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매운 고추 먹고 땀 흘리는 이유?

캅사이신이 온도센서 단백질 자극해 뇌 속인다

추운 겨울, 고춧가루를 훌훌 풀어 끓여낸 얼큰한 동태매운탕을 먹고 나면 움츠렸던 몸까지 확 풀린다.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식당 문을 나서며 입가심으로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넣는다. 순간 매운 열기가 남아있던 입안이 박하향과 함께 시원해진다.

우리 몸은 주위 온도에 따라 덥거나 춥다고 느낀다. 주위로부터 열이 들어오면 덥다고 느끼고 열을 빼앗기면 춥다고 느끼면서 불편해한다. 이렇게 주변 온도에 반응하는 현상은 항온 동물로서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결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변 온도를 감지할까? 하나의 센서가 온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온도에 따라 여러 센서가 존재할까?

온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질수록 비례해서 커지는 통증 감각은 온도 감각과 같은 것일까 별개일까? 왜 우리는 뜨겁지 않은 고추를 먹고 땀을 흘리고 열을 빼앗지 않는 박하사탕을 먹고 시원하다고 느낄까? 지난 수백년 동안 과학자들은 이런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고추와 성냥불에 열리는 열센서^매운 음식이나 열로 인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세포의 세포막에는 이온채널 TRPV1이 분포한다.


열센서에 결합하는 캅사이신

199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세포·분자약학과 데이비드 줄리우스 교수팀은 이런 여러 의문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란을 단숨에 잠재워버린 놀라운 연구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논문의 제목은 ‘캅사이신 수용체 : 통증 경로에 있는, 열에 의해 활성화되는 이온 채널’이다. 제목을 유심히 보면 고추의 주성분인 캅사이신의 매운맛과 열, 통증이 하나의 센서를 통해 감지됨을 시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연구팀은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말단을 조사했다. 그 결과 신경세포막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이온 채널 단백질이 통증을 느끼는데 관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채널 단백질이란 도넛 같이 생긴 분자로 평소에는 통로가 막혀 있다가 외부의 자극에 통로가 열리면서 이온이 이동할 수 있게 한다.

연구팀이 발견한 이온 채널 단백질은 TRPV1로 온도가 42℃가 넘거나 캅사이신이 달라붙으면 통로가 열리면서 세포 밖의 나트륨 이온(${Na}^{+}$)과 칼슘 이온(${Ca}^{2+}$)이 세포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 결과 신경세포 내부의 전위가 바뀌면서 전기신호가 축색돌기를 타고 척수를 거처 대뇌로 전달돼 통증과 열을 느끼게 되는 것.

결국 고추를 먹으면 땀이 나는 것은 고추의 주성분인 캅사이신이 TRPV1을 자극해 열 신호를 대뇌에 전달함으로써 뇌가 열을 식히는 반응, 즉 땀이 나게 하기 때문이다. 뇌의 입장에서는 깜빡 속은 셈이지만 우리가 고추를 먹고 덥다고 느끼는 것만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TRPV1 유전자가 고장난 개체는 열과 통증을 못 느끼고 매운맛도 모를까?

2000년 줄리우스 교수팀은 TRPV1이 없는 생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녀석은 평소에는 정상 생쥐와 구별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캅사이신을 투여하거나 주위 온도를 높였을 때는 행동에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즉 물에 캅사이신을 탈 경우 정상쥐는 한번 마셔보고는 질겁하고 다시는 입을 대지 않은 반면 TRPV1이 없는 쥐는 맹물과 마찬가지로 벌컥벌컥 마신다.

한편 꼬리를 뜨거운 물에 담구면 정상 쥐는 얼른 꼬리를 빼는 반면 TRPV1이 없는 쥐들은 반응이 훨씬 느렸다. TRPV1이 매운맛이나 열을 감지하는 센서임을 확증하는 연구결과다. 그럼에도 열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은 또 다른 열센서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생쥐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TRPV1과 비슷한 유전자가 몇 개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을 조사하자 전부 네 가지 유전자가 온도센서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TRPV1은 42℃ 이상일 때, TRPV2는 52℃ 이상일 때, TRPV3는 33℃ 이상일 때 채널이 열려 온도를 감지하고 TRPV4는 27~42℃에서 채널이 열린다. 결국 뇌는 온도에 따라 이들 채널이 열리고 닫히는 패턴을 종합해 더운 정도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한편 캅사이신은 열센서 가운데 TRPV1에만 달라붙고 나머지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TRPV1이 없는 생쥐가 고추의 매운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열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지는 않는다는 위의 실험결과를 잘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들 네 가지 센서는 차가움에 반응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많은 연구자들이 냉(冷)센서를 찾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온도센서 스펙트럼^항온동물인 포유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여러 온도센서를 통해 온도정보를 얻는다. 몇몇 온도센서는 온 도뿐 아니라 특정한 분자에도 반응한다. 고추의 매운맛은 TRPV1이 감지하지만 계피와 마늘, 고추냉이의 매운맛은 TRPA1을 통해 느껴진다. TRPA1이 냉센서인가에 대해서는 실험결과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치약의 감초, 멘톨

2002년 두 연구팀에서 거의 동시에 냉센서를 찾아냈다. 열수용체를 발견한 줄리우스 교수팀이 그 가운데 하나. 두 팀이 발견한 수용체는 같은 것으로 TRPM8이라고 명명됐다. 역시 채널 단백질인 TRPM8은 25℃ 이하에서 채널이 열리면서 신호를 전달하는데 온도가 낮아질수록 활성이 커진다. 흥미롭게도 박하의 주성분인 멘톨이 TRPM8에 붙으면 역시 채널이 열린다. 박하사탕을 먹거나 양치질을 하면 입안이 시원해지는 이유다.

향이 없는 캅사이신과는 달리 휘발성 분자인 멘톨은 청량감 있는 향이 난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멘톨이 많이 들어있는 페퍼민트 같은 박하류 식물에서 추출한 천연 향료가 널리 쓰였다. 면도 후 바르는 스킨이나 치약의 향료에 멘톨은 빠질 수 없는 성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멘톨의 시원한 느낌을 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TRPM8이 발견됨으로써 진짜 온도 감각에 영향을 준 결과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2007년 연구자들은 TRPM8이 없는 생쥐를 만들었는데 예상대로 멘톨에 반응하지 않았고 저온에 둔감했다. 즉 20℃와 30℃로 맞춰진 방이 있을 때 정상쥐는 30℃ 방을 택한 반면 TRPM8이 없는 녀석들은 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한편 얼음처럼 차가운 환경에 놓일 경우 정상쥐는 화들짝 놀라 달아난 반면 TRPM8이 없는 쥐는 반응이 훨씬 느렸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얼음을 피했다. 이 점은 또 다른 냉센서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15℃ 이하에서 채널이 열린다는 또 다른 냉센서인 TRPA1이 보고되기는 했지만 다른 연구팀에서 결과가 재현되지 않아 진짜 냉센서인가에 대해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TRPA1은 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마늘의 매운성분인 알리신이나 고추냉이의 이소티오시아네이트에 반응한다. 흥미롭게도 TRPA1은 고추의 캅사이신에 반응하는 TRPV1과 같은 신경세포에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센서는 다르지만 모두 ‘맵다’고 느끼는 이유다.
최근에는 Nav1.8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냉센서가 보고되기도 했다.
 

냉센서인 TRPM8은 멘톨(오른쪽)이 있을 때 채널이 열려 칼슘이온이 유입된다. 세포 속의 칼슘이온 농도가 높을수록 붉은색을 띤다.


진통제 개발에 영감 줘

“캅사이신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처음엔 통증을 일으키지만 나중에는 진통 작용을 보입니다.”

통증을 연구하고 있는 서울대 약대 오우택 교수의 설명이다. 캅사이신의 작용으로 수용체의 채널이 지속적으로 열리면 신경세포가 과도한 자극을 견디지 못해 죽기 때문에 결국 통증에 둔감해진다는 것. 이미 캅사이신을 주성분으로 한 진통 크림이 나와 있다. 최근 미국의 제약회사인 아네시바는 수술 부위에 직접 투여할 수 있는 캅사이신 제제인 아들레아(Adlea)를 개발해 무릎관절 등 상당한 통증이 따르는 수술에 적용할 예정이다.

“캅사이신으로 신경세포를 죽여 진통 효과를 보는 방법보다는 오히려 신경세포의 TRPV1이 열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TRPV1은 염증이 생겼을 때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세포에 많이 분포한다. 오우택 교수팀은 염증이 생기면 신경세포 안에서 HPETE라는 생체분자가 만들어져 TRPV1에 달라붙어 채널을 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흥미롭게도 캅사이신은 HPETE와 입체구조가 비슷하다. 결국 캅사이신은 HPETE의 유사물질로 작용한 셈이다. 이런 물질을 효능약제(agonist)라 부른다.

“현재 저희뿐 아니라 전 세계 유명 제약회사들이 HPETE와 구조가 비슷해 TRPV1에는 달라붙지만 채널을 열지는 못하는 물질을 찾고 있습니다.”

즉 HPETE와 경쟁하면서 작용을 방해하는 약물, 즉 길항제(antagonist)를 개발하고 있다. 오 교수팀은 이미 많은 후보물질을 찾아내 현재 동물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오 교수는 “온도수용체의 미스터리를 규명하는 과정은 순수과학의 측면에서도 가치가 클 뿐 아니라 응용면에서도 잠재성이 크다”며 “아직 미개척영역이 많아 도전해볼 만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절대영도(-273.16℃)에서 별의 내부온도인 수억 도에 이르기까지 온도의 범위는 매우 넓지만 인체가 민감하게 느끼는 온도의 범위는 아주 좁다. 즉 28~34℃에서 적당하다고 느끼다가 온도가 좀 떨어지면 시원하다고 느끼고 15℃ 밑으로 내려가면 춥다고 느끼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반면 온도가 올라가면 따뜻하다고 느끼다가 42℃가 넘어가면 뜨겁다고 느끼면서 역시 통증이 찾아온다. 결국 인간은 우주에서 관찰되는 수억도의 온도범위 가운데 불과 27도, 즉 15~42℃에서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존재인 셈이다.
 

냉센서인 Nav1.8이 없는 생쥐는 얼음에 놓아도 차가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인류는 매운맛에 중독된 포유류

사람을 포함한 포유류는 캅사이신의 매운맛을 잘 느낀다. 반면 새들은 고추를 먹고도 태연하다. 왜 그럴까?

“조류의 열센서인 TRPV1은 포유류의 TRPV1과 구조가 조금 다릅니다. 그 결과 열은 감지하지만 캅사이신이 달라붙지는 않아 고추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열센서와 통증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서울대 약대 오우택 교수의 설명이다. 고추가 씨를 퍼뜨려 자손을 늘리려면 동물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런데 포유류는 이빨이 있어 음식을 씹을 때 씨가 으깨져 배설되더라도 싹이 트지 않는다. 게다가 씨가 넓게 퍼지려면 걸어 다니는 포유류보다 날아다니는 조류가 더 좋은 파트너다. 따라서 캅사이신은 고추가 불청객인 포유류를 쫓아내려고 만들어낸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고추의 구상을 무너뜨린 종이 등장했으니 바로 인류다. 다른 포유류처럼 고추를 통째로 먹으면 매운맛을 견디기 어렵지만 요리의 양념으로 쓰면 음식의 맛을 돋궈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추에 맛을 들이면서 사용하는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하루에 먹는 고추 섭취량이 1998년 5.2g에서 2005년에는 7.2g으로 40%가량 증가했다. 1인당 1년 고추 소비량은 2.6kg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사실 고추소비 증가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바야흐로 전 세계가 고추에 빠져있다고 할 만 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자 폴 로진 교수는 고추의 매운맛으로 인한 통증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처음 고추를 먹으면 그 얼얼함에 깜짝 놀라지만 몸에 별탈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그 뒤에도 안심하고 고추를 먹을 수 있다. 한편 몸은 고추로 인한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진통제인 엔돌핀을 만든다. 그 결과 통증이 클수록 뒤에 느끼는 쾌감도 증가한다. 한편 캅사이신을 많이 접하면 TRPV1 채널이 지속적으로 열리면서 세포 안에 칼슘 이온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와 결국 세포가 죽는다. 즉 입안의 TRPV1 분포 밀도가 떨어지는 셈이다. 그 결과 더 많은 고추를 먹어야 원하는 수준의 통증과 그에 따르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결국 고추는 특이한 취향의 포유류를 만나 과거 어느 때보다도 넓은 면적에서 종이 번성하는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화학·화학공학
  • 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