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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독립국가 건설하는 화학자

한국원자력연구소 고문 장인순

한국원자력연구소 장인순(65) 고문은 ‘못 말리는’ 수학 예찬론자다. 올해 4월 소장직을 물러남으로써 27년의 연구소 ‘현역 활동’을 마쳤지만 아직까지 박사급 연구원들에게 틈만 나면 ‘수학공부 더 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원자력이란 과학 분야를 탐구하려면 수학이 필수입니다. 원자의 핵이 얼마나 단단한지 아세요? 철의 100조배는 될 겁니다. 이 핵을 깼을 때 나오는 엄청난 힘이 원자력인데 그 과정과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기술하는 학문이 바로 수학이에요.”

그의 학문관은 한 마디로 ‘삶의 뿌리는 과학이요, 과학의 뿌리는 수학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연구소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성을 갖춘 박사들도 ‘뿌리’를 강조하는 장 고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뿌리를 갖춘 다음에는?

“누구에게나 인생항로에서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칩니다. 이럴 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는데 두려움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장 고문은 한 마디로 한국 원자력발전 역사의 산 증인이다. 핵연료 제조공정 국산화 성공, 한국표준형 원자로 개발, 국내 유일의 연구용원자로 ‘하나로’ 개발 등 굵직굵직한 연구성과를 이끌어온 주역이다.
 

한국원자력연구소 고문 '장인순'


어머니의 사랑으로 실험실 사고 극복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늘 새로운 개척지였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이 새롭다보니 늘 두려움이 앞섰지만 이를 극복해내다보니 커다란 보람과 영광이 주어졌다고 한다. 사실 그의 전공은 화학이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조언으로 좀더 실용적인 학문인 화학을 택했다. 고려대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후 1969년 캐나다 온타리오대 화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바로 이곳에서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연구주제는 자연에서 가장 불안정하다고 알려진 원소인 불소의 특성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1974년 어느 날 불소화합물을 합성하던 중 폭발사고가 났어요. 다행히 얼굴은 무사했지만 팔과 복부에 심한 화상을 입었죠.”그는 허벅지 피부를 떼어내 오른팔에 이식하는 대수술을 마쳤다. 40일간의 입원과 2년의 통원치료를 거쳤다. 가장 큰 문제는 실험에 대한 극심한 공포감.

“좀처럼 실험실에 들어갈 엄두가 안 났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실망할까봐 다시 용기를 냈죠.”

1969년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어머니가 방에 들어오셨다. 눈물을 흘리며 몇 마디 당부하시더니 하얀 종이에 곱게 싼 물건을 건네주고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풀어보니 태극기였다. 마음이 너무나 숙연해졌다. 장 고문이 실험실 폭발 사고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던 가장 큰 힘은 평생 아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던 어머니, 그리고 태극기였다.

훗날 장 고문은 자신의 경험을 ‘응용’해 두 딸에게 써먹었다. 딸들이 유학을 떠날 때마다 가방에 몰래 태극기를 넣어둔 것. 나중에 유학생활을 하던 딸의 집에 가보니 벽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태극기 한 장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애국심을 불러일으킨 셈이었다.

핵연료 제조공정 국산화 성공

어머니는 장 고문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만 기절해버렸다.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당장 뛰어오기는커녕 전화 연결조차 어려웠다. 장 고문은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드렸다.

지도교수는 장 고문에게 실험주제를 바꾸라고 권했다. 하지만 장 고문이 같은 실험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노발대발하며 ‘실험실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장 고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지도교수 몰래 실험실에 들어가 연구에 매진한 것. 예정보다 3년 늦어졌지만 1976년 드디어 그는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불소는 원자력발전 원료를 만드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포함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죠. 마침 한국에서는 경제부흥을 위해 원자력연구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막 형성되던 때였어요. 주저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하지만 장 고문이 1979년 3월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왔을 때 연구여건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실험대는 나무상자를 쌓은 위에 비닐을 덮은 것이 고작이었고 연구원은 5명에 불과했다. 특히 당시 국내에서 원자력발전이란 분야는 매우 생소했다. 화학자가 원자력을 연구한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이 곧 국력이라는 믿음으로 불철주야 연구에 임했다. 가장 보람을 느끼는 성과의 하나는 1989년에 실현한 핵연료 국산화였다. 원자력발전에 사용되는 핵연료는 주로 분말 형태의 이산화우라늄(UO₂)인데 이를 ‘도자기처럼’ 단단하게 구워 원자로에 넣는다. 장 고문은 바로 이산화우라늄 분말을 만들어내는 공정을 국산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이 기술을 수입하려면 400억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120억원의 연구비로 실현시켜낸 것.

1979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쏟아낸 연구성과는 수천 건에 달한다. 하지만 원자력기술은 국가별로 워낙 경쟁이 치열해 보안상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평생 숨 쉴 틈 없이 한 길만을 달려온 그였지만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거나 실험이 실패할 때면 시를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낭만도 있다. 사실 책장에 제일 많이 꽂힌 것은 전공서적이 아니라 시집이다. 모은 시집만 700여권에 달한다.

도시락을 거의 싸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에도 시집은 그를 위로해주는 안식처였다. 방과 후 바닷가에 가서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캐나다 유학시절 유일한 낙은 이따금 부인과 함께 셰익스피어 전용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일이었다.


매일 첫 차를 타는 심정으로

“과학자는 자연의 질서를 찾는 사람입니다. 시를 통해 아름다운 심성을 익히면 자연의 숨겨진 비밀을 찾을 수 있는 안목이 길러져요.” 시와 과학을 연결시키는 그의 독특한 철학이다.

장 고문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이다. ‘현역 활동’을 떠난 지금도 예전처럼 오전 7시 30분까지 연구소에 출근한다. 불과 100년 전에는 인간의 행동반경이 기껏해야 100km 안팎이었지만 지금은 지구 전체가 일일생활권에 들어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하면 이 경쟁사회에서 낙오하고 만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남들이 휴식을 취하는 새벽과 저녁이 장 고문이 ‘즐겨’ 활용하는 시간대다. 매일 첫 차를 탄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원자력과의 만남이 제 생애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다만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어요. 핵연료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인 농축우라늄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일이죠.”
그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국제적 우려 때문에 농축우라늄 전량을 수입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원자력발전이라는 평화적 목적을 위해 우라늄농축기술을 국산화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생을 원자력발전 외길에 헌신한 그의 열정과 성과에 대한 국가의 표창이 이어졌다. 1985년 국민훈장 목련장, 1988년 과학기술처장관상(연구개발상), 2005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의 '수학 가정교사'를 도맡았다. 수학은 장인순 고문에게 '가장 아름다운 학문'이다.

 

200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김연정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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