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나



스티브 잡스는 동거하던 대학원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혼모였던 친어머니는 아이를 양육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입양을 결심했다. 양부모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 폴 잡스는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해군에 입대해서 정비병이 됐고, 제대 후에는 기계공으로 일했다. 잡스 부부
는 결혼한 뒤 10년 동안 아이가 없자 입양을 결정했다.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말썽쟁이였지만, 양부모는 첫 번째 자식으로 맞이한 스티브를 성심성의껏 보살폈다. 클라라 잡스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잡스를 수영강습에 등록시키기 위해 베이비시터로 일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자신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대학등록금으로 썼다. 결국 스티브잡스는 부모님이 자신을 위해 전 재산을 썼다는 사실에 자책감을 느끼고 대학을 중퇴하고 말았다.

애플을 창업하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의 도움이 있었다. 애플의 창업이 차고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런데 그 차고는 원래 비어 있던 공간이 아니라 아버지가 부업으로 자동차를 수리해서 판매하는 작업공간이었다. 스티브잡스의 부탁에 아버지는 그 공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작업에 몰두하느라 차고와 집은 쓰레기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이를 청소해준 사람은 바로 스티브 잡스의 어머니였다. 수술을 받아서 몸이 피곤한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스스로 비서가 돼 전화를 받고 손님을 대접했다. 잡스와 워즈니악이 서로 격하게 논쟁을 펼칠 때면 으레 아버지가 둘 사이에 끼어서 중재를 했다. 아버지는 컴퓨터를 시험하는 장치를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입양아 출신인 스티브 잡스가 세계적인 기업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같은 양부모의 사랑과 지원이 있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어른이 된 뒤 누군가 스티브 잡스의 부모를 양부모라고 부르면 즉시 부모로 수정을 요구할 정도였다.

협상의 달인, 잡스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타고난 황금배짱을 자랑했다.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원하는 부품을 구하기 위해서 HP(휴렛팩커드)의 창업자인 빌 휴렛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부품을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휴렛과 아무 안면도 없었지만 잡스는 20분이나 되는 끈질긴 통화 끝에 원하는 부품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HP에서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얻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설득해 집안 전체가 이사하게 만든 적도 있다. 대학을 다닐 때는 학비와 기숙사비는 내지도 않고 학교 수업을 마음대로 듣거나 무료로 음식을 얻어먹는 일도 다반사였다. 해변으로 여행을 가고 싶을 때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탔고, 멕시코로 떠날 때는 공항에서 개인용 경비행기 조종사를 꾀어서 비행기를 얻어 탔다.

이처럼 잡스는 몇 마디 말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는 게임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이 무작정 게임회사인 아타리를 찾아가서 취직을 시켜달라고 생떼를 부렸다. 아타리는 잡스를 경찰에 신고할 생각까지 했지만, 열의에 감동해서 결국 일자리를 줬다.

잡스는 이런 배짱으로 사업을 하면서 협상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잡스와 같이 애플을 창업할 생각이 없었고 HP라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잡스는 워즈니악의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 워즈니악이 회사를 그만두고 애플에 전념하도록 만들어 놓는다.



[1987년 출시된 맥킨토시SE와 2009년 나온 아이맥. 20여 년의 세월 동안 발전한 모습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튠즈 스토어는 음악과 오디오북, 동영상 등을 판매하는 온라인 미디어 판매 서비스다. 불법 복제가 횡행하던 음원 유통 시장의 구조를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애플 컴퓨터를 판매할 때 역시 잡스의 협상력이 빛을 발했다. 컴퓨터 매장을 운영하던 폴 테럴에게 접근해서 첫 주문을 받았고, 돈이 없자 파격적인 외상거래로 부품을 공급받았다. 사업자금이 부족하자 벤처투자자인 돈 밸런타인을 찾아갔지만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잡스는 돈 밸런타인을 지겹게 쫓아다닌 끝에 마이크 마큘라라는 백만장자를 소개받았다. 마이크 마큘라는 가정과 학교에 컴퓨터가 놓이는 세상이 올 거라고 열심히 설득하는 스티브 잡스의 열정에 넘어가서 애플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를 인수할 때는 조지 루카스가 3000만 달러를 먼저 제시했지만 잡스는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단돈 500만 달러에 인수하는 성과를 거뒀다.

잡스의 전설적인 협상력은 아이튠즈 뮤직스토어를 서비스할 때 다시 빛을 발했다. 당시 인터넷 불법복제로 직격탄을 맞고 있던 음반사들은 IT 기업들을 적대시했다. 잡스가 MP3 파일을 판매할 계획을 세우자 음반사들은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잡스는 자기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애플은 불법 복제를 막을 대안을 가진 회사임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음반사들은 독자적인 서비스를 실행했다. 잡스는 음반사의 노력이 실패할 거라고 단언하면서도 음반사들의 신뢰감을 쌓기 위해서 노력했다. 결국 음반사들은 실패를 겪고 다시 애플에 눈을 돌렸다. 스티브 잡스는 불법 복제는 합리적인 인터넷 서비스가 없기 때문에 생긴다며 애플과 협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잡스가 처음부터 모든 협상에 참가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지지부진한 협상도 스티브 잡스가 나서면 바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잡스는 소위 ‘현실 왜곡의 장’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다. 세상의 그 어떤 진실이라도 스티브 잡스의 말을 듣다보면 현실이 왜곡돼 보인다는 소리다. 식당에서 잡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잡스가 여기는 식당이 아니라 주차장이라고 말하면 왠지 주차장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잡스를 비꼬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지만 지금은 잡스의 뛰어난 설득력을 표현하는 말이 됐다.

협상에 나선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낸 현실 왜곡의 장을 경험하고는 잡스의 열렬한 팬이 되곤 했다. 경쟁사였던 소니뮤직의 CEO인 앤드루 랙마저도 잡스를 보고는 즉시 애플과 협력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잡스는 세계 5대 음반사인 유니버셜, 소니, EMI, BMG, 워너뮤직을 한곳에 모아서 역사적인 뮤직스토어를 시작했고, 7년 만에 100억 곡이나 판매하는 등 음악 산업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애플Ⅰ을 만들었을 당시의 잡스(오른쪽)와 스티브 워즈니악.]

실패를 통한 성장

잡스의 위대함은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게 아니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결국 성공했다는 데 있다. 애플의 첫 번째 제품인 애플Ⅰ은 150대밖에 팔리지 않았다. 잡스는 애플Ⅰ의 실패를 보면서 교훈을 얻었다. 전문가를 상대로 컴퓨터를 팔아봐야 살 사람은 적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잡스는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잡스는 보통 사람들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백화점을 찾아갔다. 가전제품인 믹서기를 보면서 문득 잡스는 일반인에게 친숙한 플라스틱을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컴퓨터는 연구실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시대였지만, 애플Ⅱ는 가전제품처럼 플라스틱을 써 가정의 책상과 침실에 친숙한 제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애플Ⅱ의 성공 이후 컴퓨터 업계에서 플라스틱 케이스는 표준이 됐다.

실패를 극복한 사례로는 리사와 매킨토시도 있다. 애플은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를 쓴 리사를 먼저 발매했다. 하지만 리사는 9995달러로 터무니없이 비쌌고, 응용 소프트웨어도 부족했다. 잡스는 매킨토시를 개발하면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채용한 합리적인 가격의 컴퓨터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접 부품 제조사를 찾아가 가격을 낮추기 위한 협상을 직접 벌이기도 했다. 모토로라의 CPU는 9달러에 공급받았는데, 이는 당초 모토로라가 제시한 금액의 4분의 1이었다. 덕분에 매킨토시는 리사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인 2500달러에 나왔다. 또한 잡스는 소프트웨어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나 로터스 같은 업체를 직접 찾아가 매킨토시용 소프트웨어를 발매하게 했다.

합리적인 가격과 소프트웨어 덕분에 잡스는 리사의 실패를 극복하고 매킨토시로 컴퓨터를 재발명했다는 극찬까지 들었다. 잡스의 인생은 실패와 성공의 반복이었다. 잡스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 난 실패자라는 낙인까지 찍혔었다. 하지만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메이션 영화인 ‘토이 스토리’를 성공시켰고, 결국 애플에 돌아와서 회사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때 잡스는 매우 소중한 교훈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만약 애플에서 해고 되지 않았더라면 애플을 부활시킬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실패가 약이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실패마저도 삶의 양식으로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의 잡스가 애플의 상징인 사과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부정적인 인식과 싸우다

스티브 잡스의 삶을 되돌아보면 매우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애플로 개인용 컴퓨터 혁명을 일으켰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워즈니악 조차도 자기가 만든 컴퓨터로 사업을 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사실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은 그가 다니던 회사인 HP에 우선권이 있었지만, HP조차도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잡스가 아내 로렌과 함께한 1997년의 모습.]

매킨토시 역시 애플 사내에서는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던 프로젝트다. 개발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고, 잡스는 회사와 불화에 시달려야 했다. 매킨토시가 시장에 나온 뒤에도 찬반양론이 펼쳐졌다. 매킨토시는 손이 세 개 필요한 컴퓨터라면서 마우스를 채택한 매킨토시를 비난하는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매킨토시는 컴퓨터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도산위기에 처했던 애플을 부활시킨 아이맥을 개발할 때도 잡스는 그런 부정적인 의견에 맞서 싸웠다. 잡스는 플로피디스크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 뺐는데, 플로피디스크가 없다는 이유로 집중포화를 맞았다. 하지만 아이맥은 큰 성공을 거뒀고 플로피디스크도 역사 속으로 함께 사라졌다.

음악 산업을 뿌리부터 뒤흔든 아이팟에는 그 어떤 제품보다도 과격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와이어드’지 기자인 루카스 하우저는 ‘아이팟을 부수자’라는 칼럼에서 잡스를 혹독하게 비판했고, ‘IPOD’이라는 제품명에 빗대어 ‘나는 디스크를 갖는 게 더 좋아(I Prefer Owing Discs)’, ‘멍청이가 우리의 기기에 가격을 매겼다(Idiots Price Our Devices)’, ‘나는 다른 기기가 더 좋다(I Prefer Other Device)’ 등 아이팟을 비웃는 글들이 인터넷을 휩쓸었다.

잡스의 가장 최신 작품인 아이패드도 마찬가지였다. 닌텐도의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는 아이팟 터치가 더 커졌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했고, 구글의 CEO였던 에릭 슈미츠는 큰 전화와 태블릿의 차이를 알려달라면서 아이패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각종 언론에서도 아이패드는 기존에 나왔던 태블릿PC처럼 실패할 거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발매된 지 8개월만에 8000만 대라는 전자기기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렸다. 잡스가 혁명적인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이렇게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던 것은 사람이 보수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보기 때문에 정말 세상을 바꿀 정도의 좋은 아이디어를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다. 결국 잡스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애플의 역사 애플은 1976년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로날드 웨인이 함께 설립했다. 첫 제품인 애플Ⅰ을 시작으로 마우스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지닌 맥킨토시, 초창기 PDA인 뉴턴을 거쳐 현재는 아이팟과 아이패드, 아이맥 등을 판매하고 있다. 신제품을 소개하는 애플의 제품발표회는 늘 화제가 되곤 한다.]

결혼이 바꾼 성격

스티브 잡스 인생 최대의 오점은 결혼 전에 낳은 딸인 리사를 외면했다는 점이다. 잡스는 자신이 입양아이면서도 여자친구인 크리스 앤과 자신의 아이인 리사를 모른 척했다는 이유로 인격적으로 실패한 인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잡스는 로렌 파웰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잡스는 1989년 스탠퍼드대에서 강연을 하다가 로렌 파웰을 처음 만났다. 한눈에 반해버린 그는 로렌파웰에 다가가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리고 미리 잡힌 약속을 위해 차를 타고 떠나려다가 문득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밤이라면 과연 회의나 하면서 보낼 것인가’ 고민한 끝에 약속을 취소하고 로렌 파웰에게 달려가서 데이트를 신청한다. 잡스는 로렌과 사랑에 빠졌다.

로렌 파웰이 임신을 하면서 둘 사이에 위기가 생긴 적도있다. 로렌은 결혼을 원했지만 잡스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로렌 파웰이 집을 나가 버리기까지 했다.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결국 로렌 파웰과 결혼했다. 1991년 3월 스티브 잡스는 화려했던 여성편력을 뒤로 하고 유부남이 됐다.

인텔의 CEO였던 앤디 그로브는 2009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1.0과 애플에 돌아와서 애플을 부활시킨 스티브 잡스2.0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필자는 스티브 잡스를 논할 때 리사를 외면했던 총각 시절의 스티브 잡스1.0과 로렌과 결혼한 이후의 스티브 잡스2.0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결혼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양아버지가 그랬듯이 가족을 생각하는 사람이 됐던 것이다. 한때 외면 했던 리사를 데려왔고 자식 교육을 위해 집도 옮겼다.

잡스는 훗날 결혼이 자신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고, 로렌과 결혼한 건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결혼 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안정적인 가정을 꾸민 스티브 잡스는 인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기업가로서도 훨씬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독불장군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자애로운 후원자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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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정남, 에디터 고호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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