있다.

●-16세기까지 지속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처음으로 진공에 대해서 생각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중 원자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레우키푸스(Leucippus)와 그의 제자였던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모든 물질은 불변하고자 더이상 깨어지지 않은 원자(atom)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원자들은 그 원자들 사이의 진공에서 끊임없이 운동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곧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에 의해 논박을 받았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은 곳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진공내에선 방향이나 앞뒤 등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무한의 우주를 상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내세운 유한한 우주구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진공내에서는 물제가 운동을 할때 저항하는 매질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물체는 아주 순식간에 어떤 두점 사이를 이동하게 되는데 이런 일은 경험상으로나(진공자체도 경험적으로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또 논리적으로나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은 굉장한 권위를 가지고 16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진공에 대한 그의 생각도 대체적으로 인정된 채 계속 내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16~17세기 동안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학설은 차차 도전받고 부정되기 시작하였다. 진공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로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물을 끌어 올리는 펌프에 관한 논란이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 펌프의 원리를 '자연은 진공을 험오한다(Nature abhor vacuum)'라는 설로 설명하고 있었다. 즉 피스톤과 함께 물이 올라가면 그 사이에 진공이 생기는데 이 진공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은 계속따라 올라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한정 높이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했는데 실제로 펌프는 수면에서 10m 이상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같은 현상의 원인을 물기둥의 무게에 의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높이를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는 정도'라고 설명하곤 했다.

●-토리첼리와 진공실험

1643년 이탈리아의 토리첼리(Torricelli)라는 과학자가 '토리첼리의 관'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고안하였다. 그 장치는 한쪽이 막힌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우고 수은이 가득 든 큰 그릇에 거꾸로 세워 놓았을 때 수은주가 76cm이하로는 더 떨어
지지 않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토리첼리는 이 현상이 외부에 있는 공기(대기)의 무게로 인해 일어나는 것임을 지적했다. 하지만 정말 수은주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가. 왜 수은주는 일정한 높이에서 머무르는가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많았다.

정통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이 수은주 위에 공기가 있으며 이 공기는 수은주가 내려감에 따라 팽창한다고 말했다. 또 이 팽창한 공기의 수축력에 의해 수은주가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관내 수은이 내려가면서 그릇 안의 수은의 높이가 올라가 외부 공기를 압박하고, 이 압박된 외부 공기가 유리 안쪽으로 대단히 작고 가벼운 입자-그가 에테르(aether) 라고 명명한-를 밀어 넣어 관내 수은주 위를 채우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이들은 수은에서 나온 정령(Spirit)의 기체가 관내 수은주 위를 채우고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왜 수은주가 특정한 높이(76cm)에서 멈추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76cm의 수은주 높이가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는 크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런 논의들의 가능성을 실험을 통해 검증하려고 한 사람이 파스칼(Blais Pascal)이었다. 파스칼은 먼저 모양 크기 높이가 서로 다른 관을 사용하여 토리첼리의 실험을 수행했다. 그 결과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남아 있는 공간의 크기가 아니고 수은주의 높이-즉 외부 공기에 의한 압력-임을 밝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반박하였다. 또 물보다 휘발성이 더 커서 정령의 기체를 더 많이 발생시키리라고 믿어진 포도주가 물보다 더 높은 기둥을 유지함을 보여 주는 실험을했다. 특히 이런 실험을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실시, 큰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파스칼은 두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진공 속의 진공'이란 실험과 '도움(Puy-Dome) 산의 실험'이라는 것이었다. 파스칼은 몸이 매우 허약했기 때문에 자신의 실험 구상을 자신의 자형(姉兄) '페리에'(Perier)에게 부탁햇다. 페리에는 토리첼리의 실험을 지상과 도움산에서 각각 실시한 결과 수은주의 높이가 무려 8cm나 차이가 남을 알게 되었다.

'진공 속의 진공' 실험은 그림과 같이 두개의 관을 사용한다. 두관 모두 수은을 가득 채운 채 밀봉시키고 그릇 속에 담근 후에 밀봉을 풀었을 때 관이 되나 안쪽의 관은 바깥 그릇의 높이과 같아지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이것은 안쪽 관에는 공기가 작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바깥의 진공 속에 또 진공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파스칼은 그 후에도 실험을 계속하여 자연은 진공을 조금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펌프나 토리첼리의 관 같은 공기의 무게 즉 기압으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진공에 관한 실험에 획기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독일의 게리케(Otto von Guericke)가 오랜 시간의 연구 끝에 물펌프를 개량하여 공기 펌프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시 마그덴부르크의 시장이었던 그는 새로 고안된 펌프로 여러 실험을 하였다. 특히 40cm 정도의 반구(半球)를 밀착시키고 공기를 뽑아낸 다음 양쪽으로 4마리의 말을 사용해서야 겨우 떼어낸 실험은 매우 유명한 것이었다.

●-「보일」의 진공실험

게리케의 펌프 발명 소식을 듣고 한층 개량된 진공 펌프를 제조, 본격적으로 진공의 성질에 대해 탐구를 한 사람이 보일(Robet Boyle)이다. 그는 자신의 조수 후크(Hooke)의 도움을 받아 성능이 매우 좋은 펌프를 만들어 그 속에 토리첼리의 관을 넣어 실험하였다. 그는 공기가 빠져 나감에 따라 수은주가 밑으로 내려감을 확인, 수은주의 높이를 유지시킨 것은 외부의 공기임을 명확히 하였다. 또 그는 이 펌프 속에서 소리가 외부로 전달되지 않는 것, 촛불을 넣으면 꺼져 버리는 것, 새나 쥐 등이 죽는 것 등을 통해 진공의 성질을 체계적으로 밝혀내었다. 마침내 진공을 손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보일의 이러한 실험결과가 알려지자 많은 과학자들은 다투어 진공 펌프를 만들어 보일이 행한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하여 점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던 진공이나 물질에 대한 생각이 틀렸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을 통해서도 보일이나 당시의 과학자들이 진공을 정말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진공 속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기에는 빛을 전달한다고 생각되는 어떤 매질 또는 빛의 흐름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또 진공속에서도 자석이 계속 그 성질을 유지하는 것은 자력의 흐름이라는 어떤 물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일은 매우 가벼운 어떤 입자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입자를 실험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뉴턴(Issac Newton)도 공기를 뽑아낸 후에도 공기와 매우 유사하면서도 훨씬 희박하고 미세한 입자 즉 에테르가 존재함을 조장하였다.

그후 일반적으로 진공 속에는 대부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특히 공기는 일체 없고 에테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非)물질적이기 때문에 검출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공에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여도 무방하다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빛이 매질을 통해 전해지는 파동이라는 생각이 정리되면서 진공=무(無)라는 개념은 혼돈에 빠져들었다. 빛의 파동을 전파시키는 매질이 바로 에테르이며 이 에테르는 우주의 전 구간-왜냐하면 빛은 우주를 통해 오므로-에 걸쳐 매우 고르게 분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에테르의 존재와 관련해서 1887년 미국의 물리학자 마이켈슨(Michelson)과 모을리(Morley)는 에테르의 넓은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고, 지구에서 에테르의 흐름에 평행한 빛과 수직인 빛의 간섭현상을 검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 실험은 흡사 냇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배와 직각으로 항해하는 배의 속도 차이를 계산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런데 마이켈슨과 모을리의 실험 결과, 두 빛의 속도 차이가 전혀 관측되지 않았다. 그래서 에테르는 빛을 전달한다는 매질의 지위를 박탈 당하고 말핬다. 또한 2천년 이상 숨겨있던 진공은 에테르의 베일을 벗고 스스로 그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빛은 더이상 에테르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또 자연에는 순수한 진공을 거부할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 실험의 결과 빛은 관측자의 속도와 무관하게 일정한 속도로 전파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엿다.


파스칼의 '진공 속의 진공'실험


●-전자(電子)의 바다

진공에 대한 얘기를 끝내기 전에 현대 물리학이 이해하고 있는 진공의 개념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자.

1930년대 케임브리지대의 이론 물리학자 '디랙'(P. A. M. Dirac)은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귀결로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디렉에 의하면 우리가 '진공'이라고 부르고 있는 공간은 사실 텅 빈 것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에너지를 가진 전자로 꽉 차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자의 바다'라고 부르는데 이 전자의 바다에 빛(γ선) 을 쪼이면 어떤 전자가 에너지를 흡수해 플러스(+) 에너지 상태의 전자가 되어 우리가 관측할 수 있게 되고, 전자가 빠져나은 '구멍'은 상대적으로 주위보다 양전기를 띄어 양의 전자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전자의 바다'에 대한 디랙의 가설은 양자역학의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기묘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디랙의 가설은 1932년 우주선(cosmic ray)으로부터 양의 전자가 검출됨으로써 뒷받침되었고, 양의 전기를 띤 전자를 우리의 양전자(positron)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디랙은 이 상대론적 양자론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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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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