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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Tech] 물과 불과 시간이 만든 돌의 정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연경관을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그랜드 캐니언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애리조나 주에 가서 그랜드 캐니언만 보고 돌아온다면 반드시 후회의 눈물을 흘릴것이다. 애리조나주를 비롯해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4개 주에 걸쳐 있는 콜로라도 고원은 강, 바람, 비와 눈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깎고 다듬어서 만들어낸 예술품으로 가득하다.


애리조나에 산 지도 꽉 채운 3년이 다 되었던 올해 5월, 필자는 애리조나와 유타에 걸쳐 있는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를 비롯해 선셋 크레이터(Sunset Crater), 앤텔로프 캐니언(Antelope Canyon), 브라이스 캐니언(Brice Canyon)을 돌아봤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선셋 크레이터. 애리조나 주의 주도 피닉스에서 출발해 콜로라도 고원을 향해 올라가는 I-17번 고속도로를 타면 명왕성 발견으로 유명한 로웰 천문대가 있는 플래그 스태프를 지난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선셋 크레이터가 나온다. 해발고도2200m가 넘는 지역답게, 이미 38℃에 육박하는 더위가 찾아온 피닉스와는 달리 숲 사이로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선셋 크레이터는 콜로라도 고원 여기저기 산재한 화산 지형 중에서 가장 어린 곳이다. 1085년경에 분출했으며, 분화의 중심인 선셋 크레이터는 높이 약 305m의 ‘분석구’다. 분석구란 화산탄과 화산재가 쌓여 생긴 봉우리 형태의 지형으로, 과거 기생화산이라고도 불렸던 제주도의 오름이 바로 분석구다. 돌과 재가 쌓여 만들어진 봉우리라 충격에 약하기 때문에 방문객은 들어갈 수 없다.

선셋 크레이터 주변에는 점성이 높은 ‘아아형 용암분출’(A’a type lava)로 형성된 거칠고 울퉁불퉁한 용암대지가 있다. 용암대지는 일단 토양이 되고 나면 매우 비옥하다. 그러나 이곳은 불과 1000년도 안 된 어린 지형이라 아직도 현무암이 그대로 드러난 곳이 많다. 그래도 소나무를 중심으로 다수의 식생이 그 틈을 비집고 성장해 숲을 이뤘다. 분화 당시 이곳에 살던 시구아나 족(푸에블로 인디언의 한 갈래)은 살던 곳에서 떠나야만 했다.



영원한 서부극의 배경

선셋 크레이터에서 다시 세 시간을 넘게 달리면 모뉴먼트 밸리가 나온다. 모뉴먼트 밸리는 페름기 초기와 트라이아스기 초기에 퇴적된 암층으로 이뤄져 있다. 과거 이곳을 흘렀던 강이 깎아낸 거대한 계곡이다. 밸리 전체에 걸쳐 가장 흔히 보이는 붉은색은 실트(모래와 점토 중간 굵기의 흙)에 들어 있는 산화철에 의해 나타난다. 함께 섞여 나타나는 푸르스름한 회색 부분은 산화마그네슘 때문이다.

모뉴먼트 밸리를 비롯해 애리조나 주, 유타 주 등 미국 서부의 건조기후지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이 ‘메사’(mesa)와 ‘뷰트’(butte)다. 건조기후의 특징인 메사와 뷰트는, 강수에 의한 침식에서 살아남은 지형이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강도의 침식을 받는다 해도, 기반암의 모든 부분이 똑같은 속도로 깎이지는 않는다. 암층에는 부분적으로 침식에 강한 물질이 있는데, 그런 층이 마치 보호막처럼 아랫부분을 보호해서 윗부분이 평평한 테이블 같은 지형이 생기는 것이다. 규모가 큰 것을 메사라 부르고, 작은 동산만 한 것들을 뷰트라고 부른다. 모뉴먼트 밸리 공원 내에서 보이는 지형이 거의 대부분 뷰트 또는 메사에 속하거나, 거의 다 사라지고 남은 흔적이다. 모뉴먼트 밸리를 비롯한 주변 지역은 ‘나바호 네이션’(Navajo Nation)이라 부르는 나바호 족 보호구역에 속해 있다. 백인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정복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일말의 인도적 조치로 보호구역을 설정하고 그 안에서 약간의 지원과 권리를 보장해 주었을 뿐이다.

나바호 네이션도 그 중 하나다. 이 안에서 나바호족은 자치권을 갖고, 지역 내 관광자원을 독점한다. 하지만 대부분 자연경관을 관광하는 국립공원인데다, 캠핑을 즐기는 미국의 관광 문화로 인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은 숙박업과 약간의 요식업,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게 고작일 뿐이다.

모뉴먼트 밸리는 매우 넓기 때문에 주로 차량을 이용해 관광해야 한다. 나바호 족 관광회사 차량만 출입할 수 있는 제한구역도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공원 입구의 ‘벙어리장갑’ 뷰트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지평선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서부영화 분위기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은 서부영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영화감독 존 포드가 수 많은 작품을 촬영했던 곳이다. 황량한 모뉴먼트 밸리야말로 서부극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 아니겠는가. 존 포드의 이름이 낯설다고 해도, 존 웨인은 친숙한 이름일 터. 존 웨인은 존 포드의 고전 ‘역마차’에 주연으로 출현하면서 스타가 됐고, 지금도 미국의 최고 남성 스타로 꼽히는 배우다. 두 사람의 유명세는 공원 내에 ‘존 포드 포인트’가 있고, 기념품 판매점에서 따로 코너를 만들어 존 웨인과 관련된 물건들을 판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바위가 흐르는 초현실적 풍경

모뉴먼트 밸리를 떠나, 서쪽에 있는 페이지라는 도시로 향했다. 이곳에는 콜로라도 강을 댐으로 막아 만든, 저수량 기준으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인공호수인 ‘파웰 호수’가 있다. 글렌 캐니언에 있는 댐 공사를 마무리하고 물을 다 채우는 데만 약 16년이 걸렸다.

회색 돌과 드문드문 자라난 관목 사이로 거대한 호수가 덩그러니 있는 풍경은 상당히 낯설다. 한국이라면 나무로 덮인 산이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하니 말이다. 유타주로 넘어와서 가장 눈에 띄는 관광지의 변화라면 기념품 판매점에서 공룡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들을 판다는 점이다. 유타주 남부에는 거대한 그랜드스테어케이스-에스컬랜티 국가기념물이 있는데, 이곳은 공룡 화석이 매우 풍부하게 나오는 지역이다. 큰 규모의 공룡박물관도 있다. 그 때문인지 에스컬랜티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파웰 호수에서도 공룡과 관련된 상품이 많이 팔리고 있었다.

파웰 호수에서 남쪽으로 30여 분을 달리면, 유명한 앤텔로프 캐니언이 나온다. 과거 거대한 사막의 잔재인 붉은빛의 나바호 사암으로 이뤄진 앤텔로프 캐니언은 몬순 시기에 주기적으로 발생해 온 기습 폭우가 깎아낸 지형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몬순과 기습 폭우는 계속해서 계곡을 깎아내고 있으며, 지난 2006년에는 36시간 동안 범람이 지속돼 5개월간 계곡을 폐쇄한 적도 있었다. 앤텔로프 캐니언은 인원이 한정된 가이드 투어로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수개월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앤텔로프 캐니언은 다른 거대한 계곡과는 달리 매우 협소하고 짧다. 상부 계곡과 하부 계곡으로 나뉘어 있으나, 서로 연결돼 있지는 않다. 필자가 다녀온 상부 계곡은 폭이 1~2m에 불과했고, 전체 계곡도 보통 걸음으로 10여 분이면 끝까지 갈 정도로 짧았다. 동굴이 아닌 계곡이라 천장이 막혀 있지는 않았지만, 폭이 좁고 바위들이 굽이치듯 솟아올라 하늘을 가리고 있어 전반적으로 동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 건 계곡 내부가 무척 아름다워 어디를 찍어도 작품 사진이 될 만큼 절경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붉은 사암을 마치 사람이 만든 조각품인 양 매끄러운 곡선으로 다듬었고, 퇴적암 특유의 층리는 마치 바위가 물결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게다가 계곡 상부의 열린 틈을 따라 군데군데 내려오는 햇빛이 초현실적인 조명을 더한다. 그런 분위기 덕분인지, 계곡 안에서 깜짝 프러포즈를 하는 커플도 볼 수 있었다. 계곡 상층부에서 쉴새 없이 부는 모래를 머금은 바람이 좀 괴롭긴 하지만.



세월이 빚어낸 돌의 정원

마지막 행선지는 브라이스 캐니언이었다. 유타 주 끝자락에 있는 브라이스 캐니언은 마치 원형극장 형태의 분지 안에 첨탑처럼 솟아오른 수많은 ‘후두’(바위기둥)로 유명한 곳이다. 가장자리의 높이는 해발 2400~2700m인데, 그 중 가장 높은 레인보우 포인트는 백두산에 근접한다. 고도 덕분에 5월 중순에도 브라이스 캐니언은 시원함을 넘어 서늘할 정도였다.

원형극장처럼 생긴 둘레를 따라 걷다 보면, 아래쪽으로 수많은 후두가 눈에 들어온다. 브라이스 캐니언 지역은 중생대 후기에서 신생대 전기까지 퇴적된 암석으로 이뤄졌는데, 후두를 형성하는 부분이 가장 최근인 신생대 전기에 퇴적된 층이다. 당시 홍수가 일어났을 때, 그리고 거대한 호수 였던 시절에 퇴적된 사암, 실트, 석회암 으로 이뤄져 있다.

브라이스 캐니언의 독특한 모습은 석회암의 풍화 덕분이다. 석회암이 이산화탄소가 녹아 있는 빗물과 만나면 세계 어디서나 매우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낸다. 브라이스 캐니언에서는 일단 석회암이 용해돼 탄산칼슘 형태로 씻겨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수분이 바위틈에서 얼어붙으면서 팽창해 물리적 풍화가 이루어진다. 고도가 높아 이런 수분팽창 주기가 1년에 약 200회 정도 반복된다. 하지만 풍화에 상대적으로 강한 사암이나 실트스톤 등은 남아서 후두, 핀, 그리고 마치 아치형의 창문과 같은 ‘윈도우’라 부르는 지형을 이루게 된다. 풍화에 강한 돌로마이트가 후두 꼭대기에서 마치 모자처럼 하부를 보호하고 있지만 후두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풍화에 의해 붕괴될 운명이다.

브라이스 캐니언에는 아래를 돌아볼 수 있는 다양한 등산코스가 있다. 후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고도가 낮아지면서 서서히 기온이 올라간다. 주변의 식생 또한 관목에서 제법 큰 나무들로 바뀐다. 후두는 때로는 탑처럼, 때로는 잘 가꿔진 정원처럼 보였다. 되려 나무가 돌로 된 정원에 잘못 자라난 잡초같이 보일 정도였다. 이 지역은 헬리콥터로도 둘러볼 수 있지만, 직접 걸으면서 옆에서 느끼는 것이 더 좋다.

인간의 감각으로는 짐작할 수조차 없는 오랜 세월 동안 물과 불, 바람, 그리고 생명이 만들어낸 콜로라도 고원의 산과 계곡에서 느끼는 감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지질학적 규모의 세월이 깃든 이 곳에서 작렬하는 태양과 바람, 그리고 운이 좋다면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는 건 일생의 추억이 될 것이다.



홍인수_iaminsu@gmail.com
지리학 전공으로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으며, SF를 좋아해 몇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글 : [글·사진] 홍인수 karidasa@donga.com
에디터 : 고호관
이미지 출처 : 홍인수

과학동아 2013년 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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