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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E, 게임에 진화가 팍팍?

진화생물학 개념 도입한 인공생명 게임

지난 9월 7일 전 세계의 이목이 한 곳에 쏠렸다. 게임계 3대 거장 중 하나로 꼽히는 윌 라이트가 ‘스포어’(SPORE)라는 게임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윌 라이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심시티’(Simcity)라는 게임으로 이름을 알린 개발자다. 그는 2000년 가상의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심즈’(SIMS)라는 PC용 게임을 개발했는데, ‘심즈’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1억 장 이상 팔리면서 게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으로 기록됐다.

그런 그가 ‘심즈’ 이후 7년 만에 ‘스포어’라는 새로운 PC용 시뮬레이션 게임을 발표했으니 화제가 될 만도 하다. 현재 ‘스포어’는 출시 보름 만에 세계적으로 100만 장이 팔리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책 읽고 영감 얻어
사실 ‘스포어’가 흥미를 끄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스포어’가 진화생물학에 기반을 둔 상당히 과학적인 게임이라는 점이다. ‘스포어’라는 단어도 영어로 포자, 홀씨, 종자를 뜻하는 생물학 용어다.

라이트는 ‘스포어’를 기획할 때부터 진화생물학 관점을 염두에 뒀다. 그는 지난 9월 2일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리처드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같은 저명한 진화생물학자들의 책을 보고 이 게임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과학자들을 찾아가 조언을 얻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하나의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연구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 중에서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20% 정도밖에 안 된다”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진화라는 방대한 개념을 컴퓨터로 옮기는 일이었다. 가령 진화가 일어날 때 수백 만 년이 걸려도 안 되고, 진화 과정이 추상적이어서도 안 된다. 이런 고심 끝에 라이트가 ‘스포어’에 담은 진화생물학의 가장 큰 특징은 진화로 탄생하는 생명체의 다양함이었다. 그는 “진화가 만들어내는 놀랍도록 다양하고, 흥미롭고, 때론 기괴한 생명체의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는 라이트의 외계생명체에 대한 관심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지난 8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일곱 살 때 아폴로 우주선이 달로 발사되는 장면을 본 뒤 우주에 관한 영화를 즐겨보면서 외계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드레이크 방정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드레이크 방정식은 미국 천문학자 프랭크 드레이크가 1961년 고안한 것으로 지구처럼 문명을 가진 행성의 수를 계산해 이로부터 다른 행성에 존재하는 외계 생명체를 찾는 데 이용된다.

게임은 운석이 어느 행성에 부딪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이로 인해 행성의 바다에는 생명체와 유기체의 ‘스포어’가 뿌려지고 이때부터 게이머는 이 단세포 생명체를 조종해 먹이를 먹여 키워야 한다. 운석 잔해를 먹이거나 해조류, 아니면 다른 생명체를 먹잇감으로 줄 수도 있다.

여기에 라이트는 ‘DNA 점수’라는 장치를 보탰다. 생명체가 먹고 자라면서 게이머는 어느 순간 DNA 점수를 얻는다. DNA 점수가 생겨야 게이머는 자신의 생명체에 이것저것 원하는 신체 부위를 만들 수 있다. 헤엄을 치도록 꼬리를 붙일 수도 있고 적의 공격에 대비해 몸에 가시를 붙일 수도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자라면 뭍에 내보내자. 다리와 날개는 물론 원하는 부위는 어떤 것이든 붙일 수 있다. 양서류로 진화했다고나 할까. 이때부터 ‘스포어’의 진가가 발휘된다. 게이머의 상상에 따라 생명체는 어떤 형태로든 진화할 수 있다. 이미 ‘스포어피디아’에는 게이머들이 창조한 생명체(크리처)가 2500만 가지를 넘었다.

이는 진화생물학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시카고대 닐 슈빈 교수는 9월 2일자 뉴욕타임스에 “‘스포어’ 게임을 하다보면 무척 단순한 몇 개의 규칙과 명령이 진화에 의해 수많은 형태와 행동, 그리고 생태계로 이뤄진 복잡한 세상을 만든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고 평가했다.

슈빈 교수는 2006년 물고기와 네 발 짐승의 중간 단계에 있는 화석인 ‘틱타알릭’(Tiktaalik)을 발견해 어류에서 육상동물로 진화하는 연결고리를 찾아 ‘네이처’에 발표한 저명한 고생물학자다.

실제로 라이트는 ‘스포어’를 개발할 때 슈빈 교수에게 생명체가 어떻게 육지에서 걷게 됐는지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슈빈 교수는 라이트에게 “후기 데본기 바다 속에는 포식동물 천지였다”고 대답했고, 라이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스포어’에는 ‘틱타알릭’이 심해로 들어가기만 하면 포식동물에 잡아먹히게 만들어 육지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했다. 게이머들에게 물에서 뭍으로 생명체가 진화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킨 셈이다.

육지에 올라온 생명체가 각자 사회를 이루고 언어를 만들면서 문명을 이루는 과정도 흥미롭다. 진화생물학에서 진화란 단순히 죽고 죽이는 과정이 아니다. 생명체들 사이에 협동과 경쟁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복잡다단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스포어’에도 이런 개념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게이머가 창조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죽여야만 진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만들어 의사소통을 하고, 때론 춤과 노래를 부르며 끈끈한 관계를 맺는다. 가끔은 무리지어 움직이면서 다른 종족과 전쟁을 벌여 문명을 정복하기도 한다. 게이머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생명의 진화과정에서 중요한 요소인 협동과 경쟁이란 개념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다.

창발 개념만 있었더라면
물론 ‘스포어’가 진화의 모든 특성을 담아낸 것은 아니다. 오해의 소지도 있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진화란 돌연변이가 발생해 새로운 형질이 나타나고 이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보편적인 특징이 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스포어’에서는 DNA 점수만 얻으면 아무 때나 생명체에 새로운 형질을 부여할 수 있다. 진화가 수시로 일어나는 셈이다. 인공생명을 연구하는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조성배 교수는 ‘스포어’ 게임을 한 뒤 “생명체의 가장 큰 특징인 자기복제라는 개념이 없다”며 “진화 과정을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진화 과정이 너무 단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스포어’에서는 단세포에서 출발한 생명체가 게임의 5단계 진화과정에 따라 한 방향으로만 진화한다. 하지만 실제 진화는 그렇지 않다. 마치 나무가 자라면서 나뭇가지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듯 한 종만 보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복잡하게 변하다가 어떤 때는 전혀 변하지 않기도 한다.

이는 복잡한 자연계를 설명하는 창발(創發, emergence)이라는 개념이 빠졌기 때문이다. 창발은 하위 수준에는 없는 특성이 상위 수준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생명체들이 지닌 수많은 특성과 그들 간의 연결망에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질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조 교수는 “‘스포어’를 인공생명 게임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창발 개념이 부족하다”면서 “바다에서 미생물을 섭취한 뒤 뭍으로 나와 종족을 꾸리고 문명을 개척하고 우주시대에 도달하는 정형화된 루트가 창발성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어’는 게임에 진화생물학 개념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또 진화에 관한 다양한 물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을 만하다.

‘스포어’에 구현된 진화 5단계

1. 세포 단계
바다에 있는 먹이로 세포를 키운다. 해조류를 먹일 수도 있고 다른 세포를 공격해 먹이로 먹도록 할 수도 있다. 일정량 이상 먹이면 몸집이 커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암수가 만나 짝짓기로 종족을 번식하기도 한다.

2. 크리처 단계
자신의 크리처(생명체)를 번식시키고 새로운 크리처로 진화시킬 수 있다. 크리처에 눈, 입, 손, 날개, 다리 같은 신체기관을 달 수 있다. 다른 종의 크리처들과 경쟁해 자신의 크리처를 진화시켜야 한다.

3. 부족 단계
크리처가 더 이상 진화하지 않는다. 대신 건물을 짓고 자신의 크리처를 생산하며 사회를 형성시켜야 한다. 다른 부족과 평화적인 관계를 맺어 세를 확장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정복한다.

4. 문명 단계
크리처가 직접 나서는 대신 다양한 병기를 이용해 다른 문명과 경쟁한다. 폭력적인 방법이 싫다면 돈으로 다른 문명을 사거나 종교의 힘으로 장악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5. 우주 단계
게임의 하이라이트다. 문명 단계에서보다 더욱 발전된 방식으로 우주로 날아가 행성을 떠돌며 외계 생명체를 찾아내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각 행성에 숨겨진 유물을 찾거나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다.

‘과학동아’ 기자들은 어떤 크리처를 만들까?

강석기 기자 : 완벽한 생명체는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가 아닐까.
서로 싸워야한다면 맹수처럼 무기가 될 수 있는 신체기관이 있거나
빨리 달리거나 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겠지만 외형이 ‘엽기적’일 듯.
결국 인간과 닮은 형태가 될 것이다.

박은정 기자 : 심리 상태에 따라 얼굴이 바뀌는 생명체. 인간의 마음은 알아채기
너무 어려우니 속마음을 알 수 있는 크리처가 좋겠다.

안형준 기자 : 해파리처럼 넓적하고 오징어처럼 다리가 여러 개 달리면 좋겠다. 해파리처럼 몸의 표면적이 넓어야 물에서는 해류를 타고 움직이고
공중에선 바람을 타고 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징어처럼 다리가 많아야 육지에서 빨리 달릴 수 있다.

이준덕 기자 : 상상의 동물 ‘해태’같이 생긴 강아지. 이왕 생명체를 키울 거라면
교감할 수 있는 애완동물이 좋겠다. 동물 이상의 생명체는 부담스럽다.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면 더 좋다.

이충환 기자 : 무조건 예뻐야 한다. 그래야 진화에 유리하다.
대신 전체적인 형태는 구형이어야 한다. 구가 완벽의 상징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기에 적절히 팔과 다리를 붙이면 움직임도 자유로울 것 같다.


[리뷰] 스포어, 게임 해보니
진화하는 크리처는 GOOD, MMORPG 답습한 인상엔 NO


글_장수형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석사과정 neogates@sclab.yonsei.ac.kr

‘블랙 앤 화이트’ ‘심스’ ‘문명’ 등 ‘갓 게임’(God game)이라 불리는 게임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이 하나 있다. 일반적인 게임과 달리 유저(사용자)는 게임에서 자신의 유닛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다는 점이다. 유닛은, 유저가 조종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줄 인형’ 같은 수동적 성격에서 유저와 상호작용하는 동반자적 성격으로 격상된다.

혹자는 이렇게 능동적 유닛의 존재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워진 게임의 속성을 인공생명의 창발(創發, emergence)성과 연결시켜 인공생명 게임으로 새롭게 정의하기도 한다. 출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은 ‘스포어’ 역시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고, 이는 ‘스포어’를 개발한 윌 라이트의 전작 ‘심스’ 시리즈의 완성도와 무관하지 않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스포어’는 그간 ‘심스’가 보여줬던 창발성과 그 혁신성을 계승하는 데 실패했다. 단일세포로 시작해 지속적 진화를 통해 우주시대까지 열어 외계 생명체와 교류한다는 ‘스포어’의 거대한 스케일은 ‘양날의 검’이 되고 말았다. 스케일이 크다는 말은 한편으론 그 크기에 끝이 있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유저는 주어진 세포를 키워 우주 문명에 도달할 때까지 직선로를 달려야 한다. 바다에서 미생물을 섭취해 뭍으로 나오고, 뭍으로 나와 종족을 꾸리고 문명을 개척하고 우주시대에 도달하기까지 이어지는 정형화된 루트는 그 어떤 창발성도 허용하지 않는다.
또 인공생명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이 누렸던 자유도 높은 유저의 동반자적 유닛은 사라지고 일반 게임에서 다루는 ‘꼭두각시 유닛’이 돌아왔다. 흔한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처럼 유저는 크리처를 조종해 친구를 만들기도 하고 적과 싸우기도 하면서 아이템과 DNA 포인트를 모은다. 결국 세포 단계에서 우주시대라는 거창한 이야기는 MMORPG의 레벨 1부터 레벨 99까지의 스토리와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물론 게임 안에서 진화라고 부르는 유닛(크리처)의 변신 기능은 주목할 만하다. 게임 중간 중간 유저는 그동안 모은 아이템과 DNA 포인트로 크리처의 성능과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게임 크리처의 생김새에 대한 자유도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다. 또 진화할 때마다 기존의 모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진화’라는 거창한 설정은 다소 낯 뜨겁게 느껴진다. 결국 ‘스포어’는 진화라는 거창한 껍데기를 입었지만 그 속은 한창 유행하는 MMORPG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했고, 인공생명 게임의 특징인 창발성을 깡그리 없앤 게임이 돼버렸다. 유저가 조종하는 크리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NPC(non playable character) 역시 단순행동만 반복해 맥없는 움직임과 수동적 대응만 할 뿐이다.

아마 ‘심스’나 ‘블랙 앤 화이트’ 같은 창의적 게임을 기대한 유저라면 ‘스포어’에 적잖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나마 실감나는 사운드와 화려한 그래픽이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윌 라이트의 노력을 초라하게나마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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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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