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묵직하게 누르는 안경을 벗고 눈앞을 응시하자 1m 앞에 제라늄화분이 보인다. 3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창문이 보이고 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팽팽히 당긴 활시위를 과녁에 조준하듯 두 눈은 여기저기에 초점을 맞추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안경 없이 바라보는 세상은 뿌옇게 흐려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2006년 대한안과학회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절반 가량이 근시로 나타났을 정도로 요즘 주위에서 눈 좋은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런데 태국의 원주민 모겐족은 시력이 9.0이라고 한다. 과연 시력 9.0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시력은 일반적으로 두 개의 점이나 선을 분리해 볼 수 있는 능력, 즉 분해능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두 점과 눈이 이루는 각을 시각이라고 하는데, 시각이 작아질수록 물체가 눈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는 뜻이다.
시력은 최소시각을 분(′, 1′=1/60°) 단위로 나타낸 뒤 역수를 취해 얻는다. 예를 들어 시력이 1.0인 사람은 두 점을 구분할 수 있는 최소시각이 1′이며 시력을 잴 때 일반적으로 쓰는 6m 거리의 시력표에서 1.75mm 간격의 두 점을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시력이 9.0이라면 최소시각이 1/9′이라는 뜻으로 이는 지름 3cm 정도인 오백 원짜리 동전을 1km 떨어진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정도다.
시력은 유전일까?
고대 페르시아의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의 별 두 개를 구분해 볼 수 있는 최소시각을 관찰하며 최초로 시력을 측정했다. 현미경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훅은 천체망원경도 직접 개발해 별을 관찰했다. 그는 하늘의 서로 다른 별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눈과 두 별이 만드는 최소시각이 1′, 즉 시력 1.0은 돼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망막은 안구 벽의 가장 안쪽에 있는 얇고 투명한 막으로 각막과 수정체를 통과한 빛의 자극을 신경신호로 바꾸는 곳이다. 인간의 망막에는 밝기를 감지하는 간상세포가 약 1억 개, 형태와 색을 구분하는 추상세포가 약 5백만 개 있다.
추상세포는 ‘황반’(yellow spot)이라고 부르는 망막의 가운데 부분에 주로 밀집해있다. 특히 황반 중심에 지름 350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 크기로 움푹 패인 ‘중심와’로 갈수록 추상세포의 밀도가 증가하며 눈의 해상도는 높아진다.
1981년 호주의 안과의사 휴 테일러는 야외생활을 주로 하는 호주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시력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들은 평균 시력이 1.6~2.0이었으며 굴절 이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었다. 테일러 박사는 유전적으로 망막의 추상세포 밀도가 더 높거나 뇌가 시각자극을 민감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의 시력이 좋은 것으로 해석했다. 시력이 기본적으로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헤르만 헬름홀츠는 떨어져있는 두 점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빛의 자극을 받은 추상세포 두 개 사이에 적어도 한 개의 자극 받지 않은 추상세포가 더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세 개 이상의 추상세포가 필요한 셈인데, 이론적으로 망막은 추상세포 지름의 2배만큼 떨어져있는 두 점까지 식별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의 안구조직을 연구한 결과 중심와에서 추상세포의 밀도는 평균 19만9000개/㎟에 이른다. 참깨 하나보다 작은 면적에 19만9000개의 세포가 빼곡히 들어차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이때의 시력은 1700년대 로버트 훅이 정상시력이라고 생각한 1.0에 가깝다. 사람에 따라 추상세포의 밀도가 32만4000개/㎟에 이르는 경우도 있어 시력은 최대 2.0~2.5 정도라고 추정한다.
산란, 굴절은 시력의 방해요인
빛이 일으키는 산란이나 굴절 현상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력은 더 떨어진다. 물체 표면에서 반사된 빛은 공기를 통과하며 산란을 일으킨다.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까닭도 파장이 짧은 파란색 빛이 공기를 지나며 산란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구에서도 빛이 산란되면서 시력을 떨어뜨린다. 백내장이 생기면 빛이 뿌옇게 흐려진 수정체를 통과하면서 대부분 산란하므로 정확한 상이 망막에 맺히지 못한다.
눈으로 들어온 빛은 먼저 각막을 통과한 뒤 수정체를 지나 망막에 상이 맺힌다. 흔히 빛이 수정체에서만 굴절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빛의 3분의 2는 각막에서, 나머지 3분의 1은 수정체에서 굴절된다. 수정체는 사물의 원근에 따라 주변 근육을 움직이며 두께를 조절해 초점을 맞춘다. 이 굴절력에 이상이 생기면 근시나 원시, 난시가 생기며 시력이 나빠진다.
근시의 대부분은 몸이 성장하며 안구의 길이도 함께 길어질 때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근시를 학교에 입학할 때쯤 생기기 시작해 학교를 마칠 때쯤 멈춘다는 의미로 ‘학교근시’(school myopia)라고도 부른다.
어떤 학자들은 가까운 거리의 사물, 즉 책을 많이 보는 것이 근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물만 많이 본다고 눈이 그 환경에 적응해 먼 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지난 6월 안과분야의 권위 있는 학술지인 ‘IOVS’(Investigative Ophthalmology &Visual Science)에는 호주 시드니대와 뉴사우스웨일스대가 어린이 2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근시연구 결과가 실렸다. 놀랍게도 근시 환자는 서양인보다 동양인그룹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부모 모두가 근시일 때 자식도 근시가 될 확률은 43.5%로 높았고, 부모 중 한명이 근시일 때는 14.9%, 부모 모두 근시가 없을 때는 7.6%만이 근시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또 책 읽는 시간과 시력 사이에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시력은 환경이 아닌 인종이나 유전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독수리눈에 색 필터 있다?
일반적으로 조류는 시력이 6.0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사람 시력의 3배 정도. 특히 아프리카에 사는 독수리는 3~4km 상공에서 지상에 있는 먹잇감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좋다. 새의 시력이 좋은 까닭은 두개골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안구가 크고, 추상세포의 밀도가 사람의 5배 정도로 높으며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메커니즘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특히 추상세포 속에 있는 여러 빛깔의 기름방울은 색을 보정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 노란색 기름방울은 파장에 따른 빛의 굴절률 차이와 번짐을 줄여준다. 또 파란색의 채도를 떨어뜨려 하늘을 제외한 다른 사물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한다. 붉은색 기름방울은 초록색 배경과 강한 대비를 이뤄 지상의 물체를 잘 구분해준다.
그러나 단순히 시력만으로 독수리와 사람의 눈을 비교할 수는 없다. 사람의 눈은 단순한 형태뿐만 아니라 일상의 복잡한 시각 자극을 느끼도록 고안됐기 때문이다. 화려한 색채를 느끼는 색각이나 손을 사용해 미세한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입체시처럼 생존에 적합하게 진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모겐족이 어떤 방법으로 시력을 검사해 9.0이 나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시력의 생물학적 한계는 2.5 정도이므로 9.0이란 수치에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이들의 시력이 보통 사람보다 좋다면 선천적으로 좋은 눈을 타고났을 가능성이 크다. 또 좋은 시력을 가진 사람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그 형질을 후손에게 전했기 때문에 현재 모겐족 대부분이 좋은 눈을 갖게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