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영국의 사진가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의 작품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말을 타는 기수의 모습을 담은 연속사진이었는데, 안장 위에서 들썩이는 기수의 엉덩이며 박진감 넘치는 말의 다리 근육까지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한 사진가의 기발한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초고속카메라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성능 좋은 초고속카메라만 있다면 생체분자의 움직임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피어났다. 이 같은 생각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다차원분광학이란 학문으로 실현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실제 이론으로 발전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린 까닭은 그만큼 이 분야가 창의적인 생각과 최첨단 레이저 장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관련 연구자들이 모여 국제 심포지엄을 처음 개최한 것도 지난 2002년일 정도로 ‘늦깎이’ 연구주제지만 그 분야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과학자가 있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바로 다차원분광학연구단의 조민행 교수.
조 교수의 주된 관심은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고분자 물질로 다양한 생명현상을 일으킨다. 음식물을 분해해 에너지를 만들고 DNA를 복제해 세포가 자라게 하는 것도 단백질의 일종인 효소가 하는 일이다.
순식간에 변하는 단백질 분자구조
단백질은 아미노산의 결합방법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갖는다. 여러 개의 아미노산이 한 가닥의 길쭉한 사슬 모양으로 결합하면 1차 구조. 1차 구조가 뱅글뱅글 꼬여 나선모양을 만들거나 병풍처럼 접힌 모양을 만들면 2차 구조를 이룬다.
1, 2차 구조가 서로 결합하면 복잡한 3차원 상태의 3, 4차 구조가 된다. 이때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사슬이 수소결합이나 이온결합, 반데르발스힘 때문에 꺾이거나 구부러지며 ‘단백질접힘’ 현상이 일어난다.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이루는 단백질인 케라틴은 2차 구조를 이루고, 세포의 원형질 속에 들어있는 효소나 항체는 3차 구조를 갖는다. 적혈구에 들어있는 헤모글로빈 단백질은 3차 구조 단백질 분자가 모여 만든 4차 구조로 이뤄졌다.
단백질에 열을 가하거나 화학 처리를 해 원래의 입체구조가 변하면 단백질은 고유의 기능을 잃는다. 바꿔 말하면 단백질의 구조가 기능을 결정하기 때문에 그 구조를 알아내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가장 널리 사용해온 방법은 X선 회절법과 핵자기공명법.
X선 회절법은 물질에 X선을 쪼여 산란되는 빛을 분석해 미세구조를 알아내는 방법으로 1950년대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결정 상태의 샘플에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단백질 분자를 관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핵자기공명법은 단백질 분자를 이루는 수소 원자 속 양성자 간 거리를 파악해 밀리초(10-3초) 단위로 일어나는 변화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몸속과 비슷한 생체조건에서 분자 구조를 알아낼 수는 있지만 피코초(10-12초) 단위의 짧은 시간동안 벌어지는 실제 단백질의 구조 변화는 제대로 잡아낼 수 없다.
펨토초 레이저로 광합성 비밀 캔다
최근 다차원분광학은 몸속 단백질 분자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분자 샘플에 펨토초(10-15초)의 레이저펄스를 쪼여 단백질 분자가 매우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내는 방법이다. 1펨토초는 1000조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으로 펨토초 레이저펄스를 사용하면 원자나 분자에서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어두운 방에서 댄서가 춤을 추고 있고, 방의 조명을 켰다 껐다 한다고 가정해보자. 조명 스위치를 빠르게 움직일수록 댄서의 동작이 더 부드럽게 연결돼 보인다. 여기서 조명의 깜빡임을 펨토초 레이저펄스, 댄서의 움직임을 단백질 분자 구조의 변화로 보면 된다.
조 교수는 수십 펨토초 길이의 레이저펄스를 이용한 다차원분광학으로 식물 광합성 초기단계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이동과정을 연구한 결과를 2005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이고 그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생명체는 식물입니다. 식물은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높은 효율의 광합성공장을 가동하고 있죠. 이 신비로운 과정을 분석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모방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조 교수는 2차원 분광학으로 광합성 때 식물의 단백질이 빛에 반응하는 과정과 광자(photon)가 엽록소에 에너지를 전달한 뒤 소멸하는 과정을 담은 스펙트럼을 얻었다. 여러 색으로 나타난 스펙트럼의 강도를 분석하면 시간에 따라 단백질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알 수 있다. 그동안 풀리지 않던 광합성의 신비를 한꺼풀 벗겨낸 것.
분자의 ‘모션 픽처’ 감상해볼까
다차원분광학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 교수는 “광합성뿐만 아니라 체내의 효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알츠하이머를 일으키는 단백질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도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차원분광학으로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성과보다는 미시세계를 들여다보는 연구 자체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고백했다.
지금까지 다차원분광학연구단은 이론연구를 주로 했다. 값비싼 실험 장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분자구조를 예측한 데이터를 외국 연구실에 맡겨 검증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연구단은 최근 분광학 장비를 대부분 갖추고 실험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펨토초 범위의 적외선펄스를 발생시키는 레이저장비와 이 과정에서 나온 수치자료를 분석해 단백질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여러 대의 고성능 컴퓨터를 보유하게 된 것.
지난해 11월 조 교수가 ‘네이처’에 기고한 칼럼의 제목은 ‘Molecular Motion Picture’(분자 모션 픽처)였다. 단백질 분자가 변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다차원분광학연구로 머지않아 ‘이효리’처럼 멋지게 춤추는 분자의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화학, 생물학, 물리학 넘나드는 르네상스적 과학자
조민행 교수
“미국의 물리학자인 프리드만 다이슨은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두 가지로 봤습니다. 첫째는 과학의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서인데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DNA구조 발견을 들 수 있죠. 둘째는 도구의 발달을 통해서입니다. 17세기 로버트 훅이 현미경을 발명하면서 미시세계를 볼 수 있게된 것처럼 말입니다.”
다차원분광학이란 학문은 어쩌면 차기 과학혁명을 이끌 새로운 ‘도구’일지도 모른다. 이 놀라운 도구를 손에 쥔 조민행 교수는 포스트게놈시대의 주역으로 주목받는 단백질 분자 연구에서 생명의 비밀 캐기에 여념이 없다.
조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에서 석사를 마친 뒤 미국 시카고대에서 물리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MIT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지내며 연구 분야를 분광학으로 좁혔고, 현재 다차원분광학을 이용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연구하고 있다. 이론화학자가 레이저를 주로 다루는 물리학에 뛰어드는 일도, 단백질 연구를 시작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의 거침없는 변신에 어떤 비결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가 분광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귀’가 얇은 탓이다. 유학시절 분광학 관련 연구논문을 읽다 흥미가 솟아났고, 한창 열기가 뜨겁던 단백질 연구에 이를 활용하면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은 그 얇은 귀 덕분에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창의력을 발휘하는 르네상스적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연구자가 갖춰야 할 기본덕목으로 주저없이 ‘열린 태도’를 꼽는다.
현재 다차원분광학연구단에는 석·박사과정생이 8명, 박사후연구원 5명, 인턴연구원이 1명 있다. 혹시 생물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한 학생이 있는지 묻자 아직 100% 화학과 출신으로 채워져 있단다. 조 교수는 “물리학도는 생물학적 지식이 적고, 생물학도는 물리학과 수학 이론에 약한 경우가 많아 현실적으로 실험실에서 학문의 융합은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이제 이론 위주의 연구에서 벗어나 실험할 준비까지 마쳤다. 그는 다차원분광학으로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분자의 운동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을 때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