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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안의 진술 (1)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악취에 코를 막아야 했다. 아이들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한 명은 반쯤 죽어 있었는데 죽음에 대한 이해조차도 없었다. 한 명은 자해로 엉망이었는데,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자극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짐승이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나 내가 아는 바 짐승도 그와 같은 상태에 놓이지 않는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곳’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 이 일을 알아야 했고 누군가는 무엇이든 했어야 했다. 어떻게 이곳에 버려지거나 학대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어머니께 감별사 자격증을 갖다 드렸을 때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 어머니께서는 “이제 더 어리석어졌구나.”라고 하셨지. 내가 아는 만큼 모르게 된다고 하셨어. 어렸을 때엔 그런 말들이 무슨 대단한 철학에서 오는 줄 알았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저 열등감의 발로가 아니었나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어머니는 뭐랄까…… 글을 익히지 못하셨지. 언어 능력에 문제가 있는 분이었어.

브로카 실어증이라던가, 일생 간단한 문법 말고는 이해하지 못하셨네. 그 대신 눈치가 빨라서 어찌어찌 알아듣곤 하셨지.
언젠가 어머니께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네. 그때도 그러시더군.
“그렇지 않아. 얘야,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거지.”
내가 하는 모든 말의 주어를 ‘나’로 치환해보라고 하셨지. 문법도 잘 모르는 분이 묘한 통찰은 있으셨어. 그럴지도 모르지. 결국 사람 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머릿속뿐이니까.

나는 지금까지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없이 살았네.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그건 내가 마음을 나누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나로서는 구분할 수가 없네. 어떻게 알겠나? 결국 내가 보는 것이 내 머릿속 뿐이라면 말일세.

지금 내 앞에도 증명할 수 없는 자료들이 쌓여 있군. 도무지 이자료들 간의 연관성도 모르겠어. 이게 내 일이지. 자료를 선별하고, 무의미한 자료를 버리고, 사람의 말에서 거짓을 판별해내는 것.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대개 물증도 증인도 없고, 도착한 자료는 하나같이 최소한 수십 년은 된 것이니까.

선원들 간의 흔한 다툼이야. 웬만하면 엄마 불러서 꿀밤 한 대씩 먹인 다음 잠이나 쳐 자라고 했으면 하는 일들일세.




선장의 진술

지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압니다. 구시대의 유물, 늙은이.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떠돌이. 흘러간 시간이란 사라진 나라나 마찬가지죠. 일 끝내고 귀환할 때마다 나라 없는 난민마냥 흘러다니죠. 늘 모든 것이 변해 있고요. 인류학 자료 수집이라지만, 뭐 돌아왔을 때에는 휴짓 조각이 되어 있기 일쑤죠. 믿는 사람도 없고, 다시 돌아가 봤자 세월이 지나 맞는 것도 없다니까요.

아무튼 우리 기수 배에는 ‘심안心眼’을 하나씩 태우는 관습이 있어요. ‘심안’이 뭔지는 아시죠. 모를 수도 있겠군요. 뭐 예전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태우기도 했어요. 고양이를 태우기도 했지요. 그냥 심리적인 문제예요. 마음 같아서는 아로마 향이나 하나 실으면 가볍고 좋겠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 여자는 진짜 골칫거리입니다. 이번에는 식당에서 밥 잘 먹고 있던 제 선원을 쳐서 이빨을 부러뜨렸어요. 난투극이 벌어졌죠. 여자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나중에 그 여자가 뭐라는 줄 아십니까?

“그 친구가 맞을 ‘생각’을 했어.” 제가 어처구니없어서 대꾸했죠.

“누구나 생각할 권리가 있겠죠. 생각하는 걸로는 사람을 처벌할 수 없어요.”

“날 시험했어. 내가 제 생각을 읽는지 못 읽는지 보았지. 내게 마음으로 욕을 퍼부은 다음에 내 반응을 살폈어.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나를 믿지 않게 되었고 이어서는 이 항해 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었어. 그는 앞으로 자네를 따르지 않을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을 다른 동료들에게도 전파할 예정이 었어. 그걸 막기 위해 한 대 패 줬고, 그 친구는 내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겁이 나서 예정을 접었어.”
라는 겁니다. 감별사님이라도 한 대 패고 싶지 않겠어요? 네?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 선장은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고 부르는지 안다고 하는군.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그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선장의 말의 주어를 ‘나’로 치환해서 보면 그 선장은 자신을 구닥다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 걸 보면 이 선장이ㅠ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거고. 이 ‘심안’이라는 사람들은 아마 그 배가 떠났던 시절에 한철 유행한 독심술사였던 모양이야. 당시에는 표준 통역기 같은 것도 없었을 테니, 마음을 읽는 사람을 태우면 정착민과 대화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이상한 일도 아닐세. 정말로 선교사를 태웠던 적도 있으니까.

그 선장에게 그 여자와 한 대씩 더 주고받고 술이나 한잔하라고 했으면 좋겠네. 나는 점점 이런 일에 지쳐가고 있어. 가끔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별일이야 있겠는가. 내겐 가족도 없고, 없어진다 해서 슬퍼할 사람도 없으니 말이네. 자네 말이 맞아. 일에 집중하다 보면 나쁜 생각은 사라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심안의 진술 (2)

우리 같은 사람들은 태내에서부터 네트워크에 접속해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시각과 청각이 자리를 잡기 이전부터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책보다 먼저 그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동료들은 내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내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미 주변을 거닐며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우리를 두고 통제할 수 없는 감각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는 묘사를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지는 감각의 결과가 아니라 뇌의 결과다. 보통의 인간도 초당 조 단위의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그 중 인식하는 것은 천 단위 정도다. 생각이란 일종의 화학작용이다. 그리고 화학작용에서는 화학물질이 발산한다. 개들은 꿀벌과 개미들처럼 후각을 통해 사람의 선의와 악의를 가려낸다. 말하자면, 짐승들은 우리처럼 마음을 ‘맡을’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있지만.

우리는 초능력자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구인의 감각이 생물종이라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저히 저하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좋다. 마음을 읽는 정도가 강할수록 생물의 개체성은 희미해진다. 짐승들이 때로 개별의 의지가 없는 듯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이 현대인보다 훨씬 동물에 가까웠던 무렵에는 인간의 개체성은 훨씬 더 희미했으며, 개인의 희생이나 죽음도 자연스럽고 무던한 것이었다. 사람이 동물의 체취를 맡으며 사냥할 수 있었던 무렵에는 대화는 훨씬 더 간결하고 간단했으며 많은 생각이 대화 없이 공유되었다. 언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동물적 감각의 발달이 사고의 공유를 가져오며, 동물적 감각의 퇴화가 개체의 분리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문명의 발달을 통해 원시적인 능력을 잃었다기보다는, 개인으로서의 개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를 포기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문명을 발달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 자료는 왜 들어와 있는 거지? 아무리 감별이 내 일이라지만, 이 정도는 자네 선에서 처리했어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생각해 보게. 이 여자 말대로 지구에 정말 독심술사 집단이 있다면 지구는 굉장한 위기에 빠져 있는 셈이야. 지구의 모든 정보망에는 구멍이 나 있을 거고 비밀 군사작전도 극비 문서도 다 휴짓조각이 되어 있겠지. 이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개인 정보든 신용카드 암호든 유출할 수 있을 거고, 최첨단의 보안 설비를 갖춘 스위스 은행 금고도 몇 겹의 함정을 파 놓은 암호문도 다 소용이 없어질 거야.

대저 지구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왜 지구에 범죄가 만연하겠나? 이런 사람들은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앞으로 범죄를 일으킬 사람도 미리 찾아내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텐데, 왜 세상에 아직 잡히지 않은 살인범과 돌아오지 않는 실종된 아이들이 있겠나?
 



심안의 진술 (3)

우리 같은 사람은 늘 거짓과 진실의 중간에 놓여 있어야 한다. 내가 거짓말쟁이라면 나는 직업을 잃을 거고 진짜라면 세상이 불안해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적당한 사이비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당신들은 우리가 왜 정보망에 침입하지 않는지, 남의 계좌나 금고를 열지 않는지 묻는다. 하지만 당신들도 원하면 얼마든지 길가는 사람의 돈을 빼앗을 수 있다. 왜 그러지 않는지 내가 물어봐야 할까? 왜 더 좋은 일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왜 당신들은 밤거리를 다니며 범죄자들을 때려잡지 않는가? 부자들은 왜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돈을 쓰지 않는가?

우리도 당신들처럼 사람이다. 선인과 악인의 숫자도 보통 사람들의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조금은 답변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아이가 죽을 작정을 하고 다리를 걷고 있었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아이가 뛰어내릴 자리를 찾던 찰나 마침 지나던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여자는 아이와 가벼운 대화를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사소한 우연이었지만 어쩐지 죽을 마음이 사라진 아이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아이가 절벽에 걸친 줄다리가 헐거운 줄 모르고 놀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나던 사람이 풍선을 놓친다. 풍선에 정신이 팔린 아이는 그 자리를 떠났고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당신들은 세상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수많은 일들을 알겠지만,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이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지 못한다.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연락이 늦은 것을 용서해 주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진술에서 예시로 든 아이가 꼭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다리에서 말을 건 여자도, 빨간 풍선도 기억이 나. 우연이겠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군. 혹시 여자가 제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점 봤던 게 떠오르는군. 점쟁이가 내 과거를 기가 막히게 맞추더라고.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게 그냥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일이더란 말이야. ‘집안에 안 좋은 일 있었어.’ ‘곧 자네 인생에 큰 변화가 올 거야.’ 변화 없는 인생이 어디 있고 안 좋은 일 없는 집안은 또 어디 있겠나. 다 합리적인 설명이 있기 마련이야.

그런데 편지 아래에 이상한 문장이 붙어 있군. 이제야 보았네. 이전에도 본 것 같은데.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인사 같은 걸까, 하와유두잉, 나이스투미츄 같은?




심안의 진술 (4)

에온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는 마음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살았다. 물론그건 내가 마음을 터놓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일생 이해받지 못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살았는데, 그 또한 사야의 생각에 의하면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야는 내가 하는 말의 주어를 ‘나’로 치환하라고 했다. 일생 언어를 접한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다른 면의 통찰이 있는 듯했다.

내가 그녀를 사야라고 불렀지만, 그녀에게는 기실 이름이 없었다. 그 별의 어떤 개체에도 이름이 없었다. 에온이라는 이름 역시 지구에서 지은 것이다.

에온에는 교육이 없다.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안다. 스스로 일어나 걷고 끼니를 찾고 사냥을 한다. 한 개체가 지식을 습득하면 집단 전체가 안다. 아이들도 어른 만큼이나 현명했고 인류 전체의 지식을 알았다.

그들은 만나는 것만으로도 배웠다. 손을 잡거나 냄새를 맡거나 몸을 부비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그녀는 나를 통해 지구를 배웠고 나는 그녀를 통해 에온을 배웠다. 사야는 우리가 아이를 기르는 데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게 망상증이 있다고 의심하기까지 했다.

<;고작 제 몸을 가누는 데에 1년씩 걸리고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데에 수년에서 수십 년까지 걸린다면, 대체 그토록 약한 개체가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지? 아이를 돌보는 데만도 진이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할 거야! 당신 별 생물은 다 그런가?>;

<;그렇지 않아. 거의 인간뿐이야.>;

이어서 그녀는 인간은 지구에서 극히 소수 종으로, 자연 환경이 좋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사는 생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반대이며, 옛날 에온에 정착한 지구인도 그러했다고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믿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에온인 전체가 믿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신은 착각하고 있어.>; 시야의 생각이 전해졌다.

<;그 별의 거대 생물군은 멸종하고 있어. 그 이전 시대의 공룡이라는 생물이 멸망했을 때와 마찬가지야. 당신 손가락 크기 이하의 생물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어. 당신들이 그 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밖에 남지 않은 거야. 당신들이 그 별의 마지막 거대종이야.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리 오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몹시 슬프고도 부끄러운 기분이 되었다.

<;그 별의 새 주인은 벌과 개미들이야. 아마 오래전 당신의 별에서 마지막공룡이 사라졌을 때에도 그들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야. 내가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을 저 허약하고 쪼그만 털북숭이 쥐새끼들에게 무슨 지성이 있으며 종으로서의 위엄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이 공룡보다 영리했듯이 개미들은 당신들보다 영리해. 당신들처럼 마음과 마음을 통하기 위해 당신들처럼 복잡한 기호를 이용하지 않아.>;

그녀는 내 언어를 들여다보다가 기염을 토했다.

<;세상에, 언어가 한 종류도 아니군. 당신이 쓰는 언어는 기껏해야 그 별에서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나라 안에서만 쓰는 언어잖아. 그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수년이 필요하고! 그건 소통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심안의 진술 (5)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내’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질문을 떠올리면 바로 답을 알았다.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마치 내 기억 어딘가에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어, 조금 관심을 기울이면 바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왜 사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인 명상에도 별처럼 답이 쏟아져 내렸다.

이곳 사람들은 한 명도 우주와 같았다. 모두가 네트워크의 단말기이며 서버이며, 통신 매개체였다. 고독도 고통도 없었다. 오해도 질투도 없었다. 천대받는 사람도 차별받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전체였고 세계였다. 때로 나는 내가 이 별 전체라고 생각했고, 그런 착각에 빠진 채로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나는 이것이 어떤 궁극적인 단계로, 인간이 사람의 공감과 사랑을 그토록 바라는 까닭은 바로 이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자네가 나더러 ‘심안’인가 뭔가 하는 존재를 믿기를 원한다는 기분이 드는군. 새로운 종교에라도 빠진 건가?
이 서영희란 여자는 에온이 독심술사들의 행성이라고 주장하는데, 내가 앞에서 읽은 진술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어.

서영희는 그 별에서 유기된 아이들을 찾아내서 데리고 왔지. 항성법에 따라 외계인이라는 딱지 없이 지구 어디선가 자라고 있을 거야. 만약 그 별 사람들이 모두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면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난 거지?
누군가는 알아채지 않았겠나. 그런 세계에서 범죄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하겠나? 절대적인 공감을 하는 사회에서 의도적으로 동료를 유기 할 수 있을까?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서? 헛소리야.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라고.




심안의 진술 (6)

지하실 안은 하나의 유적이었다. 히피의 거리처럼 벽과 천장과 바닥은 색색깔로 그리고 새로 덧칠한 그림으로 가득했다. 큰 그림 안에는 작은 그림이 있었고 빈 공간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림에는 정교한 체계가 있었다. 이집트의 벽화나 마야의 상형문자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방에는 스승이 있었고 제자가 있었다. 이방을 거쳐 간 선배들이 새로 들어온 아이들에게 기호를 가르쳤을 것이다. 누군가 하나의 기호를 만들면 다음 사람이 새로 덧붙였을 것이다. 선대가 남긴 기록을 후대가 배우고 발전시켰다.

아이들은 구원을 바라는 데에 익숙해진 얼굴로, 한편으로 체념에도 익숙해진 얼굴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섬과 같아.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멀고, 그사이에 얼마나 드넓은 강이 펼쳐져 있는가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드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날을 세우고 겹겹이 벽을 쌓아야 하는지도.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별다른 일은 없었네. 나는 특별히 뛰어날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사람이고, 유달리 남과 다른 점도 없고 문제도 없었지.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뭔가 채워지지 않는 기분에 시달리는 걸까? 계속 뭔가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는 기분일세.

내 정신과 의사 말이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그 결핍을 평생 안고 간다고 하더군. 나는 어째서인지 어머니가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원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 기억할 수도 없지만 그랬던 것만 같아. 어쩌면 그래서 나는 이토록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힌 채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오랜만에 은사님과 후원자에게서도 안부 전화가 왔더군. 아무래도 이런 일에는 뭔가 예감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야. 비서가 내게 차한 잔을 갖다 주면서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하고 갔어. 우연이겠지만 묘한 기분이 드는군. 좀 자야겠어. 계속 무의미한 자료에 시간을 낭비했으니…….




심안의 진술 (7)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혼란에 사로잡힌다. 해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인류의 지식 전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뱃속에서부터 배운 사람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햇빛처럼 쏟아지는 지혜의 환희에 젖어들며, 갓난아기의 울음 대신 성인의 눈으로 세상을 맞이하며, 삶과 지성의 찬가를 불렀던 사람들이, 인류의 나아갈 길을 바라보며 더 깊고도 넓은 소통을 명상했던 사람들이.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맨 처음에 읽었던 자료 말이야, 내가 줄을 쳐 두었는데 보았나? 선장은 ‘감별사님’이라고 불렀어. 선장은 자네가 내게 그 자료를 줄걸 어떻게 안 거지?




심안의 진술 (8)

나는 상실감에 빠진 채 앉아 있었다. 문제를 알아차린 사야가 달려왔다. 문제를 알아차린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제를 알아차린 행성 전체가 나를 주목했다.

모두의 마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의 뇌에 작용하는 화학작용이 조금 달랐다. 아이들은 하염없이 조용했다. 아이들의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아이들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 행성에서 오직 나만이 이를 알 수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는 것을.

<;언어를 모르는군.>; 내가 생각했다.

<;언어를 몰라. 언어를 만들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어.>; 사야는 나와 소통하려 했지만 내 거부감이 너무 커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기만 했으면.>; 에온 전체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뭘 가르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군.>;

행성 반대쪽에서 내 찌르는 분노를 느낀 한 현자가 누워 있다가 당황하며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내 말에 완전히 멍청한 상태로 반응했다.

<;가르치는 법을 몰라. 배워본 적이 없으니.>;

-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자다 깨어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뭔가 잘못 읽은 점이 있는 것 같아. 여자는 에온에 정착했어. 그 선장은 다음 항해에 여자를 다시 배에 태웠고. 수십 년이나 지나서, 항해에 도움도 안 될 할머니가 다 된 여자를 말이야. 둘은 싫어하는 사이가 아니야. 선장이 여자와 같은 편인 것 같아. 자네도 마찬가지고, 왜…….




심안의 진술 (9)

유전자는 그저 실험을 한다. 진화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분리를 택했다. 벌과 개미는 공유를 택했다. 하지만 진화는 어떤 방향에도 우열이 없는 줄을 안다. 늘 대비를 한다. 인류의 유전자는 분리를 택한 뒤에도 다시 실험을 해 우리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도 유전자는 다시 실험을 해 너희들을 만들었다.

유전자는 배움을 기록한다. 우리는 기호를 만들고 몸짓을 만들었다. 언어가 생겨나자 아이들은 말을 익히는 본능을 갖게 되었다. 글자가 생겨나자 글자를 읽는 본능이 생겨났다. 뇌는 지식 이전에 언어를 구조화하게 되었고 혀와 성대는 복잡하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의미가 있다. 나은 것도 덜한 것도 없다. 내 존재에 의미가 있듯이 너에게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또 그 나름의 과제인 것이다. 이것은 너를 위한 이야기다.

사야는 너를 기르기 위해 지구로 왔다. 네 어머니가 되어주었다. 지구의 방식으로 너를 길렀다. 언어와 기호가 있는 세상으로 데리고 와 주었다. 우리의 소통방식을 배우러 왔다. 너를 배우고자 했다. 말을 배운 적도 글자를 배운 적도 없으며, 언어로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 일생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과 사는 길을 택했다. 일생 우리의 불완전한 소통에 만족한 적이 없었지만, 그 나름으로 이해하려 했다.

우리들은 태어나면 모두가 안다. 네 어머니가 지구에 왔을 때 우리 모두가 알았다. 우리는 네 생애를 지켜보았고 함께 해 왔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기로 정한 것은 네 고독이 과해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네 슬픔에 같이 슬퍼하기 때문이다. 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네 어머니의 무지를 용서하기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녀의 무지는 그녀의 앎에서 왔다. 너 또한 어리석지 않다. 그저 다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네 무지 또한 네앎에서 온다.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러니 책상 위에 놓아둔 그 약병을 버리고 일어나기 바란다. 아직 생을 놓기에는 많이 이르다. 네가 혼자였던 적이 없고 이후로도 그럴 것이니.

이 모두가 너를 위한 이야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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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글 김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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