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신화에는 기괴하게 생긴 괴물들이 나온다.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를 비롯해 커다란 눈이 얼굴 가운데 박힌 거인족 키클로페스,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뱀인 메두사. 이들은 물론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 상상이 그냥 머릿속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외토픽을 보면 머리가 둘 달린 뱀이 나타나고 다섯 번째 다리가 옆구리에 붙은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기형 생물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괴물의 모습을 창조해내지 않았을까.
생물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초파리도 마찬가지다. 날개가 두 장이 아니라 네 장이 달린 녀석이 있는가 하면 더듬이가 나와야 할 자리에 다리가 자라는 돌연변이도 있다. 날개나 더듬이가 비정상적인 형태로 자란다면 차라리 발생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이처럼 완벽한 기관이 다만 엉뚱한 자리에서 생기는 현상에 과학자들은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스위스 바젤대 생명과학센터의 발터 게링 교수가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나는 기괴한 초파리를 붙잡고 늘어져 그 원인을 끝까지 파헤친 결과 돌연변이가 일어난 유전자를 찾았다. 게다가 수정란에서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련의 유전자가 갖는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바로 호메오박스(homeobox)다.
.jpg)
[A repetitive DNA sequence has been identifi ed in the Drosophila melanogaster genome that appears to be localized specifi cally within genes of the bithorax and Antennapedia complexes that are required for correct segmental development. 초파리의 게놈에서 확인된 반복적인 DNA 서열은 정확한 체절발생에 필요한 바이소락스 복합체와 안테나페디아 복합체(합쳐서 호메오유전자라고 부른다)의 유전자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다리 달린 초파리
193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게링 교수는 취리히대의 저명한 동물학자 에른스트 하돈 교수의 제자로 연구자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는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발견으로 유전자의 실체가 밝혀진 지 10여 년이 지난 때라 돌연변이체를 연구해 염색체에서 그 원인이 되는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구가 한창이었다.
1964년 어느 날 하돈 교수의 비서가 그에게 연구주제라며 특이한 초파리를 건네줬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 연구에 20년을 바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연구한 돌연변이체가 바로 더듬이가 날 자리에 다리가 달려 있는 초파리였다.
이 전에도 이렇게 생긴 돌연변이체가 알려져 있었고 ‘안테나페디아(antennaped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즉 더듬이(antenna) 자리에 발(pedia)이 달려 있다는 의미다. 그는 여러 차례 교배실험과 염색체 관찰을 통해 염색체 상에서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는 위치를 규명했다.
.jpg)
[호메오돌연변이체는 정상적인 기관이 몸의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인 안테나페디아(오른쪽)는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달려 있다. 왼쪽은 정상 초파리.]
안테나페디아뿐 아니라 멀쩡한 기관이 엉뚱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다른 돌연
변이체도 염색체의 특정 위치에 변이가 생긴 결과임이 알려져 있었다. 연구자들
은 이런 변이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호메오유전자(homeotic gene)라고 불렀다.
호메오란 그리스어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안테나페디아는 우성돌연변이다. 즉 염색체 한 쌍 가운데 하나의 유전자에만
돌연변이가 있어도 변이체가 나타난다. 게링 박사는 안테나페디아가 단백질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이 유전자가 발현하는 패턴
에 문제가 있다고 추측했다. 즉 정상 개체에서는 발현되지 않을 머리에서 발현
된 결과 다리가 생겼다는 것.
따라서 게링 박사는 이 유전자가 아마도 조절 유전자(전사인자라고 부른다),
즉 다리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활성화시키는 유전자일 것이라고 추
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선견지명이지만 당시로서는 추측에 불과했고
주위 연구자들은 오히려 생체촉매인 효소의 유전자라고 생각했다.


당시 분석방법으로는 해당 유전자의 실체를 밝혀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가 더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DNA를 분자수준에서 조작할 수 있는 분자 생물학 기술이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게링 박사는 최신 학문을 배우기 위해 미국 예일대로 떠났다.
미국에서 첨단 기법을 습득한 그는 1972년 스위스 바젤대 생명과학센터에 교수로 부임해 돌연변이 초파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재개했다. 그 사이 초파리의 호메오유전자를 연구하는 다른 실험실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어서 게링 박사팀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침내 1983년 게링 박사팀은 안테나페디아 유전자 사냥에 성공했다. 예상대로 안테나페디아는 효소가 아니라 전사인자를 지정하는 유전자였다. 그런데 유전자를 찾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안테나페디아의 cDNA 의 일부가 게놈에서 안테나페디아유전자가 있는 위치 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도 달라붙었던 것. 즉 안테나페디아유전자의 특정 영역과 DNA 염기서열이 아주 비슷한 다른 유전자가 있음을 시사하는 발견이었다.
놀랍게도 cDNA 조각이 달라붙은 이들 다른 유전자 역시 호메오유전자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호메오유전자의 어떤 부분의 염기서열이 서로 비슷한 걸까. 이때 게링 교수팀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온 윌리엄 맥기니스 박사가 실험에 뛰어 들었고 마침내 해답을 알아냈다.
즉 호메오유전자 사이에 DNA 염기 180개로 이뤄진 부분의 염기서열(아미노산 60개를 지정)이 서로 매우 비슷하다는 게 밝혀졌다. 게링 박사는 이 부분을 ‘호메오박스(homeobox)’라고 명명했다. 그뒤 호메오단백질(전사인자)에서 표적이 되는 유전자의 DNA에 달라붙는 부분이 바로 호메오박스가 지정하는 호메오영역(homeo domain)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발견을 다룬 논문은 1984년 3월 29일자 ‘네이처’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즉 네이처의 편집자들은 호메오박스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 든다며 ‘호메오서열(homeotic sequence)’로 바꾸라고 알려왔던 것.
결국 용어를 바꿔 논문을 다시 제출했는데 실수로 논문 말미에 호메오박스 단어가 하나 남아 있었다. 편집진은 그걸 보지 못한 채 출간했고 그 결과 호메오박스라는 용어는 살아남았다.

초파리와 사람, 아미노산 하나 차이
호메오박스의 발견은 단순히 초파리 발생과정의 비밀 하나를 풀었다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당시 생명과학센터에는 개구리의 발생과정을 연구하는 에디 드 로버티스 교수가 있었는데 게링 교수는 드 로버티스 교수와 호메오유전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혹시 개구리에도 호메오유전자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무척추동물(초파리)과 척추동물(개구리)이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게 무려 6억 70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이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개구리에서도 호메오유전자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포유류인 생쥐는?
실험 결과 역시 호메오유전자가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사람이다. 게링 교수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이런 식으로 동물과 사람을 연결하는 연구는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그런데 마침 호메오박스를 찾는 데 일조한 마이클 리바인 박사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로 부임해 가자 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사람에서도 호메오유전자가 발견됐다. 결국 호메오유전자는 초파리에서 사람까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였던 것이다.
초파리의 경우 호메오유전자 8개가 한 묶음으로 3번 염색체의 한 부분에 나란히 존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초파리의 발생과정에서 이들 유전자가 발현되는 위치가 염색체 상에서의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 예를 들어 배아에서 안테나페디아가 발현되는 부분은 날개와 가운데 다리가 달려있는 두 번체 가슴체절이 되고 게놈에서 바로 옆에 있는 유전자인 울트라바이소락스(Ultrabithorax)는 역시 배아에서도 바로 뒤에서 발현돼 세 번째 가슴체절을 형성한다. 그러나 왜 이런 일치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뒤 안테나페디아단백질과 울트라바이소락스단백질은 서로 상대의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날개가 넷 달린 돌연변이 초파리는 바로 울트라바이소락스 유전자가 고장나 안테나페디아가 자리를 넘어 발현된 결과였던 것. 즉 두 번째 가슴체절이 중복된 형태다.
이런 패턴은 척추동물의 호메오유전자 묶음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오랜 진화과정에서도 잘 보존된 셈이다. 특히 묶음에서 같은 위치에 있는 호메오유전자의 호메오박스 서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안테나페디아 호메오박스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단백질의 호메오박스는 아미노산 60개 가운데 60번째 아미노산 하나만 다르다!(초파리는 아스파라긴, 사람은 히스티딘).
1996년 미국 인디아나대 토머스 카우프먼 교수팀(1984년 거의 동시에 호메오박스를 발견했다)은 라비얼(labial)이라는 호메오유전자가 고장난 돌연변이 초파리에 이 유전자에 해당하는 닭의 호메오유전자를 집어넣어 정상 개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링 교수는 1998년 출간한 호메오박스의 발견 이야기를 담은 책 ‘발생과 진화에서 주인 조절 유전자’(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호메오유전자를 ‘주인(master)’에 비유했다)에서 “몸의 설계를 맡은 호메오유전자는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치명적이지만 때때로 더 나은 형태가 나타나 진화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쓰고 있다. 호메오박스의 발견 역시 생명 과학의 진화(발전)에 새로운 길을 연 게 아닐까.
생물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초파리도 마찬가지다. 날개가 두 장이 아니라 네 장이 달린 녀석이 있는가 하면 더듬이가 나와야 할 자리에 다리가 자라는 돌연변이도 있다. 날개나 더듬이가 비정상적인 형태로 자란다면 차라리 발생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이처럼 완벽한 기관이 다만 엉뚱한 자리에서 생기는 현상에 과학자들은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스위스 바젤대 생명과학센터의 발터 게링 교수가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그는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나는 기괴한 초파리를 붙잡고 늘어져 그 원인을 끝까지 파헤친 결과 돌연변이가 일어난 유전자를 찾았다. 게다가 수정란에서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련의 유전자가 갖는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바로 호메오박스(homeobox)다.
.jpg)
[A repetitive DNA sequence has been identifi ed in the Drosophila melanogaster genome that appears to be localized specifi cally within genes of the bithorax and Antennapedia complexes that are required for correct segmental development. 초파리의 게놈에서 확인된 반복적인 DNA 서열은 정확한 체절발생에 필요한 바이소락스 복합체와 안테나페디아 복합체(합쳐서 호메오유전자라고 부른다)의 유전자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다리 달린 초파리
193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게링 교수는 취리히대의 저명한 동물학자 에른스트 하돈 교수의 제자로 연구자의 삶을 시작했다. 당시는 1953년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발견으로 유전자의 실체가 밝혀진 지 10여 년이 지난 때라 돌연변이체를 연구해 염색체에서 그 원인이 되는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구가 한창이었다.
1964년 어느 날 하돈 교수의 비서가 그에게 연구주제라며 특이한 초파리를 건네줬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 연구에 20년을 바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연구한 돌연변이체가 바로 더듬이가 날 자리에 다리가 달려 있는 초파리였다.
이 전에도 이렇게 생긴 돌연변이체가 알려져 있었고 ‘안테나페디아(antennaped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즉 더듬이(antenna) 자리에 발(pedia)이 달려 있다는 의미다. 그는 여러 차례 교배실험과 염색체 관찰을 통해 염색체 상에서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는 위치를 규명했다.
.jpg)
[호메오돌연변이체는 정상적인 기관이 몸의 엉뚱한 곳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인 안테나페디아(오른쪽)는 더듬이 자리에 다리가 달려 있다. 왼쪽은 정상 초파리.]
안테나페디아뿐 아니라 멀쩡한 기관이 엉뚱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다른 돌연
변이체도 염색체의 특정 위치에 변이가 생긴 결과임이 알려져 있었다. 연구자들
은 이런 변이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호메오유전자(homeotic gene)라고 불렀다.
호메오란 그리스어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안테나페디아는 우성돌연변이다. 즉 염색체 한 쌍 가운데 하나의 유전자에만
돌연변이가 있어도 변이체가 나타난다. 게링 박사는 안테나페디아가 단백질의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이 유전자가 발현하는 패턴
에 문제가 있다고 추측했다. 즉 정상 개체에서는 발현되지 않을 머리에서 발현
된 결과 다리가 생겼다는 것.
따라서 게링 박사는 이 유전자가 아마도 조절 유전자(전사인자라고 부른다),
즉 다리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활성화시키는 유전자일 것이라고 추
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선견지명이지만 당시로서는 추측에 불과했고
주위 연구자들은 오히려 생체촉매인 효소의 유전자라고 생각했다.


당시 분석방법으로는 해당 유전자의 실체를 밝혀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연구가 더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DNA를 분자수준에서 조작할 수 있는 분자 생물학 기술이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게링 박사는 최신 학문을 배우기 위해 미국 예일대로 떠났다.
미국에서 첨단 기법을 습득한 그는 1972년 스위스 바젤대 생명과학센터에 교수로 부임해 돌연변이 초파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재개했다. 그 사이 초파리의 호메오유전자를 연구하는 다른 실험실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어서 게링 박사팀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침내 1983년 게링 박사팀은 안테나페디아 유전자 사냥에 성공했다. 예상대로 안테나페디아는 효소가 아니라 전사인자를 지정하는 유전자였다. 그런데 유전자를 찾는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안테나페디아의 cDNA 의 일부가 게놈에서 안테나페디아유전자가 있는 위치 뿐 아니라 다른 부분에도 달라붙었던 것. 즉 안테나페디아유전자의 특정 영역과 DNA 염기서열이 아주 비슷한 다른 유전자가 있음을 시사하는 발견이었다.
놀랍게도 cDNA 조각이 달라붙은 이들 다른 유전자 역시 호메오유전자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호메오유전자의 어떤 부분의 염기서열이 서로 비슷한 걸까. 이때 게링 교수팀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온 윌리엄 맥기니스 박사가 실험에 뛰어 들었고 마침내 해답을 알아냈다.
즉 호메오유전자 사이에 DNA 염기 180개로 이뤄진 부분의 염기서열(아미노산 60개를 지정)이 서로 매우 비슷하다는 게 밝혀졌다. 게링 박사는 이 부분을 ‘호메오박스(homeobox)’라고 명명했다. 그뒤 호메오단백질(전사인자)에서 표적이 되는 유전자의 DNA에 달라붙는 부분이 바로 호메오박스가 지정하는 호메오영역(homeo domain)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발견을 다룬 논문은 1984년 3월 29일자 ‘네이처’에 실렸는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즉 네이처의 편집자들은 호메오박스라는 용어가 마음에 안 든다며 ‘호메오서열(homeotic sequence)’로 바꾸라고 알려왔던 것.
결국 용어를 바꿔 논문을 다시 제출했는데 실수로 논문 말미에 호메오박스 단어가 하나 남아 있었다. 편집진은 그걸 보지 못한 채 출간했고 그 결과 호메오박스라는 용어는 살아남았다.

초파리와 사람, 아미노산 하나 차이
호메오박스의 발견은 단순히 초파리 발생과정의 비밀 하나를 풀었다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당시 생명과학센터에는 개구리의 발생과정을 연구하는 에디 드 로버티스 교수가 있었는데 게링 교수는 드 로버티스 교수와 호메오유전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혹시 개구리에도 호메오유전자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무척추동물(초파리)과 척추동물(개구리)이 공통조상에서 갈라진 게 무려 6억 70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이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 거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개구리에서도 호메오유전자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포유류인 생쥐는?
실험 결과 역시 호메오유전자가 나왔다. 이제 남은 건 사람이다. 게링 교수는 사람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당시 유럽에서 이런 식으로 동물과 사람을 연결하는 연구는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많았다.
그런데 마침 호메오박스를 찾는 데 일조한 마이클 리바인 박사가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로 부임해 가자 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사람에서도 호메오유전자가 발견됐다. 결국 호메오유전자는 초파리에서 사람까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발생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였던 것이다.
초파리의 경우 호메오유전자 8개가 한 묶음으로 3번 염색체의 한 부분에 나란히 존재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초파리의 발생과정에서 이들 유전자가 발현되는 위치가 염색체 상에서의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 예를 들어 배아에서 안테나페디아가 발현되는 부분은 날개와 가운데 다리가 달려있는 두 번체 가슴체절이 되고 게놈에서 바로 옆에 있는 유전자인 울트라바이소락스(Ultrabithorax)는 역시 배아에서도 바로 뒤에서 발현돼 세 번째 가슴체절을 형성한다. 그러나 왜 이런 일치가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뒤 안테나페디아단백질과 울트라바이소락스단백질은 서로 상대의 유전자 발현을 억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날개가 넷 달린 돌연변이 초파리는 바로 울트라바이소락스 유전자가 고장나 안테나페디아가 자리를 넘어 발현된 결과였던 것. 즉 두 번째 가슴체절이 중복된 형태다.
이런 패턴은 척추동물의 호메오유전자 묶음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오랜 진화과정에서도 잘 보존된 셈이다. 특히 묶음에서 같은 위치에 있는 호메오유전자의 호메오박스 서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파리의 안테나페디아 호메오박스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의 단백질의 호메오박스는 아미노산 60개 가운데 60번째 아미노산 하나만 다르다!(초파리는 아스파라긴, 사람은 히스티딘).
1996년 미국 인디아나대 토머스 카우프먼 교수팀(1984년 거의 동시에 호메오박스를 발견했다)은 라비얼(labial)이라는 호메오유전자가 고장난 돌연변이 초파리에 이 유전자에 해당하는 닭의 호메오유전자를 집어넣어 정상 개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링 교수는 1998년 출간한 호메오박스의 발견 이야기를 담은 책 ‘발생과 진화에서 주인 조절 유전자’(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호메오유전자를 ‘주인(master)’에 비유했다)에서 “몸의 설계를 맡은 호메오유전자는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치명적이지만 때때로 더 나은 형태가 나타나 진화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쓰고 있다. 호메오박스의 발견 역시 생명 과학의 진화(발전)에 새로운 길을 연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