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의 맨 앞 칸인 엔진실의 거대한 철문을 앞에 두고,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는 “가장 끔찍한 것은 자신이 사람 맛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라며 오열한다. 군인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모조리 빼앗긴 꼬리칸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잡아먹는 지옥 같은 두 달을 보냈다. ‘열차’라는 이름의 감옥 안에서 모두가 살아남는 방법은 없는 걸까.
인간의 실수로 온 지구가 얼어붙은 2031년. 오로지 순백색뿐인 세상에서 마지막 인류가 살아있는 곳은 바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설국열차’다. 그 어떤 기약도, 목적지도 없이 그저 ‘성스러운 엔진’과 위대한 기관사 ‘윌포드’에게 모든 걸 맡긴 설국열차는 5대주를 통과하는 43만 8000km의 폐곡선철로 위를 쉴 새 없이 달린다.
미래판 ‘노아의 방주’, 설국열차는 과연 어떤 열차일까. 먼저 열차의 평균속도는 시속 50km(극중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느리다).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은 열차의 칸수는 60~100량 정도다(자료 출처에 따라 편차가 있다). 열차 한 칸의 크기는 KTX와 유사한 20m x 3.5m인 만큼 기차 전체 길이는 1.5km를 넘긴다. 동력원은 알려진 바 없지만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는 점을 자꾸 강조하는 걸 보면 영구기관을 염두하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열차에는 다양한 역할의 칸이 있다. 맨 뒤 20칸 정도의 ‘꼬리칸’에서부터 감옥칸, 단백질블록 생산칸, 물공급칸, 온실칸, 수족관칸, 교실칸, 객실칸 그리고 대망의 엔진실까지. 그리고 이 모든 칸들이 직렬로 연결된 1차원 공간은 각자의 위치를 지키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열차라는 이름의 폐쇄 생태계
“74%를 죽여라.”
2인자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을 비롯해 열차 간부들이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균형’이다. 심지어 영화의 처음도 꼬리칸 사람들이 점호를 받고 그 수를 헤아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그토록 균형에 집착하는 까닭은 열차가 ‘폐쇄생태계’이기 때문이다. 폐쇄생태계는 외부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쉽게 말해 자급자족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공간의 제약때문에 적정 개체수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등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꼬리칸 사람들을 열차에 태우고 달리는 이유도 결국 폭동을 이용해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서였듯 말이다.
그렇다면 기차를 만든 장본인도 ‘감옥’이라 부른 설국열차의 생태계는 얼마나 고립돼 있을까. 충분한 양은 아니겠지만 열차 머리는 얼음이나 눈과 충돌할 때마다 이를 흡수해 열차 내부에 물을 공급한다. 희소식이 분명하다. 공기는 어떨까. 추위를 막기 위해 격리된 구조를 하고 있지만 기차 내부가 완전 밀폐공간이라는 설정은 영화 속에 없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빙하로 덮여 지구에 녹색식물이 남아있지 않은 탓에 산소량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 산소 농도는 1%만 떨어져도 생물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 1991년 미국 애리조나 사막지역에 세운 폐쇄생태계 실험실 ‘바이오스피어2’가 실패한 주원인도 바로 산소결핍이다.
바이오스피어2(바이오스피어1은 지구다)는 우주개발을 목적으로 1만 2700m2에 걸쳐 만든 거대 생태실험실이다. 안에는 인간 8명이 3800여 종의 동·식물과 함께 살며, 인간과 동물이 만드는 폐기물은 물론 물과 공기 모두를 내부에서 재활용했다. 그런데 실험 16개월째에 산소 농도가 정상수치인 21%에서 14%까지 급격하게 감소했다. 결국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김용현 전북대 생물산업기계공학과 교수는 “미생물의 산소 호흡량에 대한 예측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실험기간 도중 미생물 수가 급격히 늘어났거나, 부패 작용이 활발해졌다는 뜻이다.
설국열차 내 승객을 포함해 지구에 살아남은 동물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본다면 산소 문제를 완전히 간과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차에 탄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산소와 식량 두마리 토끼를 잡아라
바이오스피어2의 실패로 과학자들은 가스 평형을 위해 반드시 수천 종의 식물이 필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식용으로도 쓸 수 있고 광합성도 잘 하는 몇 종류의 식물만 가지고 소규모 생태계를 만들면 어떨까.
이 발상이 바로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이 활발하게 연구 중인 ‘생명지원시스템’이다. 생명지원시스템은 바이오스피어2에 비해 훨씬 축소된 규모로 우주비행사의 생존만을 보장하는 작은 생태계다. 우주 비행사는 이산화탄소와 비료로 쓸 수 있는 폐기물 등을 식물에게 제공하며, 식물은 산소와 먹을 것을 우주비행사에게 제공한다. 밀, 벼, 감자, 고구마, 땅콩, 상추, 토마토, 양배추 등이 적합한 작물로 알려져 있다(영화 속에도 토마토 농장이 잠깐 등장한다). 열차 내에서 이런 작물을 키운다면 산소와 식량을 모두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인간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생명지원시스템을 이용해 설국열차를 재설계한다면 승객 모두가 사람다운 음식을 먹으며 생존할 길이 있지 않을까.
‘ 바퀴 벌레양갱’을 먹지 않으려면
일등칸 승객들이 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꼬리칸 사람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을 먹는다. 윌포드는 엔진실에 도착한 커티스에게 “각자 위치를 지키는 것이 바로 인류의 모습”이라 말했다. 그러나 바퀴벌레로 만든 음식을 기꺼이 먹을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새 설국열차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삼아 보자.
그런데 시작부터 문제가 녹록치 않다. 승객 한 명이 1년간 쌀을 먹기 위해서는 무려 5칸의 벼 재배칸이 필요하다. 영화 공식홈페이지를 찾아보면 꼬리칸에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2000명이라고만 가정해도 벼를 키우기 위해서는 1만 칸의 공간이 필요하다. 열차를 복층으로 나눠 재배한다고 해도 5000칸이 필요하다.
계산과정은 이렇다. 우리나라 1인 연간 곡물 소비량은 약 125kg이다. 물론 주식인 쌀을 비롯해 밀, 콩, 보리 등을 포함한 값인데, 계산 편의를 위해 ‘곡물 소비량 = 쌀 소비량’으로 가정했다. 벼를 도정하면 우리가 먹는 쌀은 평균 73%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감안하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71kg이 된다. 또 여기에 국내 재배 면적 대비 수확량 500kg/1000m2를 적용하면 342m2의 공간이 필요하다. 열차 1칸의 면적이 70m2이므로 4.9칸, 즉 5칸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고기는 어떨까. 앞서 꼬리칸 승객 수를 2000명으로 계산했으니 이번엔 열차 내 전체 승객 수를 5000명이라 가정했다. 1인당 연간 육류소비량 35kg을 기준으로 계산의 편의를 위해 돼지만을 사육한다고 하면 1년에 돼지 2920마리를 잡아야 하며, 총 21칸의 사육공간이 필요하다. 벼 재배에 비하면 공간이 적게 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료를 재배하기 위한 공간은 고려하지 않은 계산 결과다.
설국열차는 노아의 방주가 아닌 지옥
승객을 위한 공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KTX 객차 1칸의 크기는 설국열차와 비슷하다. 1칸 안의 객석 수는 일반석 기준 50~60석으로 100칸을 연결하면 5000석이 된다. 앞서 가정했던 설국열차의 승객 5000명이 모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만큼 기뻐해야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식량을 생산하거나 동물을 기르는 공간 등을 생각하지 않고 승객들이 간신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는 뜻이다.
영화 속 꼬리칸처럼 공간을 최대한 입체적으로 활용한다고 해도 그 생활이 열악하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국내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수감자 1인당 최소면적이 2.58m2라는 점을 감안하면 설국열차 승객 1인에게 할당된 공간은 극도로 좁다. 설국 열차칸수를 60칸(여러 출처의 정보 중 최솟값)이라 계산하고 60칸 전체를 객실로만 썼다고 가정하면 1600명 남짓만이 수감자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열차에 탄 지 17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을 때 커티스의 반응을 떠올려 보자. 영화처럼 나이트클럽이나 사우나, 미용실에 할애할 수 있는 공간은 애당초 열차 위에 없다.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100칸의 열차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사람 수는 30명 내외라는 결론이 나온다. 100칸 중 75칸은 복층으로 만들어 벼를 재배하고(단층으로 재배하면 150칸이 필요하다!), 다른 칸에서는 상추와 같은 다른 야채를 키우며, 또 다른 칸은 돼지를 키운다. 활동 공간이 넓은 만큼 개인 공간이 모자라는 일도 없다.
영화 시나리오 초기작업에 과학자문으로 참여했던 김보영 작가는 “빙하기라 해도 온천 지역이 있고, 아무리 빙하기라도 적도지역에는 얼음이 얼지 않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자급자족할 공간이 부족한 열차에 올라타는 것 보다는 적도를 향해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생존확률도 높고 안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열차를 타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적 허구’다.
[남궁민수(송강호 분)는 엔진실 문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려고 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뒤틀린 체제를 거부하는 가장 혁명적 행위가 아닐까.]
팔다리를 나눠 먹으면 더 빨리 죽는다
열차가 출발하고 첫 두 달 동안 꼬리칸은 지옥이었다. 굶주림에 첫 한 달은 서로를 잡아먹었고, 두 번째 달에는 서로의 팔 다리를 나눠먹으며 버텼다. 아기의 목숨과 자신의 팔을 맞바꾼 길리엄(존 허트 분)의 행동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서로의 팔·다리를 나눠 먹으며 버티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김수진 고려대 응급의학과 교수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팔이나 다리가 절단되면 혈관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가 지속적인 출혈을 일으키는 데, 전문 의료진의 도움 없이는 지혈할 방법이 없다. 즉 과다출혈로 죽을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정말 극적으로 출혈이 멎어 생존한다고 해도 염증반응과 면역기능의 활성화, 스트레스로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윤리 문제를 배제한다면 팔이나 다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잡아먹는 것이 전체의 생존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김 교수는 “팔을 자르거나 누군가를 죽일 힘이 남아있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현명한 결정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설국열차는 왜 달리는 것일까. 영화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김보영 작가는 “체제의 전복을 막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요?”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열차가 달리고 있기 때문에 꼬리칸 승객들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다음 칸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만약 사람들이 열차에서 밖으로 나간다면 직렬 구조로 된 열차에서처럼 쉽게 통제할 수 없다. 1차원이 2차원, 3차원 공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마침내 열차의 문을 연 요나와 티미는 설산 위에선 백곰을 만난다. 살아있는 백곰의 존재는 설국열차만이 유일한 방주라는 설정이 사실은 영화적 허구가 아닌 체제의 거짓말이었음을 폭로한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