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➊울산 대곡리에 있는 암각화에는 먼저 고래와 사슴 그림을 그렸다가 그 위에 호랑이, 곰 등 맹수를 그렸다. 외계충격현상 때문에 맹수가 늘어난 상황을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은 울산 암각화박물관에 전시된 반구대암각화 모형 중 맹수가 그려진 부분.]

우리 역사는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발해는 정말 백두산 폭발로 멸망했을까, 조선시대 후기에는 왜 그렇게 당쟁이 심했을까, 반구대 암각화에는 왜 고래 그림 위에 호랑이 그림을 그렸을까….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의외로 하늘을 봐야 할지 모른다. 외계충격설, 즉 소행성 등 우주에서 날아온 충격은 인류 역사에 관한 많은 의문들을 풀어줄 단서를 주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 보자.

바위에
사슴을 지우고
맹수를
그린 사연


울산 대곡리와 천전리에는 커다란 바위그림(암각화)이 있다. 각각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와 천전리각석(국보 제147호)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울산 시민의 식수 확보를 위해 이 그림들을 수몰시키느냐 여부를 놓고 아직도 논란이 많다.

바위그림은 세계 곳곳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회성 그림인데 울산 바위그림은 한 자리에 두 번, 세 번 그린 ‘역사기록물’로서 이전에 유례가 없다. 기원전 5000~3500년 사이 어느 때 첫 그림이 그려지고, 이후 한 번 또는 두 번 더 그려졌다. 대곡리, 천전리 다 첫 그림은 고래
와 사슴을 많이 그려 놓았다. 두 번째는 호랑이, 곰, 멧돼지 등 맹수를 그리거나(대곡리), 마름모, 동심원 등의 무늬그림을 잔뜩 그렸다(천전리).

고래와 사슴이 왜 맹수로 바뀌었을까. 고래와 사슴 그림을 지우고 새로 그려 넣은 무늬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래와 사슴은 따뜻한 해류와 기후에 번성하는 동물이다. 반면 맹수들은 모두 추운 지방 출신이다. 그렇다면 기후가 변하면서 생태계도 크게 달라진 걸까.

울산 바위그림들과 관련 있어 보이는 것이 신생대 충적세 후기(기원전 3500~600년)의 외계충격설이다. 외계 충격 현상이 길어지면 유성
이 터진 가루, 유성 떼를 싸고 들어온 우주 먼지가 대기권에 쌓인다. 이 결과로 태양의 빛과 열이 차단돼 지구의 기온이 내려간다. 기존 통설에 따르면 천전리 바위그림의 무늬는 원시인의 소원을 담은 상징기호다. 그러나 외계충격 현상이 일어날 때 하늘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원시인들이 놀란 가슴으로 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아일랜드 및 영국 웨일스 지역의 바위그림 무늬들도 천전리 것과 비슷하다. 이미 이를 외계충격 현상과 관련짓는 연구를 내놓는 학자들도 있다. 1930년 6월 1일 미국 뉴멕시코 파사몬트 상공에서 유성이 폭발한 것을 찍은 사진과, 유성이 상공에서 터진 뒤 가루가 수직으로 내려 뻗은 광경을 그린 스케치가 남아 있다. 수직으로 내려 뻗은 광경의 그림과 거의 비슷한 것이 천전리 바위그림에 보인다(‘새한국사’ 50쪽에 있다). 이것이 필자가 대곡리, 천전리 바위그림을 외계충격설과 관련짓는 단서가 됐다. 기원전 3000년 경 울산 사람들은 하늘에서 외계충격 현상이 일어난 가운데 굉음과 섬광에 떨면서 눈앞에 벌어진 광경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장기간의 기온 강하로 생태계가 바뀌어 맹수들이 날뛰는 모습을 바위에 새겼던 것이다.
[➋1680년 12월 16일 독일 뉘른베르크 상공을 나는 유성(소행성). 당시 사람들은 과학 지식이 부족해 이를 혜성이라고 하였다(독일 뉘른베르크 게르마니체 국립박물관 소장).

➌울산 반구대암각화의 탁본(울산대 박물관 소장).]

인류 최초의
철기,
하늘에서 온
운석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말할 때 흔히 <;석기문화 - 청동기 문화 - 철기문화>;의 순서를 든다. 구글에서 ‘철기문화’를 검색하면 철기 시대가 기원전 1200년경에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나와 있다. 역사 연표에서는 제철 기술이 중동 히타이트 제국에서 기원전 1400년경에 처음 발달한 뒤, 기원전 1220년경 이후 간헐적으로 주위에 전파된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철기 전문가들의 견해는 좀 다르다. 히타이트 철기문화의 증거인 황금장식 철검(아래 사진)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철(隕鐵)을 두드려 만든 것이며, 그 제작 시기는 기원전 2300년이라고 한다. 중국의 청동과(戈) 중에도 앞날에 운철을 붙인 것이 있다(위 사진). 운철은 하늘에서 온 것으로 신성시 되었던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철로 만든 머리 장식품은 이보다 앞선기원전 3000년경에 만든 것인데 이것도 운철로 밝혀졌다. 철기문화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판단에 과학자들의 연구가 충실하게 반영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석가탑에
다라니경을
넣은 것도
유성 때문일까?


1966년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수리할 때 탑신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속에 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이 담겨 있었다. 이 유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됐다.

다라니경은 정성을 다해 탑을 세우고 탑돌이를 하면 부처의 힘으로 온갖 천재지변, 전쟁, 질병 등이 없어진다는 내용을 담은 불경이다. 불국사는 25년이 걸려(751~776) 지은 신라 최대 걸작 사찰이다. 이 다라니경이 발견되면서 770년 경 제작된 일본 호류지(법륭사)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이 갖고 있던 ‘세계 최고(最古)’ 타이틀이 한국으로 넘어왔다. 신라인들이 불국사를 지으면서 석가탑에 다라니경을 넣은 뜻은 무엇일까?
 

 
나는 ‘삼국사기’를 통해 680년에서 880년까지 근 200년이 하나의 외계충격 현상기란 것을 밝혔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할 무렵 나타나기 시작한 유성 출현이 갈수록 잦아지고 추위로 농사를 망치는 때가 되풀이 됐다. 황룡사 9층탑에 벼락이 세 번이나 떨어졌다. 경덕왕은 불국사 창건, 석굴암 축조, 성덕대왕 신종 등 전에 없던 큰 공사를 벌였다. 도솔천의 제석에게 재난을 그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대역사였다.

이 건축물들은 신라 통일을 자축하는 기념물이 아니라 자연재난과 싸움의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외계충격 현상은 지구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만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일본에서도 각지에 국분사(國分寺)를 세워 부처님에게 진호(鎭護)를 비는 제도를 시행하고 총국분사인 동대사(東大寺)에 청동대불을 만들어 재난을 밀어내 주기를 기원했다. 백만탑다라니경도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리라.
 
[신라 경덕왕은 석가탑이 들어선 불국사를 창건하고 석굴암을 짓는 등 큰 공사를 많이 벌였다. 당시 유성 출현이 잦아지고 추위로 농사를 망치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부처에게 재난을 막아달라고 소원을 빌었다는 해석이 있다.]

발해는
정말
백두산 폭발로
망했을까


197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 현에서 헤이안 시대의 주거지를 발굴하던 중에 화산재가 발견됐다. 이를 분석한 결과 편서풍을 타고 날아 온 백두산 화산재로 판명됐다. 이를 근거로 한 일본 교수가 백두산 폭발로 반경 수백 킬로미터가 초토화 되었을 상황을 그리면서 발해의 급작스런 멸망을 이에 연결시켰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따른 발해 멸망설은 이로써 넓게 퍼졌지만, 이 설이 성립하려면 발해가 멸망하던 해(926년)에 백두산 화산 폭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없다. 전문가들이 이런 한계를 자주 지적했지만 사람들은 폼페이의 최후를 연상해서인지 이 설을 쉬이 버리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발해의 넓은 영토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신라 통일 전후에 시작된 외계충격 현상은 발해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추워진 날씨는 순수 농업국가인 신라와는 달리 유목, 수렵사회인 발해에서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모피가 특수를 누리게 된 것이다. 발해의 영토 안에는 여러 말갈 족속들이 있었고 그들이 수렵활동으로 모피를 조달했다. 발해의 지배층을 이룬 고구려 유민들은 모피를 당나라, 일본으로 수출하는 창구를 관리해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고 그 결과로 넓은 영토의 왕조가 될 수 있었다.

발해의 멸망은 오히려 이 시스템의 붕괴에서 찾는 것이 옳다. 880년경 외계충격 현상이 그치면서 모피 특수가 사라져 발해의 재정은 어려워졌다. 발해 사절단이 많은 모피를 가지고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 귀족들은 모피 옷을 여러 벌 입고 나와 더 이상 필요없다고 했다. 발해 사신은 장사치라는 비난도 생겼다. 때문에 발해 중앙정부의 말갈 족속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됐다. 이때 서쪽에서 다가온 거란족의 공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망했던 것이다.


[분홍빛 좀참꽃이 화려하게 핀 백두산 천지의 모습.]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우리나라를 침공해 오는 청나라 군대의 모습. 당시 동아시아는 기온이 내려가는 소빙기에 들어가면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전쟁과 내부 갈등이 많았다.]

소빙기
현상으로
과열된
사화와 당쟁


나의 외계충격 현상에 관한 연구는 전적으로 ‘조선왕조실록’ 덕분이었다. 17세기에 지구의 기온이 내려갔다는 이른바 소빙기 현상에 대한 서양 학자들의 학설을 처음 접했을 때였다. 나는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었다면 ‘조선왕조실록’이 확인해 줄 것이라고 믿고 17세기 초에 해당하는 왕들의 실록을 읽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는 서운관(書雲觀)이 관측한 천문 이상 현상, 그리고 각 지방관들이 올려 보낸 이상 현상들을 ‘실록’에 충실하게 남겼다. 중국에도 실록이 있었지만 충실도에서 조선에 미치지 못했다. 중국의 실록은 잦은 천재지변이 왕의 실덕으로 간주될 우려 때문에 생략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의 실록은 비공개였기 때문에 반영도가 아주 높았다.

사람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는 재이관은 천재지변이 그치지 않으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 마련이다. 자연 이상에 대한 책임론이 정쟁의 소재였다. 조선에서 16세기에 사화(士禍)가 빈발하다가 17세기에는 당쟁이 극심해지는 정치현상이 일어난 것은 그치지 않는 자연 이상과 재난 때문이었다. 서양 기독교에서도 천재지변에 시달리면서 하늘의 이상 현상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해 종교혁명이 일어났다. 또 실농과 폐농의 책임을 사탄의 사주를 받은 여자들에게 돌려 잔인한 마녀사냥이 일어났다. 소빙기 260년간의 장기 자연재난은 이처럼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쳐 사회 동요나 변혁을 가져왔다.




역사의 눈을 하늘에 두자

현대 학문은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체계를 세운 것이다. 21세기에는 우주과학이 크게 발달하고 지구가 속한 태양계의 실체가 새로 규명됐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인문학, 특히 인간의 삶의 자취를 다루는 역사학은 변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곧 역사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시선은 눈앞의 사람에만 머물지 않고 저 높은 하늘에도 두어야 그 소임을 다 할 것이다(관련 사진과 기록은 블로그 blog.naver.com/tjyi2323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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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에디터 김상연 | 글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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