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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멈추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얕은 밤이 걷혀갔다. 늘 푸른 기가 도는 연분홍빛이었던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지평선에 머리자락만 내놓고 있던 해가 붉게 날이 선 빛을 뿌리며 몸뚱이를 드러냈다. 멎어 있던 별이 흐르며 숨이 죽었다. 기차에서 태어나 처음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본 아이들은 세상 어딘가가 망가진 줄로만 알고 울기 시작했다. 모래에 반쯤 파묻힌 지프와 씨름하던 사내가 고개를 들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사내도 곧 해가 뜬다는 것을 안다. 이대로 멈춰 서 있으면, 밤새 사막이 머금어 준 풍성한 습기를 말려버리고 모래폭풍을 일으키고, 살갗을 뚫고 찜기에 넣은 고기처럼 세포를 익혀 버릴 ‘낮’의 영역에 삼켜버린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만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며 우리에게는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지구에서 온 사람들은 가끔 우리가 왜 기차를 타게 되었는지 묻곤 한다. “나 같으면 하루도 기차에서 못 지낼 것 같은데. 한 달은 둘째 치고 말야.”하고 덧붙이면서.

지구인과 우리의 시간 개념은 조금 다르다. 지구인의 하루는 우리로서는 한 시간에 조금 못 미친다. 지구인의 한 달이 우리에게는 하루다. 우리 키바 사람들은 태어난 지 열흘이면 걷기 시작하고 한 달이면 말을 뗀다. 한 살이 다 되기 전에 어른이 되고 서너 살이면 수명을 다한다. 밤낮의 구분 없이 하루에 열 번의 쪽잠과 다섯 번의 큰 잠을 자고, 큰 잠은 지구 시간으로 하루 이틀 분량의 긴 수면을 취한다.

물론 우리가 지구인과 특별히 다른 생물종이라든가, 특별히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별이 지구 시간으로 30일 정도에 한 번 자전할 뿐이다. 태양과 별무리가 지구보다 서른 배 느리게 하늘을 이동할 뿐이다.

그 속도는 지구 단위로 환산하면 시속 55km정도로, 차로 달리면 얼추 따라갈 수가 있다. 그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면 우리 시간으로 하루 만에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온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막연히 들은 지구인들은 또 묻곤 한다. “산맥이나 강도 있고 바다도 가로막혀 있을 텐데.”

키바의 지형은 지구와 다르다. 키바의 바다는 양 극지방에 몰려 있고 대륙은 적도를 중심으로 테를 두른 것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지구인과 교류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심력이 약한 행성의 특징이라고 한다. 대륙은 화산지형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평평하며 중심부에는 긴 테처럼 사막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주로 해안가에 살며 바다로부터 먹을 것과 자원과 산소를 얻는다.

낮밤이 길어 낮에는 기온이 55도까지 오르고 밤이면 영하 45도까지 떨어진다. 키바의 식물은 대개 하루살이 풀로, 새벽에 싹을 틔워 낮에 열매를 맺고 저녁이면 시든다. 철새들은 아침나절까지 머물다가 낮이 오기 전에 새벽으로 돌아간다. 큰귀코끼리는 밤이 오면 남으로 내려가고 낮이 오면 북으로 이동한다. 줄무늬큰뿔소와 큰점박이사슴무리는 위도를 따라 달린다. 그들은 하루의 반 이상을 달리는데, 그 경로에는 천연의 도로가 다져져 있어 대상(大商)들이 그들의 뒤를 쫓아 이동한다. 그 뒤로는 줄무늬큰뿔소가 남긴 배설물을 비료로 만드는 상인들이 뒤를 쫓는다.

그러니까, 키바의 생태계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태양을 따라 이동해 왔다.

새벽기차가 처음부터 행성을 횡단한 것은 아니다. 여러 지역 자치구에서 만든 해안철도가 긴 세월에 걸쳐 이어진 것이다. 기반이 된 것은 주요 어촌과 수산시장을 연결하는 장기 화물노선으로, 새벽 어스름에 해안가에 늘어선 어촌에 도착하는 기차였다. 그때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시간대라서다. 밤새 어업을 한 어부들이 나와 어획물을 팔고, 다음 도시에서는 상인들이 막 기차에 실려 온 신선한 생선을 받아 장에 나가 팔았다. 후에 관광노선으로 개발되어 행성 전역을 잇게 되었다.

새벽기차는 시간선을 따라 달리기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차량에는 시계가 두 개 붙어 있는데, 하나는 행성 표준시고 하나는 기차시다. 기차시는 가지 않기 때문에 그림으로 붙여 놓기도 한다.



태양폭풍으로 오존층이 망가진 이후로 키바는 한층 더워졌다. 그리고 그건 태양 그 자체의 활동이 변한 탓일 수도 있고 행성 자기장이 뒤틀린 탓일 수도 있고 태양광의 변화로 산림이 망가진 탓일 수도 있고, 자외선이 증가해 해양식물이 바다를 덮은 탓일 수도 있다. 자연은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동일한 원인이 키바를 춥게 만들 수도 있었다. 자연에 생겨난 상처는 사람에게 생겨난 상처처럼, 양극단 어딘가로 이동하는데 어느 극으로 갈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태양광에서 쏟아지는 유해한 것들과 대낮에 작열하는 열기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도시는 지하로 내려갔다. 행정부처와 회사는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초고층 건물 대신 초저층 건물이 생겨났다. 집을 가진 사람들은 땅굴을 파거나 지하실을 주거공간으로 개조했다. 그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조용히 예전의 삶을 이어갔다. 지구에서 이민선단을 보내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우리는 그때까지만 태양을 피해 달아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시간감각이 빠른 별이니 몇 달만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는 장담할 수가 없다. 길은 선로처럼 고르지 않다. 배는 풍랑을 예측할 수가 없다. 이제 비행기는 아무도 타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멀미의 수준을 생각해도, 기차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이동수단이었다.

이민선단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 같다. 지상에 남은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산 사람도 있다. 우리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고 산 사람도 있다. 단지 지상에 남은 사람들은 자외선을 차단하는 검고 단단한 피부를 갖게 되었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더 단단하다. 열악한 환경이나마 견뎌낸다.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달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무엇이 좋은 선택이었을지 지금도 가끔 생각하지만, 결국 지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기차는 시간이 지나며 작은 도시로 변해 갔다. 의자가 가장 먼저 개조되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의자 등받이를 내려 ‘집’인 좌석을 합쳤다. 나중에는 웬만한 칸은 하나로 이어졌다. 혼자 온 사람도 가족이 온 사람도, 단체로 온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모두 한 가족이 되었다.

기차를 탔다는 것 외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살아온 환경도 생각도 사는 방식도 모두가 달랐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모두가 비슷해졌다. 사흘이 지난 뒤에는 하나같아졌다. 어쩌면 생각에도 자장 같은 것이 있어, 너무 가까이 붙어살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경험은 동일했고, 매양 매 순간이 동일했다. 아는 것이 같아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우리는 늘 밖을 보았다. 하늘은 늘 푸른 기가 도는 분홍빛이었다. 해머리는 지평선에 못 박혀 있었다. 새벽별도 그 자리에 머물렀고 키바의 공전에 따라 아주 조금씩만 자리를 틀었다. 줄무늬큰뿔소와 점박이큰사슴 무리가 우리와 함께 달렸다. 그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큰 벽화처럼 보였다. 기차에서는 시간이 멎는다. 어른들은 늙어 갔고 우리는 나이가 들었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한 세대를 여행했지만 떠나온 시간에 계속 머물렀다.

언젠가 내가 창밖을 하염없이 보았던 적이 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우리 차량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보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내가 “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난 그냥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눈을 떼지 않았다. 내게 반응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들킬까 두려워 도로 그 방향에 시선을 못 박았다.

우리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기차는 우리를 피로하게 했고 뭔가를 생각하기에는 늘 피로했다. 누군가가 간혹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전체의 것이 되었다. 때로는 그 의견이 남의 의견이었는지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헷갈렸다. 일을 할 때에는 대화 없이도 일사분란하게 했다. 차량이 정거장에 선 잠깐 사이에 귀신같이 정비를 마치고 도로 기차에 올랐다. 정착민들은 그 일사분란함에 혀를 내둘렀고 우리는 가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렸을 때에 나는 간혹 ‘나’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나를 부를 때에도 ‘우리’라고 부른다.

우리는 계속 어떤 ‘과정’ 사이에 있었다. 마음을 정착할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무엇을 하려 하든 ‘아아, 그래, 도착한 다음에 해야지.’하고 생각했다. 떠날 곳도 도달할 곳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차를 몰고 여행길에 올랐다. 초반에는 선글라스를 쓰고 가죽옷을 입고 시끄러운 음악을 틀며 기차를 향해 야유하는 패거리도 있었다. 캠핑카나 트럭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엉금엉금 가는 달리는 차도 있었다. 그들이 오래 버티리라 생각한 사람은 그들 자신밖에 없었다. 이틀이 지나자 거의 짐승들만이 남았다. 그 뒤에도 온몸에 차도르를 두르고 걷는 상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한 사람만이 달린다. 지프를 모는 그 남자.

우리는 늘 창으로 그 사람을 본다.

그와 우리의 속도는 다르다. 그는 우리와 달리 때가 되면 잠을 자야 한다. 그 사람이 우리 옆을 지날 때에는 빠른 속도로 지나쳐간다. 때로 우리는 지프에 팔짱을 끼고 잠든 그를 보면서 지나간다. 가끔은 그가 기차가 지나는 소리에 깨어나 우리를 바라본다.

그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도 있었다. 우리는 기찻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만, 그는 지름길이나 차가 다니기 편한 길,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이나 몸을 씻을 곳을 아는 것 같다. 그의 경로는 매일 조금씩 정교해졌고 나중에는 그의 바퀴자국을 따라 이동하는 작은 짐승 무리까지 나타났다. 짐승들이 그 사람이 쉬던 자리에서 쉬고 그 사람이 고쳐 놓은 우물에서 물을 마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정비사일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차가 여지껏 굴러가고 있을 거라고. 아닐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차에 지붕을 만들어 쓰고 다녔는데, 볼 때마다 지붕이 바뀌는 걸 보면 뭘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대나무와 부대자루를 엮어 만든 꽤 괜찮은 것이 있었는가 하면 슬레이트 판이거나 살이 다 나간 우산일 때도 있었다.

그저 몇 가지 행운이 겹친 결과라고도 했다. 통계의 우연에 의해서도 전쟁터에서 사람이 다 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했다. 꼭 대단한 전사거나 영웅이라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운 좋게 운명이 비켜간 것이다.

열흘이 지나고 스무 날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 사람을 기차에 태울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은 시기를 놓친다. 우리는 모두 그의 여정이 조만간 끝나리라 믿었다.

그는 매 순간 그 믿음을 배반했다. 도시는 흘러가고 땅은 멈춰 서지 않고, 아름다운 풍경도 한순간에 지나가건만, 오직 해와 별과 그 사람만이 우리 옆에 멎어 있었다.

남자의 지프에는 혼 비슷한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프는 늙은 암말 같았고 상처 입은 충직한 사자 같았다. 털털거렸고 성한 곳이 없었지만 예고 없이 서는 일도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그 차가 수명을 다하면 한순간에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 달리다가 선 채로 죽는 점박이큰사슴처럼.

우리는 간혹 그 사람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남자는 창을 들고 달려와 차량 연결고리를 끊기도 했고, 지프에서 박격포를 꺼내 기관실을 부수기도 했다. 종종 회의를 하다 보면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경비를 서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그때마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남자를 떠올렸다.

우리는 물과 식량과 기름을 사기 위해, 또 차량을 정비하기 위해 정거장에 선다. 지금 기차는 행성을 이동하는 유일한 차량이다. 우리는 정착민들에게 배달이나 편지 심부름을 받고, 기차 안에서 만든 술이나 손뜨개 옷을 판다. 간혹 막대한 돈을 받고 승객을 태운다.

그 사람과 우리는 가끔 정거장에서 만난다. 우리는 한 번도 그에게 말을 붙여 본 적이 없었다. 그도 한 번도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 본 적이 없다. 거래를 하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벽이 쳐 있는 것처럼 각자 정착민과 대화한다.

사람들은 그가 우리를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혹은 경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복수할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우리와 말을 섞지 않는 이유를 달리 생각했다.

나는 그가 자신을 사라진 옛 시간선에 남은 유일한 생존자로 상상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동반자인 차를 포함해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길고 투박한 몸뚱이를 가진 거대한 기계생물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간다고. 그의 입장에서 우리는 거대한 생물의 안에 사는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나……, 뭔가 나쁜 느낌이 나지 않는 말이 있으면 좋겠는데……, 개별로서는 인격이 없는 군집생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그 사람에게 가서 기차에서 직접 담근 술이나 설탕물을 건네는 상상을 하곤 했다. 눈을 마주보며 이름이 뭐예요, 전에는 어디 살았나요 같은 시시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와 눈을 마주한다면. 그는 나를 기차 안에 사는 기생충이나 바이러스나 뭐 그런 군집생물의 부분체가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그는 기차가 지나갈 때 내가 사는 차량이나 내가 앉아 있는 좌석의 창문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 사람은 언제고 내게 지나가듯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기차에 혹시 빈자리 없니?’


혹은


‘너희는 왜 아직도 나를 태워주지 않는 거니?’


나는 그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할까 봐 두려웠다. 나로서는 답을 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이제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생각할 것이다. 너는 나를 기차에 태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어째서 계속 외면하는 거지? 왜 차장에게 한 번 말이라도 해 주지 않는 거니? 그의 가슴에 싹튼 소망은 증오로 바뀔 것이다. 나는 이 기차 전체를 대표해서 그의 증오를 받게 될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이 모든 것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신화적인 면은 있되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보다 먼저 종말에 이를 것이고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는 필연적인 종말을 향해 달리는 그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했고 내가 알기로는 우리들 모두가 그랬다.




우리가 그날 왜 멈췄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다른 모든 여행자들의 운명에 무심했으면서도. 왜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았을까.

오랫동안 기차를 끌었던 기관사가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의 조난자 구조지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차장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를 조롱해 왔던 이 잘난 아웃사이더를 향해, 마침내(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승리했다는 우월감을 향유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는 미지의 위협이었던 그 남자를 오직 그때에만 위험 없이 그를 손쉽게 잡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패배한 짐승처럼 얌전히 기차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처음 여행을 떠났을 때보다 한참 늙어 있었다. 승무원들이 내려 그를 둘러싸 작은 침대칸에 가뒀다.

기차가 출발하자 다시 시간이 멎었다. 해는 지평선 머리에 붙들렸고 새벽 별들은 회전하는 일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우리도 그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서로를 인간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는 다른 생물처럼 대했다. 나는 때로 그 사내가 거대한 짐승의 뱃속에 먹힌 기분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를 감시했고 굶기기도 했고 때로는 구타도 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이빨과 어디엔가 숨겨 놓았을 증오를 탐지했다. 남자는 아이처럼 얌전했다. 호의도 적의도 없었다. 폭풍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잠이 들고 또 깨었다.

정거장에 이르자 그 사람은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단지 내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내리는 것을 막았다. 만약 붙어 있으려 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쫓아냈을 것이다. 그 사람이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어떤 미지의 세계의 음모의 일환일 것이며, 그 목적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정거장에 설 때마다 지역 주민들은 그 사람이 갇힌 칸에서 사람을 구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몇 번인가 소란이 있은 뒤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어차피 아무것도 못 할 테니까.”

그러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춰 섰다. 우리에게 반대의견이라는 것이 없다. 지프를 타던 사내는 침묵 속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거주민들은 그 사람의 시퍼런 눈두덩과 찢어진 입술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돈이었지 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여느 때처럼 상인들을 만났고 신중하게 물건을 골랐다. 그리고 벨트며 밸브며 렌치와 실린더와 펌프 같은 것을 한 아름 들고 기차로 돌아와 제 감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다음 정거장에서는 새 오일과 배터리와 전선을 샀다. 우리는 곧 알게 되었다. 남자는 새 엔진을 만들 생각이다. 지프에 새 심장이 필요한 것이다. 모래를 박차고 빠져나올 만큼 기운 센 것으로. 그제야 우리는 처음부터 사내가 이럴 생각으로 기차에 탔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친구, 그의 집, 그의 고향인 지프를 살려내려면, 그리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려면 그는 이 기차를 타고 하루 동안 행성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이 행성에서 달리는 탈것은 지금 이 기차밖에 없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목적을 알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의 목적이 행성을 도는 것이라면, 왜 이처럼 편안하고 안전한 기차에 머물지 않고 굳이 그의 초라한 지프로 돌아가려 한단 말인가?

지프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기계는 순식간에 죽는다. 짐승 떼가 밟고 지나가거나 모래폭풍이 덮어버리지 않았다 해도, 끓는 태양이 차 거죽을 조각조각 말라 부숴 놓았을 것이다. 모래먼지가 들어와 혈관을 막고 실린더 틈새를 가득 채웠을 것이고, 엔진오일이며 냉각수는 벌써 다 말라 버렸을 것이다. 작은 짐승들이 벌레처럼 모여들어 시트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거나 새끼를 기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벌써 죽었을 동료의 시체에 심장수술을 하러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되살린다 해도 언제 죽을지 모를 노쇠한 동료를 위해서.

우리는 때때로 그의 방에 쳐들어가(굳이 그럴 필요도 없으면서) 한쪽에서는 그를 밟고 다른 쪽에서는 그가 만든 엔진을 헤집었다. 안에서 폭탄도 비밀단체의 쪽지도 발견되지 않으면 어디에 숨겼느냐며 그를 다그쳤다.

그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철새나 줄무늬큰뿔소 한 마리를 잡아 와 다그치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쏘다니느냐고 물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한바탕 심문이 끝나면 우리는 늘 그의 엔진을 반쯤 부수어 놓았고 그러고 나면 그는 며칠은 잔해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그는 다시 부품을 샀고 다시 엔진을 만들었다.

그가 우리를 해칠 마음만 먹었다면, 선로에 돌덩이 같은 것을 올려놓거나 열을 가해 약간 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기차를 전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차 바깥에 사는 누구나 마음만 먹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우리를 해치려들지 않았기에, 세상 전체가 용인했기에 우리가 생존해왔건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사람이 미지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실제로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내내 그 확신에 대한 증거를 찾아 헤맸다. 우리 자신이 행한 학대에 대한 이유 역시 찾아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되고야 말 것이라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 하루가 가까워지자 기차는 그 사람을 태웠던 자리에 접근해 갔다. 선로는 하나였기에 다른 길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정찰대인 선두 차량에서 지프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해 왔다. 우리는 한층 더 포악해졌다. 두 괴물이 조우하여 정체불명의 사태를 일으키기 전에 해결을 보아야 했다.

그 사람이 무력하게 얻어맞는 동안 나는 그가 완성해 놓은 엔진을 향해 걸어갔다. 잘 만든 심장이었다. 차에 끼우기만 하면 몇 주는 펄펄 날 것 같았다.

나는 엔진에 발을 올려놓았다. 남은 정거장은 없고 남자는 이제 엔진을 만들 시간이 없다. 어쩌면 돈도 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엔진을 부수면 남자는 꼼짝없이 하루를 더 기차에 남아야 한다. 그러면 다 끝난다. 지프가 경이로운 인내로 끓는 태양과 얼음 같은 밤을 하루는 견뎠을지 몰라도 다음 하루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처럼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는 이 남자에게 달리 무슨 선택의 여지가 남겠는가? 이 사람은 죽거나 기차에서 살거나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할 것이다. 어느 쪽도 즐겁게 고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긋난 세상의 톱니 하나가 사라지거나 원래 있었어야 할 자리로 들어올 것이고 우주의 질서는 바로잡힐 것이다.

나는 내 발길질 한 번에 우주의 운명 하나쯤은 부수고도 남을 도취감에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 얻어맞던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야말로 그의 눈에서 우리가 찾아 헤매던 어떤 비인간성의 증거, 숨겨왔던 증오의 발톱을 드러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그의 우주를 부수고, 남은 것이 없는 그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 .”


대신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 사람이 내 이름을 알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서 들었을까. 혹여 기차에 타기 전의 나를 알고 있었을까. 내가 어려 기억하지 못했을 뿐 같은 마을에 살기라도 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차량번호나 번호표였고, 승무원이나 정비사나 요리사였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 해 전에만 해도 나는 아직 어렸고, 독립된 사람이었고 기차에 녹아들지 않았었다. 그때에 나는 정거장에서 그를 바라보며 그 사람에게 말을 거는 상상을 했었다. 인간과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상상을 했다.

“그만 둬.”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 .”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질책과 애원이 동시에 섞인 목소리로, 무엇을 어찌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 섞인 목소리로, 그 한 마디에 인간에 대해 마지막 남은 모든 신뢰를 담은 채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때에는 좋은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에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변명할 마음도 자책할 마음도없다. 당신도 이 안에서 살아간다면 나만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상 우리에게 반대의견은 없고 누군가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전체의 생각이 된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 판단은 우리 모두의 판단이 되었다.

삶은 계속 이어졌다. 고단했지만 익숙했다.

새들은 삶의 일부가 된 비행을 계속했다. 줄무늬큰뿔소는 지도자의 인도를 따라 들판을 달렸다. 태양은 뜨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늘 새벽에 머물러 있었다. 행성은 변해가고 식물과 동물은 새환경에 맞춰 진화해 갔지만 우리는 정지한 시간 속에 머물렀다.

우리는 때로, 그 자신이 만들어낸 길 한 가운데 멈춰 서 있는 지프를 지나쳐갔다. 그러면 지프는 잠이 깨어 시동을 걸었다. 그 녀석은 이제 생물에 필적한 뭔가를 갖고 있다. 주인이 굳이 핸들을 틀지 않아도 길을 고르고, 위험을 감지하거나 길에 튀어나온 자갈 따위를 피할 줄도 안다. 그리고 때로는 멈춰 서서 우리가 치익치익 숨을 내쉬며 선로를 달리는 것을 바라본다. 호의도 적의도 없이. 지난 시대의 유물 같은 낡은 생물을. 그의 시간선에 남은 유일한 동반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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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글 김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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