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미국 심장학회에서는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 나노’와 연결된 헤드폰이 심장박동기에 오작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007년 7월 인공심장박동기를 비롯한 10개 품목에 전자파내성(EMS) 시험을 의무화하기 시작했고 올해 1월에는 위험도가 낮은 일부 의료기기를 제외한 전 제품으로 전자파내성 시험을 확대했다. 전자파의 영향으로 심장박동기 같은 의료기기가 고장이 날 경우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나 중환자실에서 휴대전화 사용하면 위험하다?
1967년 7월 29일, 베트남 전쟁 중 승무원 5000여 명을 태운 8만t급 미국의 항공모함 ‘포레스탈’은 ‘양키 스테이션’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북쪽의 해안지대를 공격하기 위해 통킹 만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역시간으로 오전 10시 52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전투기 ‘F-4 팬텀’에 장착돼 있던 대지 공격용 미사일이 저절로 발사됐다.
미사일은 앞에 대기하고 있던 전투기 ‘A-4 스카이호크’에 명중했고, 여기서 흘러나온 항공유로 갑판은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이 사고로 131명이 사망했고 16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사 결과 항공모함의 레이더에서 발생한 전자파가 미사일 오발을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
전자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주기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며 빛의 속도(초속 30만km)로 퍼져 나가는 전자기 에너지다. 전기장과 자기장은 서로 수직을 이루며 파동을 만드는데, 시간에 따라 진동하는 전기장이 자기장을 유도하면 반대로 자기장은 다시 전기장을 만든다. 가시광선, 자외선, X선, 이동통신에 사용하는 전파도 전자파의 하나다. 이 가운데 다른 장치에 유입된 뒤 간섭을 일으켜 오동작을 유발하는 불필요한 전자파를 ‘전자파노이즈’라고 부른다.
비행기나 병원 중환자실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이유도 전자파노이즈가 비행기 운항장치나 환자 생명유지에 필요한 산소발생기, 심장박동기 같은 장치를 고장낼 수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영남대 의료공학연구소 신현진 박사팀은 아날로그 방식의 휴대전화에서 나온 전자파노이즈가 병원 내 의료기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 박사팀은 수술실이나 인공신장실, 중환자실 등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전자파를 측정했다. 그 결과 중환자실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경우 중환자실 평균 전자파 강도(58.8dbμV/m)의 2배일 정도로 높은 전자파(약 120dbμV/m)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 출시된 휴대전화는 크기가 작아지며 전력 소모량이 줄었을 뿐 아니라 기지국 수가 늘어나 단말기의 출력이 크게 낮아졌다. 휴대전화가 미치는 영향도 줄어든 셈이다. 기지국과 휴대전화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단말기 출력이 낮아져 그만큼 전자파 방출량도 줄어든다. 일반적으로 출력이 2분의 1 줄면 발생하는 전자파는 8분의 1이 된다.
신 박사는 “디지털 방식의 휴대전화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이나 시분할다중접속(TDMA) 같이 송출방식이 다양하고 각 통신사마다 사용하는 주파수(진동수) 대역이 800MHz에서 1.8~2GHz로 다르기 때문에 휴대전화가 의료기기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최근 출시되는 제품은 전자파 방출량 규제 기준을 따르고 있다.
신 박사는 “그러나 출력이 낮아지더라도 의료기기와 가까이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경우 잠재적으로 전자파의 위험은 상존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휴대전화 사용자 수가 과거보다 크게 늘어난 만큼 전자파노이즈 발생원은 더 늘어난 셈이다.
2003년 일본 총무성은 서점이나 음반가게 같은 상점이나 도서관에 설치된 도난방지장치에서 발생한 전자파가 심장에 삽입된 심박조율기 같은 의료기기에 오작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박조율기나 자동제세동기(AED)를 장착한 사람이 도난방지장치에 일정시간 이상 노출될 경우 환자 개인의 박동에 맞춰 의사가 설정한 프로그램이 초기화되는 사례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브란스 병원 심장내과 김진배 전문의는 “각종 전자기기에서 발생한 전자파가 심박조율기나 제세동기에 이상을 일으키는 사례가 계속 보고되고 있다”며 “심박조율기를 이식한 환자들은 전자파에 오랜 시간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연현상 속 전자파노이즈, 태양풍
의료기기뿐 아니라 TV나 컴퓨터, 휴대전화 같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전자기기 대부분은 전자파에 ‘감수성’이 예민하다. 전자파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전자기기는 동시에 스스로 전자파를 발생시켜 또 다른 기기에 영향을 미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켜면 컴퓨터에서 나온 전자파가 옆에 있는 TV 화면을 순간적으로 흔들리게 만든다. 그런데 TV는 영상신호와 음성신호를 수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전자파를 발생시켜 라디오 같은 다른 기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아주대 전자공학부 김영길 교수는 “일반적으로 교류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제품은 전자파를 발생시킨다”며 “전자기기에서는 전압이나 회로를 흐르는 전류가 변할 때, 부품의 특성이나 회로의 구성, 선로의 크기에 따라 크고 작은 전자파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자연현상에서도 전자파노이즈를 찾아볼 수 있다. 태양 표면에서 폭발(플레어)이 생길 때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풍은 전자나 양성자, 헬륨 원자핵 등으로 이뤄진 대전 입자의 흐름으로 방송·통신장애(델린저 현상)를 일으키는 전자파노이즈다. 태양풍에 실려 온 입자들은 열권에 있는 전리층 을 교란해 무선통신을 마비시키고 오로라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군사 목적으로 전자파노이즈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핵폭탄이 폭발할 때 나오는 전자파는 컴퓨터나 통신장비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이 점에 착안해 미군은 적진에 떨어트리면 엄청난 양의 전자파를 발생해 탱크와 전투기의 레이더와 컴퓨터 등 전자기기 대부분을 마비시키는 최첨단 무기 ‘전자기펄스(EMP) 폭탄’을 만들었다.
전자기기 통과의례 ‘EMI, EMC’
이제 ‘전자파 간섭’(EMI)과 ‘전자파 양립성’(EMC) 시험은 전자기기의 ‘통과의례’가 됐다. EMI는 전자기기가 방출한 전자파가 다른 장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규제하는 기준이며 EMC는 외부의 전자파노이즈로부터 전자기기가 견디는 내성과 관련된 기술을 말한다. EMI는 창을 무디게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입히는 피해를 줄이는 방식이라면 EMC는 외부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튼튼한 방패인 셈이다.
전자기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는 크게 전도성 전자파(150kHz~30MHz)와 방사성 전자파(30MHz 이상)로 나눌 수 있다. 전도성 전자파는 일반적으로 전선을 타고 유입되며 방사성 전자파는 공기 중으로 방출된다.
방사성 전자파를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전자기기 주변에 전자파를 차단하는 차폐막을 설치하는 방법이다. 김 교수는 “금속성 차폐막을 설치하면 ‘패러데이-렌츠’의 법칙을 이용해 외부에서 발생한 전자파노이즈의 영향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속 표면에 특정 진동수를 가진 자기장이 생기면 전자기 유도현상으로 금속 표면에 유도 기전력이 형성(패러데이 법칙)된다. 유도 기전력은 금속 차폐막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이때 생긴 전류는 다시 자기장을 만들어 외부에서 가해진 자기장과 반발(렌츠의 법칙)한다.
전도성 전자파는 ‘전자파 필터’로 제거할 수 있다. 국내 중소기업인 웨이브텍이 개발한 전자파 차단 필터는 제품을 전원과 연결하는 콘센트에 끼워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 장치는 전류의 변화를 억제하는 일종의 관성과 같은 힘인 ‘인덕턴스’와 전압의 변화를 억제하는 정전용량(캐패시턴스)을 조절해 전자파노이즈의 발생을 막는다. 전자파노이즈를 완전히 막는 방법은 없을까. 전자기기와 전자파노이즈는 빛과 그림자 같아서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없다. 충북대 정보통신공학과 김남 교수는 “반도체기술과 디지털신호처리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고 부품이 초소형으로 집적화되는 과정에서 전자파의 영향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회로와 회로 사이의 폭이 좁아져 외부에서 발생한 전자파에 간섭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또한 전자기기에서 사용하는 진동수가 커져 시간당 더 많은 횟수로 진동하기 때문에 전자파노이즈를 정상신호로 ‘착각’할 가능성도 커졌다”고 설명했다.
전자파의 또 다른 얼굴 ‘전자파노이즈’는 편의를 위해 만든 휴대전화, TV, 라디오 같은 전자기기와 함께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 전자파가 약(藥)이 될 수도 독(毒)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전자파내성(EMS)
외부에서 발생한 전자파에 의해 장치나 시스템 성능이 저하되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전자파의 발생원리
전기장과 자기장은 수직을 이뤄 서로를 유도하며 퍼져 나간다. 이를 전자파라 한다.
자동제세동기(AED)
부정맥 환자에 삽입하는 장치로 심장에 주기적으로 일정량의 전기자극을 줘 심장마비를 막는다.
전리층
태양 에너지에 의해 공기 분자가 이온화돼 자유 전자가 밀집된 층. 무선통신에 사용하는 전파는 전리층에서 반사되기 때문에 우주공간으로 무한히 뻗어나가지 않고 지구 반대편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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