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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서 이과가 일해봤습니다] 무선 샤워기를 만들어봤습니다

“문과만 일하고 이과는 노력하지 않는다는 증거.”


평화로운 주말 오후, 침대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인터넷을 하다가 발견한 제목입니다. 난데없이 저격당했네요(이과 출신). 움찔하며 글을 클릭했습니다. 자세도 조금 고쳐앉았죠. 이과 전체를 겨냥한 ‘광역 어그로’에 어김없이 걸려든 순간입니다. 


순간이동, 충전식 휴지 등 터무니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를 들고 와서 “아이디어가 있는데 만들지 않는 건 이과가 게으른 탓이다!”라며 몰아가는 인터넷 밈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물론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현대인의 미덕입니다. 하지만 우스갯소리도 검증해봐야 하는 건 이과의 본능이죠. 그러니 이과가 한번 ‘노력’해보겠습니다.


게시물에 등장한 건 무선식 샤워기 헤드를 그린 상상도입니다. ‘혁신적 아이디어’ ‘쉬운 설치’ ‘무료 스마트 홈 애플리케이션(앱)으로 향 및 샴푸 추가 가능’ ‘언제 어디서나 샤워하세요’ 등의 광고 문구가 쓰여있군요. 요약하자면 무선 통신 기술을 이용해 수도꼭지에서 샤워기에 물을 보내겠다는 이야기네요. 우선 전문가에게 실현 가능성을 문의했습니다.


1해봤습니다: ‘물 와이파이’ 가능?


“무선 전달은 파동일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물은 파동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해요.”
이영민 KAIST 화학과 교수는 “물의 무선 전달이 목적이라면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무선 통신 기술은 전자기파를 이용합니다. 전자기파는 파동의 일종입니다. 파동은 어떤 한 곳의 에너지가 진동을 통해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 현상이죠. 종합하면 무선 통신은 물체를 옮기는 게 아니라 송신기에서 만든 에너지를 파동의 형태로 옮기는 기술입니다. 그러니까 물 분자를 와이파이처럼 전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네, 그래서 이과가 일해봤습니다’ 코너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


코너가 시작하자마자 끝날 뻔했지만, 사실 예상한 어려움입니다. 플랜B가 필요합니다. 이 교수는 “물은 출발지점부터 도착지점까지 연속적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다”며 “한쪽에서 뿜어주고 다른 쪽에서 그걸 다시 끌어가는 식으로 전달할 순 있지만, 샤워 시설처럼 거대한 장치에서 옆으로 튀는 물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서 힌트를 얻어 계획을 변경해 봤습니다. 무선  전달을 할 수는 없지만, 대신 호스를 없애고 외부의 힘을 이용해 물을 출발지점부터 도착지점까지 고스란히 끌고 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이 옆으로 튀는 문제는 일단 무시하기로 합니다.)

 

2해했습니다: 전달 못하면 끌고 간다


김진영 서울대 화학교육과 교수는 “우선 물을 공중에 띄우고, 물의 흐름을 특정 방향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며 “욕실 전체에 강한 자기장을 걸어준다면 물을 공중에 띄울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원자는 외부 자기장에 반응해, 자기장 반대 방향으로 자체적인 자기력을 유도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를 이용하면 이론상으로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적절한 자기장 아래에서 띄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개구리나 물방울 등 다양한 물체를 띄워본 실험 영상도 있죠(QR코드 링크 참조).


자 그러면, 일단 수도꼭지에서 나온 물이 욕실 위에 둥둥 떠 있도록 만드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다음은 물의 흐름을 제어하는 겁니다. 김 교수는 “예를 들어 물의 극성을 이용해 전기장으로 물의 이동을 조절하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은 극성 분자입니다. 분자 안에 전자의 분포가 불균형할 경우, 분자 내에 양전하를 띠는 부분과 음전하를 띠는 부분이 구분되는데 이를 극성 분자라 부르죠. 외부 전기장에 반응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풍선에 머리카락을 마구 비벼 정전기를 일으킨 다음, 흐르는 물줄기에 풍선을 가져다 대면 물줄기가 풍선 방향으로 휩니다. 물 분자가 풍선 속 전하에 이끌린 겁니다. 샤워기 헤드가 강한 전하를 띠게 만든다면? 욕실 위에 둥둥 떠 있던 물방울이 샤워기 헤드로 날아가겠죠. 


김 교수는 실제로 이런 성질을 이용해 판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술도 이미 개발됐다고 소개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의 우다얀 우마파티 연구원팀이 지난 2018년 발표한 장치입니다(QR코드 링크 참조). 컴퓨터로 판자가 특정 패턴으로 전하를 띠도록 조절해가면서 물방울이 전하에 이끌려 움직이도록 한 겁니다. 거봐요, 이과 노력하고 있다니까요! 

글 : 김소연 기자
디자인 : 이한철

과학동아 2022년 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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