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십이지(十二支) 시계
천지관 뒤란으로 녹음이 푸르더니, 어느새 단풍이 붉게 물들었다.
“닥닥닥! 퉁퉁퉁!”
뒤란의 색은 나날이 변해갔지만, 천지관을 울리는 망치 소리는 한결같았다. 이러는 사이 쌀가루 같은 눈이 천지관을 덮었다가 눈 구경을 해볼 새도 없이 봄이 다시 찾아왔다. 그 사이 지오는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글자 대부분을 깨쳤다.
아기 손가락 같은 새싹이 천지관 뒤란으로 볼쏙볼쏙 고개를 내밀 무렵, 연월기의 몸통도 모습을 드러냈다. 연월기의 몸통은 연월치인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좁았다. 하지만 높이는 장도사 키의 세 배가 족히 넘어 보였다. 비록 몸통뿐이었지만, 어디라도 날아오를 듯 날렵해 보였다. 설계도로만 만나던 연월기를 실제로 보자, 지오는 눈앞에 두고도 믿기지 않았다.
“우와! 정말 대단해! 이제 뚜껑하고 쇠침만 만들면 되겠네.”
지오는 신이 나서 연월기 주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곧 누나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황산사와 천복, 장도사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 영의정 정대섭파의 음모 속에서도 굳건하게 연월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황산사 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심상치 않은 눈치에 지오는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황산사를 보았다.
‘지난번처럼 또 누가 음모를 꾸몄나? 또 쇳물에 불순물이 들어가기라도 한 걸까?’
지오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눈앞의 연월기는 휘어지지도 않았고, 부식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설계도에 문제가 생겼지 뭐냐.”
입을 꽉 다물어 버린 황산사를 대신해서 장도사가 한숨을 길게 뱉으며 말했다.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에 문제가 생겼어. 연월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간이야 시계를 이용하면 되죠. 혼천의(천체시계)도 있고, 앙부일구(해시계)도 있잖아요. 옥루 같은 물시계를 만들어도 될 텐데…….”
“우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을 했지. 그런데 이게 다 정확하지가 않아. 해시계는 날씨 따라 바뀌고,물시계도 불안정해. 무엇보다 큰 문제는 지금껏 세상에 나온 시계로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완벽하게 계산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 눈을 깜빡이는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까지도 계산을 할 수 있어야만 연월기의 시간을 완성할 수 있거든.”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까지요? 그걸 어떻게……. 그럼 연월기는 만들 수 없는 건가요?”
지오의 눈망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곧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누나의 모습이 자꾸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오의 마음을 눈치챈 듯 황산사가 지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마라. 장도사와 내가 연구 중이니까, 곧 방법을 찾아 낼 게야.”
말을 끝낸 황산사는 푹 꺾인 어깨를 보이며 천지관을 나가 버렸다. 황산사의 걸음은 쇳덩이라도 매단 듯 무거웠다.
“곧 황산사가 중국으로 떠날 모양이여.”
뜬금없는 천복의 말에 지오는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중국요? 왜요?”
“왜긴? 서양에서 들어온 시계가 중국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러는 것이제. 중국에서도 못 찾으면 서양 땅까지 가볼 작정인가 보던디…….”
지오는 눈앞이 까매지는 걸 느꼈다. 서양 땅을 다녀오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정밀한 시계를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황산사가 언제쯤 시계를 구해 올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할 일을 해야지.”
장도사는 기운을 돋우려는 듯 커다란 붓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연월기의 몸통에 옷을 입히는 날이다. 특수처리가 끝난 연월기의 몸통과 겉면, 그리고 안면에 십이지를 그려 넣을 계획이다. 이 일은 장도사의 몫이다.
“아저씨, 왜 하필 연월기에 십이지를 그려 넣기로 했나요? 더 멋진 그림도 많잖아요. 해도 있고, 달도 있고, 꽃이나 나무도 좋고.”
안료를 나르며 종알거리는 지오의 모습에 장도사는 빙그레 웃었다.
“여기에 그릴 열두 짐승은 그냥 짐승이 아니고, 시간신과 방위신이란다. 시간과 방향의 수호신인 셈이지. 시간을 넘어 미래나 과거의 방향으로 날아가야 하는 연월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겠어. 안 그러냐?”
장도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연월기엔 자(子,쥐)축(丑,소)인(寅,범)묘(卯,토끼)진(辰,용)사(巳,뱀)오(午,말)미(未,양)신(申,원숭이)유(酉,닭)술(戌,닭)해(亥,돼지)의 십이지 그림과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의 십간 글자가 박힐 것이라고 했다. 십이지와 십간이 돌아가며 만드는 것이 연호이니, 시간을 넘나들어야 하는 연월기에 이보다 안성맞춤의 그림은 없었다.
장도사는 열두 동물을 흰색, 푸른색, 붉은색, 검정색, 노란색 다섯 가지로 표현했다.
“나뭇잎 같은 초록색도 좋고, 보라색도 좋은데…….”
자기가 좋아하는 색 염료를 들고 입을 삐죽거리는 지오를 향해 장도사는 두 눈을 하얗게 홉떴다.
“이 녀석! 지금 내가 아무 색이나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 모두 세상 이치에 맞추어서 색을 칠하고 있는 거야.”
“세상 이치요?”
“네 한 쪽 손가락이 몇 개냐?”
“다섯 개지요.”
“그럼 네 한 쪽 발가락은 또 몇 개냐?”
“그것도 다섯이지요. 근데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다섯은 하늘의 수지. 천문 기구로 연구를 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외에도 행성이 다섯 개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 이렇게 다섯이란다. 세상은 물과 불과 나무, 그리고 쇠와 흙 다섯으로 이루어진 셈이지. 그래서 다섯(5)은 하늘의 수이며 신성한 수란다.”
“그게 색과 무슨 상관이라고?”
“푸른색은 나무의 색이지. 붉은색은 불, 노란색은 흙, 그리고 흰색은 쇠, 검은색은 물의 색이란다. 이 다섯을 오방색이라고 하지.”
“아하! 그러니까 연월기에 온 세상을 담고 있다고 말하려는 거죠?”
지오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이제야 알아차렸구나. 오방색은 말이다, 방위를 나타내는 색이기도 해. 푸른색은 동쪽, 붉은색은 남쪽, 흰색은 서쪽, 검은색은 북쪽을, 그리고 노란색은 중앙을 가리키지.”
장도사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지오는 세상이 연월기라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아유! 복잡해! 머리가 빙빙 돌겠네. 그림 하나가 복잡한 셈보다 더 어려워.”
지오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채를 흔들어 대자, 천복과 장도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셈이라면 번개보다 빠른 녀석이 별 것 아닌 걸 갖고 엄살을 떠내 그려. 머릿속이 뱅뱅 돌아가는 것 같으냐?”
천복이 손가락을 뱅글뱅글 돌리며 놀렸다. 그때였다. 지오의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저씨, 바로 그거예요! 뱅글뱅글 돌아가는 십이지 시계!”
지오는 벼락처럼 소리쳤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네. 십이지 시계라니, 그게 뭔 소리여?”
“잘 들어 보세요. 연월기의 밑판에 길게 금을 그어 두는 거예요. 시간 침 같은 거죠. 그런 뒤 연월기의 몸통을 돌아가게 하는 거지요. 뱅글뱅글!”
“뱅글뱅글? 그렇다면 십이지 그림이 돌아가게 되겠군.”
장도사는 지오의 생각을 눈치챈 듯 솔깃한 표정으로 지오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런 다음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루 동안 일정한 속도로 연월기 몸통을 돌리는 게 중요해요. 만약 연월기가 하루 동안 한 번만 돌아간다면 십이지 그림이 한 번 돌아가는 거니까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나눌 수 있겠죠.”
“연월기가 하루 동안 두 번 돌아간다면?”
“그땐 하루를 스물네 시간으로 나눌 수 있고요. 더 빨리 돌릴 수만 있다면 하루를 서른여섯 시간, 아니 아흔여섯, 이보다 더 작은 시간으로도 쪼갤 수 있잖아요. 어쩜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까지도 가능할지 몰라요.”
“음……, 결국 연월기 자체가 시계가 되는 거로군.”
장도사는 생각에 잠겼다. 지오의 말이 가능할까를 가늠해 보는 듯했다.
“가능한 것이여?”
천복도 긴장한 듯 마른 침을 꼴깍거리며 장도사를 보았다. 곰곰 생각에 잠겼던 장도사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지오를 와락 껴안으며 소리쳤다.
“지오, 이 녀석! 네가 연월기의 해답을 찾았구나. 당장 황산사에게 알려야겠어.”
장도사는 이내 황산사를 찾아 천지관을 달려 나갔다.
“연월기의 몸통을 돌아가게 할 방법은 장도사와 내가 찾아낼 수 있을 게다. 그렇게만 된다면 돌아가는 몸통의 힘으로 연월기가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야. 지오야, 네가 큰일을 해냈어.”
장도사의 이야기를 듣고 달려온 황산사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가장 기쁜 건 지오 자신이었다.
‘이제 나도 연월치인으로서 제 몫을 한 건가?’
지오는 어쩐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뒤란의 새싹들이 빨갛게 꽃을 피우고, 나무들이 열매를 조롱조롱 매달 무렵, 장도사와 황산사는 십이지 시계를 완성했다.
“서두르세. 이제 뚜껑과 쇠침만 꽂으면 완성이야.”
거북의 등껍질 모양을 본 딴 뚜껑마저 제법 모양을 갖추어 가면서, 천지관이 기대와 흥분으로 술렁거릴 때였다.
“혹시, 소문 들었니? 궁궐 안에 나도는 흉흉한 소문 말이야.”
혜명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공주가 천지관 문을 열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