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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저와 대화해 볼래요?

허재원의 영장류 이야기 ➊ 의사소통




인간은 오랫동안 다른 동물과 대화하는 꿈을 꿔 왔다.
동물행동학자들은 인간과 유전자가 비슷하고 지능이 높은 대형 유인원과 가장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헌신적인 노력을 쏟아 부은 그들은, 과연 침팬지와 대화하는 데 성공했을까?



1930년대 초 영화관에 처음 등장해 전세계인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동물이 있다. 바로 타잔이 데리고 다니던 침팬지 ‘치타’다. 치타는 비록 인간의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눈빛이나 행동만으로 타잔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강아지도 이렇게 말을 잘 알아듣고 또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하는 답답함을 한번쯤은 느끼게 되니 말이다.


세계 최초로 인간과 의사소통한 침팬지, 라나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동물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특히 지능이 높고 해부학적인 구조와 유전자가 인간과 비슷한 침팬지나 고릴라를 대상으로 가장 먼저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인간의 말을 직접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고, 1970년대 과학자들은 ‘대형 유인원은 현재의 인간과 같은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후 과학자들은 그림문자를 가르치는 쪽으로 연구 방향을 틀었다. 인류가 가장 먼저 사용한 문자가 그
림을 활용한 상형문자였기 때문이다. 상형문자는 문자가 뜻하는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특별한 규칙을 외우지 않아도 쉽게 익힐 수 있다.

과학자들은 침팬지와 대화하기 위해 특별한 그림문자를 고안했다. 이를 ‘렉시그램(Lexigram)’이라고 부른다. 미국 에모리대 여키스국립영장류연구센터 듀에인 던보 박사는 120여 개의 렉시그램을 이용해 ‘라
나’라는 암컷 침팬지를 훈련시켰다. 이 침팬지의 이름을 따 ‘라나 프로젝트’라고 불린 이 연구는, 라나가 2살 반이었던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라나는 렉시그램을 순차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으로 연구자들과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로 인간과 침팬지와의 대화가 성사된,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

미국 조지아주립대 연구팀은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보노보 침팬지에게 렉시그램을 가르쳤다. 훈련 받은 보노보 침팬지들 중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칸지’의 이름을 따 이 연구를 ‘칸지 프로젝트’라고 부른다.

사실 칸지는 처음부터 언어를 훈련하기 위해 선택된 개체는 아니었다. 그의 양모인 ‘마타타’라는 암컷
보노보 침팬지가 선발돼 훈련을 받고 있었고, 당시 칸지는 9개월짜리 수컷 새끼였다. 아쉽게도 마타타는 수업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 연구원들은 수업에 늘 동행했던 칸지가 렉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타타의 어깨 너머로 언어를 독학했던 것이다. 칸지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연구진은 본격적으로 칸지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렉시그램 사용법을 습득한 칸지는 얼마 안 가 마타타를 능가하는 언어 능력을 갖게 됐다.

칸지는 이를 이용해 새로운 기술도 배웠다. 고고학자인 니컬러스 토스에게 배운 대로 돌을 깨서 원하는 형태의 뾰족한 돌을 만들어 보였다. 칸지는 우리의 옛 조상들이 돌을 깨서 뗀 석기를 만드는 기술을 렉시그램 언어를 통해 습득했다는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하루를 숲 속과 실험실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칸지는, 아침에 숲으로 나가기 전에 연구진에게 자신이 언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 실험실로 돌아와 컴퓨터 실험을 진행할 것인지 얘기할 정도로 수준 높은 대화를 했다. 고릴라 수화로 유명한 ‘코코’의 수화 비디오를 통해 몇 가지 수화를 익혀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과 대화하기도 했다. 언어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 놀라운 보노보 침팬지였다.



수화하는 고릴라, 야생 고릴라 보전에 힘쓰다

일반인들에게는 고릴라 ‘코코’의 일화가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초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페니 패터슨 박사는 고릴라와 대화를 시도했다.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바로 암컷 고릴라 코코였다. 패터슨 박사는 고릴라 성대와 구강의 해부학적 구조를 고려했을 때 인간이 쓰는 음성 언어를 가르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국의 수화(나라별로 수화에도 약간 차이가 있다)를 기본으로 했지만, 고릴라의 손 구조를 고려해 약간 변형했다. 패터슨 박사는 코코 앞에서 항상 수화를 사용하면서 같은 뜻의 영어 단어를 들려주는 방법으로 훈련했다.

실험 초기엔 코코는 아주 쉬운 단어를 익히는 것도 힘들어 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말문이 한번 트이면 무서운 속도로 다양한 말을 쉽게 배우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코코가 수화를 배워가는 속도는 급격히 빨라졌다. 영어로 하는 말도 이해하는 듯했다.


훈련이 끝난 뒤 코코는 1000개 이상의 단어를 수화로 표현하고, 2000개 이상의 영어 단어를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단어들을 조합해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도 표현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평소 아끼던 고양이가 교통사고로 죽자 이 상황을 수화로 설명하고 ‘나쁘다’, ‘슬프다’ 등 감정을 표현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코코가 ‘마이클’이라는 수컷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마이클도 수화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수화로 할 줄 아는 표현의 수는 코코보다 적었다).

코코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고릴라다. 2016년 현재도 건강하게 살고 있고, 지금까지 수만 명과 인터넷 화상채팅을 이용해 수화로 대화를 했다. 이 중에는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포함돼 있다. 연구자들은 코코의 이름을 딴 ‘코코 재단’을 세우고 야생 고릴라 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코코 역시 자신이 가진 놀라운 재능을 이용해 이 일을 돕고 있다.


타잔과 그의 침팬지가 나누는 우정처럼

침팬지와 고릴라의 언어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이들은 성대의 해부학적 구조가 인간과 달라 음성 언어를 배울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어린 시기에 렉시그램이나 수화 같은 언어 보조 수단을 가르치면 수천 단어 정도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 배운 언어를 이용해 자신이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기도 하고, 언어능력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줄도 안다. 자신이 습득한 언어를 동료에게 가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심지어 음악을 듣고는 그림을 그려 제목을 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이 같은 의사소통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연구의 주체가 진심으로 침팬지와 고릴라를 사랑하고, 헌신적인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덕분이다. 마치 타잔과 그의 챔팬지 치타가 끈끈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는 것처럼.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속마음이 궁금하다면, 현실판 치타를 만들어낸 과학자들처럼 보다 긴 시간을 들여 반려동물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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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허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에디터

    우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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