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미국의 ‘생물안보를 위한 국가자문위원회(NSABB)’는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이례적인 요청을 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연구로 유명한 두 과학자의 최근 논문 중 일부를 삭제하고 출간해 달라는 것이다. 문제가 된 논문에는 조류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를 돌연변이시켜 족제비들 사이에서 공기전염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법이 적혀 있다. 이 연구에 미국이 이렇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팬데믹(전염병 대유행)’과 생물학테러 때문이다.
실험에서 사용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인 H5N1은 치명적인 고병원성 바이러스다. 지난달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두 명의 사망 환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전 세계 570여 명의 감염 환자 중 사망한 사람은 330여 명. 치사율이 60%에 이른다. 이렇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인간으로 확산되지 않은 것은 ‘종간장벽’ 덕분이다. 즉, 동물마다 다른 세포 특성 때문에 바이러스가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쉽게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는 이 장벽을 무너뜨렸다.
네덜란드 에라스뮈스 메디컬센터의 론 푸히르 교수와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 병원생물학과 요시히로 가와오카 교수는 각각 돌연변이 시킨 H5N1 바이러스를 만들어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족제비들의 목숨을 빼앗는 실험에 성공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이 바이러스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번 실험 결과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까닭은 족제비가 바로 인간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걸리는지 확인하기 위한 지표 동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족제비 사이에서 공기전염이 잘 일어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사람사이에서도 똑같이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두 연구자의 논문은 H5N1의 유전자 중 어느 위치에 돌연변이를 일으키면 공기전염이 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를 대중에게 전부 공개할 경우, 이론적으로는 전 세계의 분자생물학 실험실에서 이 ‘괴물 바이러스(변종 H5N1)’를 만들 수 있다.
[H5N1 바이러스가 정상세포를 파괴하고 있는 모습. 푸른색이 H5N1 바이러스, 붉은색이 정상세포다.]
‘‘괴물 바이러스’’,, 어떻게 만들었나
2009년 신종플루(H1N1)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을 때, 과학자들은 신종플루 바이러스와 H5N1 바이러스가 만나 유전정보가 뒤섞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독성은 약하지만 전염성이 높은 신종플루와 전염성은 낮지만 치명적인 H5N1이 합쳐질 경우, 높은 전염성과 치명적인 독성을 함께 갖는 괴물 바이러스가 탄생할 수 있기때문이다.
론 푸히르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이미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는 H5N1이 다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도움 없이도 높은 전염성을 새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이 바이러스가 ‘괴물’이 되는데는 두 개의 유전자 속에 일어난, 고작 다섯 개의 돌연변이만이 필요했다.
푸히르 교수는 먼저 H5N1 바이러스의 유전자에 3개의 돌연변이를 일으켰다. 조류의 세포를 숙주로 하는 H5N1이 포유류 세포에 침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돌연변이다. 푸히르 교수는 유전자의 3군데에 돌연변이가 생긴 바이러스를 족제비에게 접종했다. 족제비는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아직 다른 족제비에게 공기를 통한 전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자 족제비는 감염 증상이 나타나고 시름시름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 때 족제비의 체내에서 배양된 바이러스를 다시 채취해 또 다른 족제비에게 접종했다. 이 과정을 ‘계대배양’이라고 한다. 푸히르 교수는 이 과정을 10회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돌연변이가 일어난 H5N1 바이러스는 인접한 족제비들 사이에서 공기를 통해 전염됐다. 푸히르 교수는 족제비들에게서 다시 채취한 변종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분석해 본 결과, 기존 3개의 돌연변이 외에도 2개의 돌연변이가 추가적으로 일어난 사실을 발견했다. 영국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푸히르 교수는 “H5N1 바이러스가 공기 감염 능력을 얻는 데는 최소 다섯개의 돌연변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푸히르 교수는 바이러스 유전자의 정확히 어느 부위에 돌연변이를 시키면 되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푸히르 교수가 공개한 10회에 걸친 계대배양 방식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도 변종 H5N1 바이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적지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실험실에서 유출된다면 어떻게 되나
두 실험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변종 H5N1 바이러스가 실험실 밖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 1918~1919년 전 세계에서 창궐한 스페인독감(H1N1)은 당시 세계인구의 30%인 5억명을 감염시키고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 악명 높은 스페인독감의 치사율이 10%다. H5N1의 치사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60%.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치명적인 독성에다 높은 전염성까지 더해진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실험실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있다.
이런 걱정을 단순히 기우라고만 볼 순 없다. 이미 창궐했던 몇몇 바이러스가 사실은 실험실에서 유출된 것일지 모른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
1977년 봄 중국과 러시아에서 유행한 ‘러시아 독감(H1N1)’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러시아 독감은 유독 어린아이들과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만 유행했다. 1950년 이전에 출생한 당시의 어른들은 잘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연구 결과, 1977년에 유행한 러시아독감 바이러스와 27년 전인 1950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거의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0년 독감에 한번 걸렸던 어른들은 1977년 러시아독감이 유행했을 때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27년이란 긴 간격을 두고도 너무나 똑같은 모습으로 재등장한 이 바이러스를 두고 중국과 러시아의 실험실에서 보관 중이던 바이러스가 유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됐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이가 심한 것으로 유명할 뿐더러, 1977년에 유행한 러시아독감 바이러스가 출처가 불분명한 채로 홀연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 정부는 이 의혹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인한 상태다.
변종 바이러스가 있는 두 연구자 실험실 보안수준은 최고등급에서 ‘반 계단’ 부족한 ‘생물안전도 3등급+’다. 생물 안전도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병원체의 위해성 정도에 따라 적정 단계의 연구시설에서 취급하도록 정한 기준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두 실험실의 보안 수준이 최고등급인 4등급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3등급+의 시설에서 감당하기엔 변종 바이러스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를 만든 푸히르 교수도 변종 H5N1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푸히르 교수는 H5N1에 대한 치료제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 사용하는 실험실의 안전도 등급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감염될 경우 치명적이지만 치료제가 있는 병원체는 생물안전도 3등급 시설에서도 관리할 수 있다(박스기사 참고).
[에라스뮈스 메디컬센터의 론 푸히르 교수.]
높은 생물안전도 등급의 시설과 기준이 바이러스 유출 사고를 막기 위해서 꼭 필요한 방책인 건 맞지만, 절대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지난 10년간 중국과 태국, 싱가포르의 생물안전도 3등급, 4등급의 시설에서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에 연구원들이 감염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위험천만한 변종 바이러스, 왜 만들었나
이렇게 위험한 연구를 굳이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적으로도 이런 괴물 바이러스가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오리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돼 처음으로 죽는 사건이 국내에서 발생했다. 오리는 이전까지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될 수는 있어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바이러스는 계절 철새의 몸속에서 살지만 증상을 일으키지 않는데, 집오리의 근원이 바로 계절 철새인 철새오리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오리에게 감염증상을 일으키도록 변한 것이다.
론 푸히르 교수는 변종 바이러스가 갖고 있는 다섯 개의 돌연변이가 개별적으로는 자연계에 모두 존재하는 흔한 돌연변이라고 지적했다. 독립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돌연변이라면 한 곳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실험실이 아닌 자연에서도 변종 바이러스가 언제든 탄생해 인간을 위협할 수 있다는 뜻이다.
RNA 바이러스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DNA 바이러스와 달리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특히 잘 일어난다. 유전자 복제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DNA 바이러스인 천연두 바이러스는 한 종류의 백신으로 퇴치가 가능했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해마다 백신 주사를 다시 맞아야 하는 이유다.
김우주 교수는 이번 연구가 “훗날 창궐할 가능성이 있는 매우 위험한 바이러스에 대비해 치료제와 백신을 한 발 앞서 개발하는 데 꼭 필요한 초석”이라고 말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하게 될 지를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이러한 연구 자체를 막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전부 공개해도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생물학 테러의 위험성 때문이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에서는 편지로 배달된 탄저균 테러로 5명이 숨지고 17명이 감염됐다.
‘생물안보를 위한 국가자문위원회(NSABB)’가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논문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을 보낸 까닭도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위원회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연구 결과를 정말 공익 목적으로 사용할 학자들에게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학자와 테러리스트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현재로서는 없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는 이 기준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정확한 지침을 내려주기전까지 결정을 보류하고 있다.
어떻게 치료하고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
만에 하나 실험실에서 변종 바이러스가 탈출해 세계적으로 창궐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감염되었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일은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신종플루 치료제로 이름을 먼저 알린 타미플루와 리렌자 등이 바로 항바이러스제다. 유전정보 중 일부가 바뀐 변종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기존의 항바이러스제가 100% 효과를 발휘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항바이러스제(뉴라미니다아제 억제제)는 H5N1이 속한 인플루엔자 A와 인플루엔자 B 모두에 치료효과가 있었다.
아직 감염되지 않았다면 백신을 맞아야 한다. H5N1 백신은 이미 존재한다. 단, 새로운 변이에 맞게 백신을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비태세는 어떠할까. 우리나라전국 보건소는 100회 주사분량의 항바이러스제를 보관 중이다.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의 감염이 의심되면 언제든지 보건소를 찾아가 처방 받을 수 있다. 보건소 외에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항바이러스제의 양은 총 1300만 회 분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26%가 접종할 수 있다. H5N1 백신은 2008년부터 우리나라 녹십자에서 자체개발 중이다. 늦어도 2014년까지는 이 백신을 상용화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