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 박화영의 죽음을 아는가. 박화영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조선인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1941년 3월 고등학생 때부터 참여했던 연구회가 일제 검찰에게 발각돼 조사를 받던 중 4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그의 사망 소식에 일제히 침묵했고, 해방 이후에도 알려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타까운 우리 과학사의 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최고의 대학은 단연 도쿄제국대학이었다. 진학이 극히 어려워 이곳을 나온 이공계 전공 조선인은 겨우 24명이었다. 35년 식민지 치하에서 도쿄제국대학 이학부와 공학부를 나온 사람이 연간 1명도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나 조선인에게는 대학 진학보다 더 큰 난관이 있었다. 바로 졸업 후의 진로였다. 특히 대학 교수나 연구소 연구원은 기회조차 거의 오지 않았다. 그나마 이화학연구소 연구원이 된 김양하(화학과)와 박화영(전기공학과),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교수가 된 김종원(지질학과) 정도가 있었다.
3·1운동으로 과학 주목, 대학 설립돼
우리나라의 근현대 과학사는 대체로 1876년 개항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분기점이 한 번 더 있다. 바로 1919년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인들이 과학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다. 이에 따라 이공계 분야 진출도 활발히 일어났다. 비록 3·1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과학 분야에 미친 영향은 의외로 매우 컸다.
우선 과학은 우리 민족이 갖춰야 할 실력 양성의 핵심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과학 대중강연을 비롯해 과학기사의 보도, 과학출판물의 발간, 그리고 과학전시회 개최 등 다양한 과학 활동이 펼쳐졌다.
특히 1922년에는 비행사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성대하게 열렸다. 1934년부터는 과학지식보급회 주도로 대중을 위한 과학행사가 곳곳에서 개최됐다. 이때 한결같이 내세운 표어는 3·1운동 직후부터 대두된 ‘과학조선의 건설’이었다. 이를 지향한 대중 과학잡지 ‘과학조선(科學朝鮮)’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발간됐다.
3·1운동의 여파로 차별적인 학제도 크게 개선됐다. 당시 일본과 조선은 교육 제도가 서로 다르고 수업 연한의 차이도 커서, 조선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었다. 게다가 조선에는 학교가 없어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일본을 비롯한 해외로 유학해야 했는데, 이마저 차별로 인해 극히 어려웠다. 결국 1922년 일본과 조선의 학제를 통일한다는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된 이후에야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가 열리게 됐다. 실제로 일본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한 조선인이 꾸준히 등장하게 된 것은 제2차 조선교육령 발효 이후였다.
3·1운동은 조선에 제국대학이 세워지는 데 이바지했다. 조선인들의 높아진 교육열을 수용하기 위해 1920년부터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이 운동이 뜻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는 주된 계기가 됐다.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로 구성됐으며 일본의 주도로 운영됐다. 모든 교수진은 일본인으로 이뤄졌고, 학생 또한 3분의 2가량이 일본인이었다. 그래도 장기간 운영되다 보니, 의학 전공의 경우 조선인 졸업생들이 다수 배출됐다.
당시 조선에서 이공계 고등교육을 시행하는 곳은 주로 전문학교였다. 총독부 관립학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와 숭실전문학교 이학과정, 그리고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인 대동공업전문학교 광산과가 있었다. 대동공업전문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해 폐교된 숭실전문학교를 이어 광업가 이종만이 세운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들 중 사립 전문학교들은 비록 열악한 조건에서 운영되긴 했지만, 많은 조선인 졸업생을 배출해 이공계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자연과학 전공자와 광산기술 전공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한편 의약 분야의 경우 이공계와는 달리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관립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사립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필두로 무려 7개의 전문학교가 운영됐다.
과학 배우러 일본, 미국으로 떠나
일제강점기에 이공계 대학을 마친 조선인은 약 400명(여성 2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일본 유학생은 230명(만주 포함), 미국 유학생은 105명, 경성제국대학 출신은 37명이었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미국이었으며, 조선에서 배출된 인력은 가장 적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 과학계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공계 전문학교를 졸업한 과학 인력은 국내외를 통틀어 이보다 많은 약 1900명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조선인이 진학할 이공계 대학이 마땅치 않았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전시체제로 접어든 1941년에서야 뒤늦게 세워졌고 이마저 일본인 위주였다. 따라서 과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학생들은 유학을 떠나야만 했다. 그중 일본 유학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언어적·문화적 장벽이 낮으며, 졸업 후 대우가 좋아 조선인들이 가장 선호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조선인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이공계 대학에 입학하는 조선인은 매우 적었다. 대학 졸업자 중 이공계 전공은 5%에 불과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공계 전공이 조선인들이 많이 진학하는 사립대학이 아니라 입학하기 어려운 제국대학에 주로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제국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를 거쳐야만 했다. 물론 지역에 있는 몇몇 제국대학은 일부 전문학교 출신도 받아들여 진학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롭긴 했지만, 제국대학은 여전히 소수의 조선인만 들어갈 수 있는 극히 좁은 문이었다.
미국 유학도 상대적으로 적지는 않았다. 미국 유학은 지리, 언어, 경제, 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어려움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선택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계 학교 출신으로 선교사들의 주선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서구에서 주도하던 근대과학은 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신식 학문 중 하나였다. 특히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와 미시간대는 과학을 공부하려는 조선인들이 많이 진학한 대표적인 대학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조선 땅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릴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공계 박사학위 보유자는 10명 정도였다. 일본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이 절반씩 차지했다. 최초의 이학박사는 미국 미시간대에서 천문학을 전공한 이원철, 최초의 공학박사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한 최황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업에 매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조선인을 채용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의·약학 분야는 조선인 박사가 무려 340명에 이르렀다. 의원을 개업할 때 박사학위가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비타민E 연구한 김양하, 식물학 연구한 최초 여성 과학자
많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과학자 중에도 두드러진 연구 성과를 낸 경우가 일부 있었다. 조선인 대부분은 초등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없었지만, 극히 소수의 사람은 높은 수준의 과학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일찍이 해외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고, 드물게는 최고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활동했다. 말하자면, 과학 중심부로 진출한 사례가 적지만 있었다는 것이다.
‘경도(교토) 3인방’으로 불린 이태규(화학), 이승기(화학공학), 박철재(물리학)는 모두 교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 자리를 잡은 조선의 자랑이었다. 이화학연구소에서 비타민E에 관한 선구적 연구로 명성을 얻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김양하는 노벨 과학상 후보로 추천해야 한다고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였다.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에서 종의 합성이론을 제시하며 일본 최고의 유전학자 반열에 올랐다.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김삼순(식물학)은 온갖 역경을 뚫고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최초의 여성 과학자가 됐다.
미국 미시간대에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원철은 독수리자리의 에타별이 팽창과 수축을 되풀이하며 밝기가 변하는 맥동 변광성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이 때문에 언론에서는 에타별을 그의 이름을 딴 ‘원철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박달조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듀폰연구소에서 프레온가스 개발에 참여해 공동개발자로 명성을 얻었다. 최초의 엔지니어로 부를만한 오하이오주립대 출신의 이병두(세라믹공학)는 인공 치아 연구로 여러 특허를 취득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잊혀진 일제강점기 과학역사 발굴해야
당시 조선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과학을 진흥시키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났다. 일제에 의존해서는 도저히 조선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조선인들로 구성된 과학계가 직접 나서서 스스로 발전을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움직임은 크게 과학의 교육, 연구, 계몽 활동으로 나뉜다.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는 조선인 교수와 학생들의 주도로 연희수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잡지 ‘과학’을 발간했다. 이준열을 비롯한 경성고등공업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은 과학 보급단체인 공우구락부(工友俱樂部)를 만들어 대중강연을 진행했고, ‘공우(工友)’라는 계몽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중등 교원을 포함한 조선인 생물학 연구자들은 조선박물연구회를 만들어 생물의 우리말 이름을 정리하고 그 성과를 향명집과 박물전람회로 발표했다. 조선인 의사들로 이뤄진 조선의사협회는 학술잡지 ‘조선의보(朝鮮醫報)’를 장기간 발행했다. 나아가 김용관을 필두로 한 조선인 과학자들은 과학지식보급회를 조직해 대중잡지 ‘과학조선’을 발간하고 전국적인 과학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조선인들의 과학 활동에 대해 잘 모른다. 일제의 과학에 압도당한 나머지 우리의 과학이 크게 가려진 면이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이들 중 해방 직후 북으로 간 사람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식민지 시절의 억압과 남북 분단이 초래한 상처는 여전히 우리 과학사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대한민국의 과학은 그 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과학조선을 꿈꿨던 그때와 맞닿아 있다. 해방 이후 해외에서 어렵게 과학을 익힌 사람들이 한국 과학계의 주류로 올라섰고, 이후 태동한 새로운 과학세대는 그들의 후학이다. 과학자들이 조직한 단체는 더 확대되고 다양해졌으며, 그들의 과학 활동은 교육과 계몽을 넘어 연구로까지 확장돼 현재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이들이 주창한 과학조선의 정신은 해방 이후 과학입국(科學立國), 기술 드라이브 정책, 과학기술중심사회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어찌 보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목숨까지 바쳤던 박화영을 비롯한 과학계 선현들이 그토록 갈망한 과학조선의 완결판이다.
김근배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과학사 및과학철학협동과정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근현대과학사와 남북 과학기술 비교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근대 과학기술인력의 출현’ ‘황우석 신화와 대한민국 과학’ ‘한국 과학기술혁명의 구조’ 등이 있다. rootkgb@jb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