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8-32라면 뭘까. 여성의 신체 사이즈? 아니면 분양 중인 아파트 평수나 로또 당첨번호? 이 숫자들은 사람의 관심사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숫자는 적절히 조합하기만 해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며 풍자했지만, 현대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원인을 살펴보면 매사에 ‘수량화’하기 좋아하는 인류의 습성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길을 걷다가 높은 건물을 볼 때면 ‘얼마나 높을까?’라는 궁금증을 갖는다. 몇층짜리인지 세보고 1층이 몇m인지 생각해 건물 높이를 가늠해본다. 이처럼 ‘현재 알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수량을 대략 가늠하는 일’을 어림이라고 부른다.
외계문명의 수, 아직은 황당한 값
사람들에게 어림을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어림을 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찾고 머리를 써서 계산하거나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림은 단순한 찍기가 아니며 과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물론 건물 높이를 어림하는 간단한 경우도 있지만 핵발전소 주변 방사선 수치,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를 어림하는 복잡한 경우도 있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다양한 과학지식과 고차원의 논리적 사고가 필요하다.
1961년 SETI 프로젝트(외계지적생명체 탐사계획)의 주창자인 미국 천체물리학자 프랭크 드레이크 박사는 흥미로운 식을 발표했다. 우리은하 속에 존재하는 지적 문명의 수를 구하는 식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이라 부르는 이 식에는 우리은하에서 생명체가 발달하는데 적합한 항성(별)이 탄생하는 비율, 그 별이 행성계를 가질 확률, 그 행성계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의 수처럼 지적 외계문명의 존재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고려했다.
드레이크 방정식에 등장하는 수치는 어느 하나도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외계 문명의 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대략 어림할 뿐이다. 물론 과학기술이 발달해 여러 값이 정확하게 밝혀진다면 그 수치가 참값에 근접할 것이다.
과학 역사를 보면 드레이크 방정식과 비슷한 예가 있다. 빛의 속력, 인간의 유전자 수가 처음에는 황당한 수치로 어림됐으나 점차 이론과 측정이 정교해지면서 현재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된 상태다.
종이조각으로 핵폭탄 위력 가늠
어림을 잘하는 것은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의미다. 재래시장에서 야채, 과일, 고기를 파는 상인은 손으로 대충 집어 저울에 올려놓아도 거의 정확하다. 음식을 만드는 주부는 저울 없이 익숙한 솜씨로 음식 양을 어림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물리량을 어림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대표적인 과학자가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페르미는 중성자가 인공방사능을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임을 밝혀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핵폭탄을 발명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어림을 잘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남부의 사막 트리니티에서 실행한 핵폭탄 실험현장에서는 종이조각 한장으로 핵폭탄의 위력을 어림했다.
페르미는 트리니티 핵폭탄 실험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그 폭발이 있은 직후 40초가 지난 뒤 공기돌풍이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폭탄의 위력을 알기 위해 2m 정도의 높이에서 작은 종이조각을 떨어뜨려 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분명히 바람 한점 없었으므로 폭파가 진행되는 동안 종이조각의 위치변화를 이용하면 그 위력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종이조각이 이동한 거리는 2.5m였다. 이는 TNT 폭약 1만톤 정도의 위력에 해당한다.”
페르미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림을 즐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동료들과 만나면 ‘시카고에 있는 피아노 조율사의 수는?’과 같은 문제를 내곤 했다. 그를 기념해 어림문제를 ‘페르미 문제’(Fermi Problem)라고도 부른다.
순한 소주 정말 순할까
유럽연합(EU)은 믿을 만한 상거래를 위해 어림을 도입했다. EU에서 최근 ‘’란 기호를 만들었다. 는 ‘estimation’(어림)의 머리글자다. 프랑스나 영국에서 수입한 커피나 로션의 라벨을 보면 50ml, 100g라는 식의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호를 덧붙인 이유는?
상품의 양은 측정이 불확실하고 어림과 함께 이뤄져 오차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오차의 범위가 무제한일 수 없다. 예를 들어 50ml 상품이라면 0.5ml의 오차는 무시할 수 있으나 20ml의 오차는 문제가 된다. 따라서 오차의 크기를 제한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기호가 붙은 상품은 내용물의 평균 양이 표시된 양보다 적지 않고 내용물의 양이 오차가 있더라도 그 오차가 적정치를 넘지 않는다. 또 오차의 적정치는 상품이 50g이나 50ml 이하라면 9% 이내, 1kg이나 1L 이상이라면 1.5% 이내다.
e라는 기호는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주 전쟁’에서 참고해야 할 기호다. 소주 생산업체들이 소주 도수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소주 도수를 20도, 20.1도, 19.8도로 표시한다. 0.3이라는 차이가 의미 있을까. 소주 도수의 오차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오차가 약 0.3도라면 20도 소주가 20.1도 소주보다 순하다고 볼 수 없다. 반면 19.8도의 소주는 20.1도의 소주보다 순하다. 이제 상품의 오차 범위에 대해 소비자도 알아야 할 시점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어림에 익숙하다. 음식을 할 때는 ‘소금 약간’‘파 적당히’‘참기름 약간’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서양 음식인 케이크를 만들 때 쓰는 1ts(찻숟가락), 1cup(컵)이란 용어와는 사뭇 다르다. 건축에서도 비슷하다. 전통 건축에서는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덤벙주초(자연주초)가 많이 나타난다. 초석 위에 기둥을 임시로 세운 뒤 본을 떠 잘라 맞췄는데, 눈어림과 손어림을 최대한 이용한 방식이다. 능숙한 장인이 어림짐작을 통해 기둥을 세울 때 수습공은 그 옆에서 학습을 한다. 이같은 학습 방식은 직관을 발달시키고 창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어림은 과학지식을 창조하는 과정,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 이론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림을 연습하는 일만으로도 과학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종이 한장 만으로 핵폭탄의 위력을 어림할 수 있는 과학자는 복잡한 실험장치와 컴퓨터가 있어야만 그 값을 알아내는 과학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을 기억하자. 어디에서 무엇을 하거나 어림에 능숙해지는 과정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출발점이다.
지구에서 달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릴까
어림은 초보과학자들, 특히 실험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갖춰야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교육과에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분야에 관련된 어림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머리카락의 수, 한학기 동안 메릴랜드대학생들이 먹는 라지 사이즈 피자의 수, 지구의 자전 때문에 내 몸에 생긴 각운동량 크기와 같은 어림문제를 수십여 가지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림값은 어느 정도 정확해야 할까. 예를 들어 어떤 기자가 월드컵경기 중 거리응원을 하는 사람의 수를 어림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거리응원을 하는 사람의 수를 10만11명이나 10만25명이라는 식으로 어림할 필요는 없다. 10만여명이라고 해도 TV나 신문 보도용으로 충분하다. 이제 몇 가지 어림문제에 도전해보자.
1. 강원도 전지역에 하루 동안 평균 200mm의 비가 내렸다. 강원도에 내린 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올여름은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중북부지방의 피해가 극심했다. 도대체 물의 양이 어느 정도 불어났는지 어림해보자. 강원도 면적은 약 2만8000km2이다.
비가 200mm 정도 내렸으므로 강원도 전역에 내린 비의 부피는 56억m3 정도다. 이는 63빌딩만한 물탱크(부피 533만6000m3)를 1000여개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이며, 국민이 21개월 정도 쓸 수 있는 가정용수의 양에 버금간다. 우리 국민이 하루에 가정에서 쓰는 물은 850만m3(177L×4800만명) 정도다.
2. 전자렌지를 이용해 커피 한잔 마실 물을 끓이려 한다. 몇초 정도가 적당할까?
전자렌지가 있으면 쉽게 커피를 탈 수가 있다. 전자렌지를 이용하면 물을 금방 뜨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00W의 전자렌지를 이용해 100ml의 물을 데운다고 가정하자. 대략 몇초 정도 데워야 할까.
커피를 타는데 적당한 온도는 80℃ 정도며 물의 비열은 4200J/kg이다. 물 100ml는 0.1kg 정도이고 상온에서 물의 온도는 대략 20℃이다. 전자렌지는 매초당 1000W의 전기에너지를 소비하는데, 그 효율을 50% 정도라 한다면 0.1kg×4200J/kg×(80-20)℃=0.5×1000W×시간이라는 식이 성립한다. 이 식을 만족시키는 시간은 대략 50초다.
3. 맑은 날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의 질량은 어느 정도일까?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은 근두운(筋斗雲)이라는 구름을 타고 다녔다. 그래선지 맑은 하늘에 둥실 떠있는 뭉게구름을 보면 근두운이 떠오른다. 솜털처럼 가벼워 보이는 구름. 정말 솜털처럼 가벼울까.
근두운처럼 생긴 작은 뭉게구름을 적운이라고 하는데, 보통 2km 높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 만일 1m3 당 6g 정도의 수증기가 포함된 반지름 200m의 구 모양인 공기덩어리가 상승하고 있다고 하자. 지면 기온이 20℃라 할 때 그 공기덩어리가 2km 정도 상승하면 응결을 시작하고, 400m 정도 더 올라가면 0.6g/m3 정도의 수증기가 응결한다. 공기덩어리의 부피가 대략 3300만m3(4/3π×(200m)3)이므로 구름 내부에 포함된 물방울의 질량은 20톤가량(밀도×부피=0.6g/m3×3300만m3)이다. 지상에서 손바닥만 해 보이는 작은 구름 속 물방울의 질량도 수십톤 이상이다. 맑은 날 하늘에 있는 커다란 뭉게구름의 경우 물방울의 질량은 수백만톤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4. 우리나라의 땅을 개인에게 고르게 분배한다면 1명당 몇m²의 땅을 가질 수 있을까?
요즘 서울 시내의 아파트 한채를 사려면 몇십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저축만 해야 할 판이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많아서일까. 부동산 전문가들은 이제 아파트보다는 땅을 사두라고 충고하지만 땅을 사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만일 우리나라의 땅을 국민에게 공평하게 나눈다면 개인마다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 남한 면적이 약 9만9000km2이고 인구가 4800만여명이므로 대략 1명당 2100m2의 땅이 돌아간다. 한평이 3.31m2이므로 1명당 634평가량 가질 수 있는 셈이다. 4인 가족이라면 2500평 남짓한 땅을 가질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땅의 65%가 삼림, 20%가 농경지, 강과 도로 같은 나머지가 15%이다. 따라서 4인 가족은 1600여평의 산, 500평의 논과 밭, 370여평의 연못과 길을 소유할 수 있는 셈이다. 즐거운 상상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2100m²의 땅에 1명이 살고 있는데 비해 홍콩국민은 13명, 미국국민은 0.06명 정도 살고 있다.
5. 지구에서 달까지 걸어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평생 걸어도 도착할 수 없는 아득히 먼 거리일까. 대략적인 계산을 해보면 알 수 있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약 38만km다. 보통 어른은 1시간에 4km를 걷기 때문에 달까지 걷는다면 9만5000시간이 걸린다. 자는 시간(8시간)과 식사시간(2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걸어간다고 가정하면 20년 정도가 걸린다.
문제를 조금 바꿔 과학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개인용 우주선을 타고 달을 왕복하는 시대가 됐다고 하자. 지구에서 달까지 하루 만에 왕복할 수 있으려면 우주선은 얼마나 빨라야 할까. 대략 계산해보면 시속 3만km보다 빨라야 한다. 우주탐사선 중 가장 빠른 것은 1977년 발사된 미국 보이저 1호로 알려져 있다. 보이저 1호는 최근 시속 6만km 이상으로 우주공간을 날고 있다. 보이저 1호 정도의 우주선이라면 지구와 달이 일일생활권으로 바뀌는 미래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6. 냉장고에 200ml 우유를 몇개 정도 넣을 수 있을까?
배달 온 우유를 제때 먹지 못해 냉장고에 10개 이상 보관한 적이 있다. 집에 있는 냉장고에 우유를 최대 몇개까지 넣을 수 있을까. 먼저 냉장실과 냉동실을 포함한 냉장고 전체 용량을 어림해보자.
냉장고는 인체의 평균적인 치수를 고려해 만들었다. 예를 들어 내부의 가로와 깊이는 사람의 한팔 길이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가로와 깊이를 대략 60cm라고 하자. 한국인의 평균키는 174cm이므로 냉장고 내부의 높이는 대략 170cm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냉장고의 용량, 즉 내부 부피는 0.6m×0.6m×1.7m =0.61m3, 즉 610L 정도다. 여기서 냉장고 내부의 칸막이를 감안하면 실제 용량은 600L 정도다.
우유는 팩의 모양을 고려해야 하므로 1개당 차지하는 부피는 250ml다. 그렇다면 600L 냉장고에 200ml 우유를 2400개(600/0.25) 정도 넣을 수 있다.
어림은 인공지능, 상업 분야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최근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프라빈 패리토시 교수는 어림을 응용한 인공지능 연구를 하고 있다. 패리토시 교수가 참여한 프로젝트의 최종목적은 어림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그는 현재 컴퓨터가 계산은 잘하지만 물리적인 직관이 없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수치를 잘못 입력해 계산한 결과 지구 반지름이 10m로 나와도 오류로 판단하지 못한다. 또 컴퓨터는 ‘정부의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이번 휴가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와 같은 문제를 스스로 풀지 못한다.
패리토시 교수는 인간이 어림을 할 때 사용하는 사고 패턴을 분석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이를 발전시켜 컴퓨터가 인간과 함께 모형을 개발하거나 예산을 짜는 일 같은 활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가 완성되면 컴퓨터는 한층 더 사람처럼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