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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로.본.능.을 밝힌다

시각이 빚어낸 과학적 본능

세로로 놓인 베개, 불편해서 잠이 잘 안 올 것 같다. 위로 길게 세워놓은 칠판, 강의 한 번 하려면 사다리까지 타야겠지. 좁고 가는 렌즈가 달린 안경, 답답해서 제대로 보이긴 하려나. 높고 좁은 버스정류장,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엔 비 맞기 십상이다. 키보다 2배는 높아 보이는 축구 골대, 세계 최고의 골키퍼도 악전고투할 게 뻔하군. 그럼 가로로 하면 되잖아!

눈은 좌우로, 시선은 가로로

지난해 8월 출시돼 선풍적인 인기를 끈 애니콜 SCH-V500(삼성전자)의 광고 내용이다. 인기 비결은 확 바뀐 휴대전화의 화면 모양. ‘휴대전화는 세로’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화면을 가로로 돌려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가로본능 폰’이다. 광고는 ‘만약 세로라면 얼마나 불편할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가로본능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냈다.

가로본능 폰을 디자인한 삼성전자 황창환 수석디자이너(정보통신총괄 무선사업부)는 “휴대전화로 음성 통화만 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3~4년 전부터 시작된 디지털 컨버전스 바람이 가로본능 폰을 디자인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요즘 휴대전화 하나만 있으면 게임, TV 시청, 영화 감상에 인터넷 접속까지 한번에 해결된다. 휴대전화 화면은 TV 화면도 됐다가, 컴퓨터 모니터도 됐다가, 영화관 스크린도 돼야 한다는 뜻.

그런데 이들 화면은 가로가 대부분이다. 휴대전화의 세로 화면으로 영화를 보면 가로 세로 비율 때문에 화면의 위아래를 상당 부분 낭비하게 된다. 화면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황 수석은 “시각적으로 편안하면서도 효율을 높일 수 있는 화면이 가로로 긴 형태”라고 말했다. 찾아보면 우리 주변은 가로본능 천지다. 각종 디스플레이는 물론 액자, 창문, 신용카드 등 모두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길다. 왜 그럴까.

한성대 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지상현 교수는 “사람의 눈이 좌우로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뇌에 전달된다. 이 때 왼쪽 눈의 정보는 오른쪽 뇌로, 오른쪽 눈의 정보는 왼쪽 뇌로 투사된다. 오른쪽 뇌는 전체 공간의 정보를 처리하는 기능이 우세하고 왼쪽 뇌는 상세한 정보를 잘 처리한다. 바꿔 말하면 왼쪽 눈은 대상이 속해 있는 전체 공간을, 오른쪽 눈은 대상의 구체적인 정보를 잘 인식한다.

지 교수는 “뇌는 전체를 먼저 파악한 뒤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을 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왼쪽에서 오른쪽, 즉 가로방향으로 시선이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동차 광고에서 안정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차 일부분을 오른쪽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시선의 방향을 고려한 것이다.


시각세포는 가로를 좋아해

가로본능이 실제로 있긴 한걸까. 서울대 심리학과 이춘길 교수는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가로에 대해 생득적 경향이 있고, 여기에 교육 등 후천적 환경이 더해진 가로본능이 있다는 것.

지난해 이 교수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로로 쓰인 한글과 세로로 쓰인 한글의 읽기 능력을 비교한 것이다. 그 결과 가로는 한 번에 평균 4.6자를, 세로는 평균 3.6자를 읽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세로보다는 가로로 읽을 때가 식별능력이 더 뛰어난 것이다. 이유가 뭘까. 보통 글을 읽을 때 시선은 ‘고정’과 ‘도약’을 반복한다. 한 번에 쭉 연달아 글을 읽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정한 위치에서 시선을 고정시킨 뒤 다음 고정 위치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대개 4분의 1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고정하고, 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시선을 도약한다. 글을 잘 읽을수록 고정 시간은 짧아지고 도약 거리는 길어진다. 이 교수는 “가로 읽기에서는 세로 읽기에서보다 도약 거리가 길기 때문에 같은 길이의 글을 읽으면 시선의 고정 횟수가 줄어든다”며 “이로 인해 가로 읽기가 세로 읽기보다 빠르다”고 설명했다.

망막에 있는 시각세포의 분포를 등밀도곡선으로 그려봐도 가로본능을 알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래프 형태가 세로보다 가로로 퍼져 있는 모양”이라며 “이는 가로 식별능력이 세로보다 우세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동물도 가로본능이 있다. 토끼 같은 포유동물의 망막에 있는 시각세포의 분포를 등밀도곡선으로 그려보면 오히려 인간의 등밀도곡선보다 가로 방향이 더 우세하게 나타난다. 토끼에 비하면 인간의 가로본능은 ‘본능’이라고 부르기가 다소 무색할 정도다. 이 교수는 “진화적인 측면에서도 가로본능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달리는 장면을 촬영할 때 시선의 방향을 고려해 카메라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는 기법을 쓰기도 한다.


시선의 오른쪽 편애

‘안정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고자 할 때는 자동차의 앞부분이 오른쪽을 향하게 하고, 역동적이고 스피디한 느낌을 주고 싶을 때는 왼쪽을 향하게 하라’. 자동차 광고업계의 통념이다. 이 역시 가로본능이 낳은 결과다.

신문이나 잡지 광고를 보면 중요한 내용은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경우가 많다. 지상현 교수는 “시선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최종 안착지인 오른쪽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고 설명했다. 가로본능이 오른쪽 ‘편애’를 낳은 셈.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적 효과를 위해 등장인물의 동선을 따라 카메라를 가로로 한번 이동시키는 ‘패닝’(panning) 기법을 쓰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카메라 패닝의 90% 이상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움직인다.

드라마나 영화를 유심히 보라. 아마 대부분의 자동차는 어김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리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가로 자막이 많이 생겼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를 볼 때는 오른쪽에 세로로 박힌 자막을 읽어야 했다. 왼쪽 눈으로 영화의 장면을 전체적으로 파악한 뒤 오른쪽 눈으로 자막을 읽기 때문에 처음 시작하는 지점보다 끝 지점을 더 인식하게 되고, 자연히 시선이 머무는 오른쪽에 자막을 넣은 것이다.

지 교수는 “디자인을 할 때도 정보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게 하면 보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의도적으로 오른쪽 편애 대신 ‘왼쪽 편애’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공포영화에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카메라를 이동시켜 관객에게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공포심을 유발하는 수법을 쓰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에 관객은 불편함을 느끼고 이것이 적절히 공포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에서는 왼쪽 편애가 작가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8세기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고야는 ‘1808년 5월 3일’에서 처형당하는 민중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들을 화면 왼쪽에 배치했다. 이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작가의 예술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심리적 긴장감이 만든 편안함

세로본능은 없을까? 건축물은 얼마나 높은지가 최대 관심거리고, 책은 대다수가 세로로 길쭉하며, 요즘에는 가로화면의 대명사였던 액정화면(LCD)마저 세로로 세워놓고 쓰는 ‘피봇’기능이 유행이다. 지 교수는 “황금비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1.613이라는 황금비에 가까운 형태에 안정감을 느낀다. 황금비는 왜 안정감을 줄까?
정사각형 2개를 붙여 직사각형 1개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직사각형은 보는 사람을 곧 따분하게 만든다. 정사각형은 네 변의 길이가 모두 같아 변화가 적고 구조도 쉽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사각형을 봐도 심리학적으로 긴장되지 않는다.

만약 정사각형보다 조금 짧거나 긴 도형이 있다면 어떨까. 이런 도형을 보는 사람은 당연히 이것이 정사각형인지 아닌지 계속 관찰하게 된다. 심리학적으로 긴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따분하지 않게 할 직사각형을 만들 필요가 생겼고, 그리스 시대에 황금비에 가까운 직사각형이 생겼다.

지 교수는 “가로로 길든 세로로 길든 황금비에 가까운 형태는 시각심리학적으로 편안함을 준다”고 말했다. 건축물의 세로본능은 좀 다른 얘기다. 지 교수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을 인간의 본능과 연관시켜 설명하려는 이론이 있다”며 “인간에게는 좋은 전망과 안전한 도피처를 찾으려는 습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높은 건축물에 올라가면 좋은 전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심리가 생긴다는 것.

하지만 이 때도 전망을 조절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아파트의 베란다가 대표적인 예다. 예를 들어 영화 ‘올드 보이’에서 배우 최민식이 갇혀 있던 집에는 베란다가 없었다. 베란다가 없을 경우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끼게 되고, 영화에서 베란다가 없는 집은 주인공의 이런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책의 세로본능은 기능성을 고려한 측면이 크다. 세로로 긴 책들은 손에 들고 볼 수 있어 이동성이 좋다. 그래서 대개 성인들을 위한 책은 세로가 많다. 반면 주로 한 곳에 놓고 보는 어린이 책은 가로로 긴 경우가 많다. 피봇 기능 역시 각종 문서가 대부분 세로로 길고, 웹사이트를 스크롤하지 않고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인기를 얻고 있다.


황금비는 시각적으로 안정감과 펴안함을 준다.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황금비가 적용된 대표적인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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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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