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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혼돈이 만든 초소형 레이저

광혼돈현상제어연구단

2006 ‘엠프레스컵’ 9볼 포켓볼 대회가 9월 인천에서 열렸다. 언론의 주목을 받은 한국의 차유람 선수는 전 세계 챔피언 자넷 리 선수에게 0대 5로 완패했지만 매순간 승부를 예측할 수 없었다. 묘기에 가까운 샷이 이어질 때마다 관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선수는 공과 공 사이의 각도와 방향을 잰 뒤 큐대를 밀어보지만 늘 예상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살짝만 빗맞아도 공은 기대했던 방향과 다르게 굴러간다. 즉 초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전혀 다른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혼돈 현상 즉, 카오스(chaos)다.

그런데 혼돈 현상을 이용해 초소형 레이저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바다 건너 미국 로스앤젤로스에 허리케인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나비효과’는 혼돈 현상의 한 예다. 나비의 날갯짓이라는 대기의 미묘한 흔들림이 나중에 허리케인이라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빗댄 표현이다. 혼돈 현상은 장기간의 날씨 변화나 주식시세의 변동, 전염병의 확산, 생태계의 변화 등 다양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혼돈 현상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198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 혼돈 현상이라고 해서 무질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질서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1990년대 혼돈현상은 호흡과 맥박, 뇌와 신경망 연구 등 생물학 분야에 집중됐다. 반면 배재대 물리학과 김칠민 교수는 초소형 레이저 연구에 혼돈 현상을 이용하고 있다.


전자 비켜, 빛이 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존재는 빛입니다. 초속 30만km로 움직이는 빛을 전자 대신 이용하면 현재보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전달할 수 있습니다.”

레이저는 일반적인 빛에 비해 퍼지지 않고 똑바로 진행한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한 레이저라 하더라도 발생 회로의 특성상 불규칙한 신호가 나오기 마련인데, 레이저에서 발생한 혼돈 현상은 정밀도와 출력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지적돼 왔다.

현재 가장 작은 레이저는 지름 300μm(마이크로미터, 1μm=100만분의 1m)의 다이오드 레이저다. 하지만 고정밀 전자회로에 신호를 전달하는 광원으로 쓰기에는 너무 크다. 김 교수의 목표는 레이저의 크기를 수십μm 이하로 만드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보일 정도다. 이렇게 작은 레이저가 개발돼야 나노크기 반도체에 들어갈 광집적소자의 광원이 될 수 있다.

기존 레이저는 평행한 두 거울 사이에 오가는 빛의 파장이 일정하도록 거울의 거리를 조절해 특정 파장의 빛을 증폭시키는 방식이다. 레이저는 빛의 방향성과 일정한 파장, 센 강도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광원에서 나온 빛 입자가 산란시킨 공기 중의 전자들이 불안정한 에너지를 내놓기 때문에 이때 나온 레이저는 파장 범위가 넓어지고 여러 곳으로 퍼진다. 따라서 원하는 곳으로 전자신호를 보낼 수 없다. 광컴퓨터나 광스위치를 만들기 위해 단방향성을 갖는 레이저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다.

과학자들은 원형 레이저, 나선형 레이저 등을 개발했지만 빛이 퍼지는 성질은 여전했다. 레이저의 출력도 강약이 일정하지 않았다. 김 교수팀은 먼저 광 혼돈 개념에 기초해 레이저가 발진하는 방식을 살피기 시작했다. 레이저를 발진시키는 장치인 마이크로디스크의 모양에 따라 빛의 파장과 방향성이 달라지는 특성을 분석한 것이다.

마이크로디스크 안에서 발생한 빛은 내부에 갇히기도 하지만 일부는 표면을 타고 외부로 새는 빛도 발생한다. 바로 표면파다. 원 모양의 마이크로디스크는 표면파가 사방으로 새어나와 방향성을 지닌 레이저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김 교수팀은 모서리가 둥근 이등변삼각형 모양의 마이크로디스크를 만들자 표면파가 한 방향으로 집적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비록 실험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성과였지만 김 교수는 “단방향 레이저를 개발하는데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순간 김 교수는 ‘카오스 빌리어드’(chaotic billiard) 연구그룹을 생각했다. 카오스 빌리어드는 당구대처럼 생긴 모양이 만드는 혼돈 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집단이다. 찌그러진 원 모양에서 나오는 레이저를 방정식으로 풀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혼돈 공진기’(공명기)가 필요했다. 혼돈 공진기는 당구공이 벽에 부딪친 각도만큼 반사돼 나가듯 빛이 일정한 파장을 유지하며 반사를 반복하도록 만들어진 장치다.

고된 노력 끝에 연구팀은 다양한 모양에서도 레이저가 나가는 빛의 방향과 파장을 예측할 수 있는 레이저 방정식 코드를 완성했다. 다양한 마이크로디스크 레이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것이다. 특히 나선형 공진기에서 발생하는 별 모양의 레이저 ‘준(準)상처공진모드’(Quasi-scarred Resonances)를 발견한 성과는 2004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Physical Review Letters)의 표지를 장식했다.

혼돈 공진기에서 혼돈이 클수록 레이저의 단방향성도 커졌고 출력의 강도도 일정하게 안정됐다. 이처럼 찌그러진 레이저 방정식 코드를 풀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 일본 국제전기통신기초기술연구소(Advanced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 International)의 하라야마 그룹과 김 교수팀뿐이다.
 

둥근 이등변 삼각형 모양의 마이크로디스크 레이저는 밖으로 새는 표면파를 한 방향으로 모아준다.



빛을 타고 가는 정보고속도로

김 교수는 광 혼돈 현상을 이용해 ‘양자 암호’도 연구하고 있다. 빛의 방향성을 이용하는데, 빛이 진동하는 방향이 세로축 방향이면 1, 가로축 방향이면 0으로 지정해 2진법으로 정보를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한쪽에서 1이란 신호를 보내면 반대편에서도 1이란 신호를 받아야 한다. 만약 중간에 누군가 정보를 가로채면 1이란 신호가 0으로 바뀌게 돼 도청 유무를 알 수 있다.

아직은 이론을 검증하는 단계에 불과하지만 10월에는 실제로 제작한 100μm 크기의 마이크로디스크에서 초소형 레이저가 어떻게 나오는지 테스트할 예정이다. 실험에 성공하면 정보를 초당 3Gb(기가비트, 1Gb=10억b)에서 수십Gb까지 보낼 수 있다. 김 교수의 말처럼 유비쿼터스 사회를 위한 정보 고속도로가 개통될 날이 그리 먼 미래는 아니다.
 

혼돈 안정화법을 이용한 고출력 레이저^뢰슬러 전기회로에서 나온 혼돈 신호가 레이저 다이오드에서 전압을 조절해 네오디늄 야그(Nd:YAG) 관에서 나오는 레이저의 불안정한 출력을 바로잡아 준다.


양자암호로 국가간 정보전에 대비하자

“이제는 한숨 돌리고 신명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칠민 교수는 1998년 창의연구단 단장으로 선정됐지만 연구초기 아무런 성과를 내놓을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면서 배재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타대학의 대학원생이나 연구원으로 연구단을 꾸렸다.

뜻밖에도 다양한 곳에서 모인 연구원들은 인접 학문에 대한 서로의 이해를 높여주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 결과 김 교수와 임승환, 이수영 박사가 함께 한 연구 성과는 세계적인 학술지 ‘피지컬 리뷰 레터스’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이밖에도 인용횟수가 높은 ‘옵틱스 레터스’(Optics Letters)나 ‘피지컬 리뷰 A’(Physical Review A)와 같은 국제학술지에 4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단방향 발진 마이크로디스크 레이저 디자인은 특허를 출원한 상태다.

단방향 발진 마이크로디스크 레이저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레이저와 혼돈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레이저 방정식을 푼 연구단은 일본의 하라야마 그룹과 김 교수팀이 유일할 정도다.

김 교수의 활동도 바빠졌다. 지난해에는 고등과학원(KIAS)에서 주최한 국제학회에서 양자암호와 관련된 초청강연을 했고, 올 5월에는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광학회와 벨로루시에서 개최된 ‘국제 양자정보학회’에서 연구단의 양자암호 최신 버전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또 9월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양자역학과 혼돈학회’에 초청연사로 나섰다. 그만큼 광혼돈현상제어연구단이 세계적인 연구팀으로 성장한 것이다.

김 교수는 “마이크로디스크 레이저를 연구하고 양자 혼돈을 이용한 암호화 기술을 개발해 국가간 정보전에 대비해야 한다”며 “광학과 전자공학를 결합한 ‘포토닉스’(Photonics)분야에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단방향으로 발진하는 레이저를 개발하는 광혼돈현상제어연구단의 연구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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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서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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