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이 아주 먼 곳으로 이사 가게 된 것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버지가 온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무래도 몸이 너무 아프다’ 라고 호소한 지 3년 째 되는 해,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가는데 걸린 수많은 일들을 지나친 무렵이었다.
이사 마지막 날, 뒷정리 할 몇몇 젊은이들을 남겨놓고 쾌속정에 올라타는 아버지의 얼굴은 어딘지 흥분돼 있어서, 2년 전 대순항성(大巡航星)에 실어 보내는 짐들을 걱정할 때의 어두운 붉은 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빨간 색으로 보였다.
저쪽에 짐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가서 살펴봐야 한다’ 라며 식구들을 먼저 보내고, 환자인 당신은 마지막까지 지켜보겠다고 고집하며 그 비싼 아광속편(亞光速便)의 부유석(floating seat)을 예약하게 만들던 때보다는 덜했지만, 막상 떠나는 날이 닥치자 어딘가 조바심 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할 만큼 마음이 시달리고 계셨던 것 같다.
훌쩍 치솟아 오르는 배 꽁무니를 바라보며, 뒤에 남은 우리들은 저마다 지난날이라든지 다가올 미래의 변화들 같은 꿈들을 곱씹는 표정으로 터만 남은 땅바닥 여기저기에 우주복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
3년 전 그날, 깨질듯한 푸른 빛 천장에 덮여있는 뜰은 온통 풋풋한 봄 냄새로 가득했다. 연못 위로 너울대는 그림자들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모습은 살갗에 닿는 바람과 어긋난 박자로 출렁댔다. 싱숭생숭한 날이었다. 아버지 주변에 모인 식구들은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조용히 둘러서 있었다.
주로 어디가 아픈 거냐고 가족들이 묻자,
“온몸의 피부가, 세포들이 늘어지는 것 같다.” 라고, 오후만 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곤두박질치는 심장박동에 북받친 듯 목소리가 떨리곤 하던 아버지가 대답했다. 스스로를 억제하며 말하고 있는 그 모습은 두려움과 긴장, 여기저기 결리는 몸뚱어리에서 퍼지는 아픔을 힘겹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퀀튜터(quant-utor)로 달려갔다.
[지나치게 쾌적하기만 한 기후 탓이다.]
퀀튜터는 길쭉하고 퍼런 줄기들 사이로는 아무 그림도 비춰주지 않은 채 빼쭈름한 잎사귀들을 흔들며 속삭였다. 이런 식의 조언은 달리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가족들 중에 누구 하나 나중에 다시 물어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곧장 이사 이야기가 나온 걸로 봐서, 애초에 퀀튜터에 묻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는지 모르기도 했지만.
평정을 잃은 상태에서, 그 뻔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던진 질문의 답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정작, 이사 가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의 태도는 어쩐지 곤혹스러워 보였다. 얼굴에는 ‘나중에 다시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하는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만큼.
그 해 내내 이사장소를 물색하고 이런 저런 비용들을 알아보는 데 온 집안이 분주했다. 그 중에서도 어디로 이사 갈지를 결정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가까운 곳으로 가죠, 그냥 …….”
가계를 꾸리느라 버거운 살림꾼들이 노인들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꺼내면, 노인네들도
“신경섬유가 늘어졌을 때는 서늘한 곳에서 지내는 게 좋다는데 …….”
하고, 이런 저런 짐작들을 헤아리는, 생각 많은 눈을 하며 권해왔다. 생계에 분주한 바깥양반들은
“아무 데고 살기 좋은 곳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아마도 여러 차례 되뇌었을 자기희생에 대한 각오를 품은 부드러운 말씨로 제안했다. 어디로 이사 가건 고생하기는 매일반이라는, 일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호기로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어머니는 걱정에 찬 목소리로 반대했다.
“여러 가지로 적당한 곳을 찾아보자꾸나.”
결국 만만한 화성계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땅값이 싼 내행성 쪽은 만만찮은 가격의 최신형 집을 사기 전에는 낮 동안의 냉방비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 굳이 집을 싸 가지 않아도 좋을 천왕성 바깥쪽은 운송비와 이사기간 때문에 안 되고, 다른 은하로 가자면 아이들 교육문제가 걸렸다. 일단 집안 날씨부터 완전히 바꿔놓고 나서 다시 앞날을 생각해 보자는 의견으로 일치되는 데는,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바람만큼이나 당사자의 두말없는 응낙이 크게 작용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화성행 중형선의 비용이 복잡하게 변한다는 것 정도였다.
장장 3개월에 걸쳐, 매일 집을 나서는 사람들을 뺀 모든 식구들이, 말 그대로 기둥과 벽과 천정만 남기고 모든 짐을 꾸리는 일에 종일토록 매달려야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출항하는 화성행 중형선들은 화성과 지구의 거리에 따라 운임이 달라져서, 때로는 더 비싼 요금을 내고 일찍 출발한 배가 더 나중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개는 승객 쪽에서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한 무리한 일정을 감수하려는 경우였겠지만.
우리는 정확히 3개월 후로 다가온 화성 - 지구 최접 랑데부에 일정을 맞춰야만 했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곤란한 형편에, 기록적으로 싼 운임과 평소였다면 불가능했을 짧은 운항 소요일은 놓치기 아쉬운 기회였다.
하지만 어느 날, 뒤늦게 집에 돌아온 식구들까지 짬짬이 도운 끝에 그럭저럭 이사 준비가 끝나갈 즈음, 바닥재를 들어낸 뜰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퀀튜터가 뿌연 그림을 비춰냈다.
[남자, 둘. 손에는 단속 인광봉(斷續 印光棒, ticketing beam)을 들고, 팔을 내젓는다.]
가족들 모두 그 해 안으로는 이사 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금은 지나친 염려일지 모를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며칠 후로 다가온 랑데부를 기대하고 계신 거라면,”
먼저 나이든 쪽이 밋밋한 얼굴을 친근해 보이도록 주름지우며 말했다.
“구청에 등록하셔야 하는 신고 물품들 중 몇 가지를 제때 받아보시기가 힘들 겁니다.”
공무원들이 늘 보이는, 조금 지나치다 싶게 설명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태도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퀀튜터가 그들의 모습을 비쳐내는 순간, 통상적인 것이 아닌, 뭔가 성가신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만치, 별것 아닐 거라는 기대를 떨치려고 애쓰고 있는 가족들이 취할 만한 관점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뒤따라온 젊은 직원이 설명할 차례였다.
“최근에 개정된 행성간 화물 운송규정에 의하면, 퀀튜터를 제외한 모든 ‘우발적 변이경향을 내포한 물품’들은 행선 행성의 이동속도, 지금의 경우에는 화성의 공전 속도인 초속 24.01km 보다 빠른 선박에는 실을 수 없게 돼 있습니다.”
그는 몸에 밴 습관대로인 듯, 뜰 한가운데 솟아 있는 퀀튜터를 힐끔대며 말했다. 몇 번씩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짐 속에 섞여버린 ‘아직 활성상태인 퀀튜터’와 ‘버리고 가는 식물’ 들을 구분 못한 탓에, 이름 모를 은하계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운송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장관급 인사도 몇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순항성에 이삿짐을 실으라는 말은 …….
“집에는 그럴 만한 물건이 없을 텐데요?”
“다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머니의 따지는 말에, 선임자 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가족 이사에 불법 휴대물을 끼워 넣을 만큼 무모한 분들은 안 계실 테니까 말이죠.”
“대체 그 규정이라는 거에 포함되는 물품이 어떤 건데요?”
“그건,”
선임자가 얼굴 가죽을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 채우며 대답했다.
“말하자면 포유기(哺乳紀) 유물들 같은 종류의 물건들이겠죠.”
그제서야 모두들, 머릿속에서 딸그락거리던 조각들을 다 맞춘 표정이 되었다. 지구 달(moon)로 이사 오기 전까지 우리는, 아니 우리 부모님들은 목성계(Jupiter system) 칼리스토 달(Callisto satellite)에 살고 계셨었다. 초창기 행성개척 장비로 뒤덮인, 굳게 닫힌 항온 설비더미들 속에서.
항온 생활이 필연적으로 파국을 초래한다는 믿음은, 인류가 더 이상 외부의 환경만을 문제 삼지 않고 자신들의 육체와, 필요하다면 정신구조까지를 조화롭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되도록 이끌어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밑바닥에 깔려있었고,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시절의 흔적을 고수하려는 경향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행성계 최고의 호화 위성인 칼리스토에서의 생활이 남긴 흔적은, 그러한 반동적 보수성이나 과거의 영화에 대한 애착과 맞물려 우리 집안의 분위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아직까지 집안 구석 어딘가에는 그러한 흔적들이 실물로 남아있기도 했는데, 심지어 아버지는, 생장 능력이 떨어지는 노인네들까지 중추계만 빼고는 싹 변온체로 이식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옛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쨌거나 공연한 절차타령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고, 어머니의 태도도 사정조로 일변했다.
“애들 아버지가 쓰는 물건들이래야 몇 가지 안돼요. 선적 인부들이 와서 하중(荷重)이랑 연장성(extensionity)이랑 다 확인하고 갔다구!”
“아니, 아니오.”
선임자가 인광봉을 흔들며 말했다.
“그 정도 문제라면 저희들이 굳이 훼방을 놓을 리가 없지요. 설명을 좀 자세히 해 드리라구.”
“아시다시피, 최근 들어 퀀튜터 적재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실종 선박들 가운데는 계간 탐사 연구에 없어선 안 될 장비를 싣고 있었다거나 중요한 연구자들이 동행하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쯤 되면 저희 직원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미리 점검했을지 알만한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세 차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실종사고가 잇달아 일어난 후의 사고 조사에서, 선적 과정에서는 아무런 실수도 없었다는 것, 즉 실종된 선박들에 활성상태의 퀀튜터가 실려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했다. 문제의 핵심은, 아마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우발적 변이’가 있었으리라는 쪽으로 좁혀졌다. 다시 몇 차례 시험선 검증을 거친 후에, 조금은 의외인 ‘신고필 목록’이 추려졌다.
어머니가 뒤쪽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물었다.
“대체 어떤 물건들이라는 거죠?”
“상세한 품목에 대해서는 점검이 끝날 때까지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다음 정기선 출항에는 일정을 맞춰 주실 수 있는 거죠?”
내가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어차피 저희가 골라낼 물건들은 대순항성에 실으셔야만 하고, 점검 자체에 걸리는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일정을 느슨하게 잡으시는 편이 좋겠죠.”
“그런 거라면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어머니를 돌아다보았다. 퀀튜터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동시에, 선임자 쪽도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한데, 어쩌면 간단하게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젠데도 퀀튜터에 물을 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시간적인 문젭니다. 그런 미묘한 내용을 물었을 때, 질문 자체가 비선형 파장 동조를 일으켜 엉뚱한 대답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손으로 일일이 짐을 풀어봐야만 하니까요.”
어쨌든, 적어도 몇 개월은 견뎌야 하는 아버지가 고생스럽긴 하겠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시점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능한 한 일정을 단축시키기 위해, 어른 아이고 할 것 없이 전원이 목록 작성 작업을 돕는데 매달렸다. 어차피 나가서 일하는 식구들이나 아이들도 몇 달 가량의 휴가를 여유로 잡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집중적으로 구청 직원들을 도와주는 편이 나으리라 여겼다. 저 쪽에서도 나름대로 보조를 맞추어 주는 듯 했다. 퀀튜터를 뽑아서 뿌리를 말려놓는 일을 시작으로, 우리가 짐 꾸러미들을 하나하나 끌러서 늘어놓으면 그들은 퍽 능숙하게 인광봉을 휘두르며 풀어헤쳐진 짐 속에서 크고 작은 물건들을 추슬러 냈다. 우리들은 그 물건들의 어디까지가 목록에 포함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고, 사실 그들조차도 명확한 분류기준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불필요한 과잉단속을 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긴 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갔다. 노인들은 아버지를 보살피거나 여기저기 잔소리가 필요할 법한 곳들을 찾아다니고, 어머니가 구청직원들과 돌아다니며
“아니 그건, 나온 지 얼마 안 된 물건예요. 그 금속광택은 그냥 장식이야! 테두리에 칠이 벗겨진 시늉을 낸 거야. 그 작대기도 그렇구. 그래, 그건 찍어두 좋아요. 그건 사실, 어쩌면 골동품으로 내 놓아도 좋을지 모를, 칼리스토제 반공간 압착기지. 응? 그때는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둥근 손잡이를 허상처리 하는 게 유행이었다우.”
하고, 쉴 새 없이 얘기해 대는 식이었다. 가족들은 풀어헤쳐진 이삿짐들 사이로 늘어가는 번들번들한 인광(燐光)을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했지만, 이내 그런 일들에도 익숙해져 갔다.
나는 천장의 결맞음(coherence) 오차가 지나치게 벌어져서 펄러덕대는 곳을 찾아 손보는 일을 맡았다. 내게 있어서 지구 달 생활의 좋았던 점은,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도 천장을 짙푸르게 결맞추고 있는 ‘실제 지구의 퍼런 빛’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분명히 포보스(Phobos)에 가서 마주치게 될 화성 중계 영상으로 보는 반영(反映)과는 다른, ‘변함없이 확고한 푸른 하늘!’이었다.
어느날 꿈에서, 나는 우리 집 하늘과 결맞고 있는 지구 저위도 지역의 플랜타지네트(Plantagenet) - 이식형 중계 통신망 - 를 보았다. 고요한 바다(Mare Tranquillitatis) 같은, 흙먼지로 뒤덮인 벌판 위로는, 대낮에도 광전이 일어나 번쩍번쩍하는 하늘이 있었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허공을 맴도는 헛된 그림자들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들은 공중에 비쳐지는 현란한 내장을 출렁대며 아버지의 몸을 쑤셔대고, 그 사이에서 찌그럭대는 빛은 조잡한 무늬를 그의 살갗에 박아댔다.
아버지는 그르렁거리는 목을 쥐어짜듯 쿨럭 대며 미소 지었다.
“그래, 재밌는 얘기구나.”
“재밌고 끔찍한 그림이죠.”
얼굴을 찌푸렸다. 내게는 그 꿈이 퀀튜터의 속삭임처럼 여겨져서, 실제로 내가 무언가를 본 것이었는지, 귓가에 퍼지는 말들을 따라 흐르는 생각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는지, 헛갈리는 일이었다.
“한데, 아버지!”
나는 물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어?”
“우리들을 시험하는 것인지, 우리가 탈 이삿배를 시험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평범한 대가족 일단이 이사하는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점검한다는 건,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충분히 위성민으로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만,”
“이사 자체 보다는 금지물 점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엿보려는 것 같다는 거냐?”
“그렇게까지 말하면 지나친 거구요.”
“인광봉을 든 구청 직원이 분명한 목표 없이 행동할 리는 없지.”
“그건 그렇긴 해도,”
그 순간 나는, 어쩌면 그들이 하는 일은 말하는 내용과는 다른, 비밀스런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애초에 배에 싣거나 이삿집에 따라가거나 해서는 안 될, 그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중대한 가치를 가진 물건을 빼 놓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이리 와 봐라.”
아버지는 손을 들어 올려 나를 가까이로 불렀다.
“나는, 설사 그들이 우리 모두를 체포해버리거나, 나를 죽이려 든다 해도, 내가 가진 걸 내놓지 않을 생각이다.”
“대체 어떤 건데요?”
“쉿!”
아버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너는 내 딸이고, 똑똑하진 않아도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아이지. 그런 애들은 자신이 묻는 질문의 답을 아는 법이고.”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졌다. 분명히 아버지와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생각을 알아차릴 만한 존재는,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퀀튜터 말고는 없다. 그런데도 가족들 모두, 구청 직원들 모두가, 마치 상황을 예정된 결과로 몰고 가기 위해 애쓰는 게이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구요, 부인!”
눈을 크게 뜬 젊은 직원이 항변했다.
“어차피 이런 종류의 물건은, 칼리스토에서 가져오실 때의 분위기가 어쨌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시대에는 가시는 곳이 어디든 간에 금지될 수밖에 없는 품목입니다.”
“그렇군요!”
어머니는 구석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이 몸에 덮인 걸 홀라당 벗겨내지 않으면 아무도 이 달을 떠날 수 없겠군요!”
“굳이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부인!”
선임자가 나섰다.
“저희들이 이토록 기력이 쇠진해 있는 환자를 무턱대고 괴롭힐 리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굳이 이식수술을 받으시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너덜너덜한 편물 파자마를 벗겨 드린 다음에, 훨씬 더 안전성이 높은 소재의 덮개를 덮어드린다는데요!”
“그러다가 당신들이 실수하기라도 하면?”
“……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선임자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항온 시대의 흔적들, 특히 체내외에 남아있는 흔적들은 그걸 지니고 있는 인간들에게, 지극히 안정된 환경에서조차 급작스런 발작을 일으키게 하곤 했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그걸 ‘저주받은 흔적’이라고 불렀는데, 보건당국에서조차 그런 소문들을 굳이 덮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사를 포기하겠어요!”
자질구레한 짐들까지 들춰내느라 정기선을 놓쳐버렸을 때도 달리 불평이 없었던 어머니였지만, 이즈음 무척 흥분하기 쉬운 상태였다. 워낙에 차분하고 말썽을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선동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비를 걸어대는 태도는 가족들이 말리기 어려울 만큼 막무가내였다.
그 순간, 갑자기 눈을 뜬 아버지가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
“뭐든 원하는 대로 하게 해라! 내버려 두라구!”
아버지는 구청 직원들의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비웃는 말들을, 가족들이 느끼던 의구심 - 대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짐을 쌌다가 풀었다 하면서 최대한 필요한 물건들을 끄집어내어 이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인지 하는, 그리고 순전히 악의적인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과도한 간섭에 대한 경멸의 말을, 어머니에게만 얘기한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공무원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모욕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들의 단속행위는 순전히 기술적인, 구청의 성간 접수계 업무의 복잡다단한 필요절차의 한계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일어나는 뻔한 추리에서 비롯되는 종류의 의혹은, 우리 부모의 악담을 정당한 항변으로 느껴지게 할 만큼 가족 모두를, 심지어는 몇몇 구청직원의 행동을 머뭇거리게 할 정도의 호소력이 있기도 했다. 우리들은 어느 결인지 ‘차라리 닥치는 대로 짐을 싣고 은하 저편 어딘가로 사라져버려도 좋겠다’는 넌더리에 마음을 구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이고 전혀 불필요하게 여겨지는데도 발목을 휘감는 갈등이 주는 달콤함은 아직 평정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숨 돌릴만한 여유를 주기도 했다. 그것은 한숨을 들이켜며 어딘지 진솔해진 분위기가 된 가족들이 정신 없어진 틈에 가져볼 수 있는 종류의 호젓함으로, 감정의 밀물에 잠겨있는 차분한 이성의 숨결이기도 했다. 모두들 ‘구청 친구’라고 부르게 된 성실한 공무원들도 기계적으로 과업을 되풀이할 뿐,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갈만한 동작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한 차가운 태도로 일했다.
*
“그들은 멀리 간 게 아니다.”
“그러면요?”
“네가 봤다는 그 그림 그대로…….”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내 눈앞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가 지니고 있다는 그게…….”
“음…….”
아버지 몸속에 구겨 넣어졌다는 그림 혹은 빛이, 그것을 찾고 있는 자들, 즉 구청직원들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어째서 그것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실랑이를 벌이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저 쪽 편에는 이쪽에 감추어둔 것이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고, 이편에 와서 어디 있는지 헤매게 만든다. 감추고 있는 쪽은 지나치리만치 곤란한 상황에 내몰리게 되지만,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 게임치고는 잔혹하고 건조한 진행이고, 그게 아니라면 아버지 쪽에서 웃으며 말할만한 일이 못되는 비극이다. 나는
‘아버지가 보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은 아닐까? 혹은 아버지가 지금, 다른 차원에 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마저 들기 시작했다.
*
며칠간 작업이 중단됐다. 라디오 샤워가 사흘 동안 퍼붓는 바람에, 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된 직원들이 잠시 철수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나는, 주로 꿈속을 헤매 다녔다. 컴컴한 ‘수면(睡面)’ 위로 플랜타지네트의 사제들이 떠올랐다.
[유유히 놀고 있다. 어머니의 밤을 향해 날아가려 한다.]
‘…… 그들이야말로 마지막까지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다 …… 저 초끈 시대의, 열망이 현상을 창조하던 때, 인간의 생각이 사고를 강제하여 현상들을 다양한 양태로 취합하던 ‘전제된 해답의 탐색’시대에, 그런 흐름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삶을 추구한 나머지 모든 것을 버렸던 자들 …… 오로지 원자연(元自然)의 부자연스런 혼돈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근본주의자들 …… 그들이 만약 ‘새로운 종류의 우발적 변이’라는 식의 해(解)를 정해 놓고, 원하는 그림을 꾸며대는 짓거리를 스스로 저지르려는 거라면, 그들은 더 이상 병자 아닌 ‘병’ 자체다 …… 우리는 스스로의 고통스런 삶 위에 다시 모든 이의 고통을 얹은 채 신음을 참아내고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겨왔지만, 이미 ‘고통이나 병 자체가 되어버린 괴물들에게’는 아니다 …….’
“그들, 혹은 그것들이 원하는 게?”
“그렇지.”
“그런, 일종의 워프를 일으키기 위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더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듯, 아버지는 상반신을 비스듬하게 일으켜 땅바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차원 문제다. 하나의 차원은 그 자체로 다른 모든 차원에 앞서는 전체 계(全體 界)다. 그러면 여러 차원들의 집합은?]
“다수의 전체 계를 가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들의 총합인 계는 다수일 수 없죠.”
[하나의 차원, 특히 이 경우에는 ‘차원들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차원 전이는 불가능 …… ]
“…… 해 지고 마는 거지.”
“그런 거라면, 어떻게 배나 사람이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렇지. 있을 수 없지. 같은 우주 안에서의 이동은 무의미하지, 그것이 워프를 시도한 거라면.”
“시도?”
“아니면 그저 현상의 원인이라고 해 두자. 변이를 무화(無化)시키는 최초 요소.”
나는 몸이 뒤집혀 말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어느새 순항 보트(vor’t)가 α 턴에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해(解)를 찾았다. 병을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지니고 있던 그림, 아광속으로 우주 너머까지 날아가 버린 그림. 그리고 이름 모를 은하로 배를 보내서, 사실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을 불러오려고 했던 자들의, 그 사람들을 여기저기 허공에서 맴돌게 만들었던 자들의 …….
[결국 인간에게, 우주는 하나의 ‘세상’일 뿐이다. 그 바깥으로 넘어서는 것일지라도 다시 인간의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고 마는.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이나 부정은, 인간 정신 안에서 정립될 수 없는 오류의 추구다.]
병의 원인이나 치유법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던지고 있는 이 말에, 나는 복제된 그림을 보았던 것이다. 거기에는 Ω 턴을 그리고 있는 커다란 배의 그림이 있었다. 그 안에는 끊임없는 재생을 통해서만 온전한 것일 수 있는 인간 정신이, 그려낼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실현시킬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사고력이, 실려 있었다. 또한 이미 그려진 그림을 붙드는 순간, 어떠한 진정한 변화조차도 무화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도 한 현상이 …….
어쩌면 해(解)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잠재된, 사고 작용에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오류 없는 논리적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제시된 물음에 대해, 단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다. 마치 단속인광 속에서, 내 꿈과 아버지의 뱃속에서, 가족들의 머릿속에서 번쩍였던 것처럼, 무수히 많을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