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한국 과학자 가운데 최재천이란 인물만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서울대 교수. 그는 실험실 밖에서 연구하는 ‘현장형’학자이자 사회문제에 관심 많은 ‘사회 참여적인’ 학자다. 지난 2월 최 교수는 오랜 인문학적 잣대 속에만 묶여있던 호주제 폐지 논란에 과학의 메스를 들이댔다. 호주제 존폐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자문에 응해 ‘유전학적 호주는 남성이 아닌 여성’ 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편 것이다. 과학자는 실험실에 묶여있다는 통념을 뒤집는 행동이었다.
“과학도 실험실에서 벗어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자연은 암컷 중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볼 때 명백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사실 그의 ‘기행’ 은 몇년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 2000년 한 방송사의 특강에 강사로 나선 그는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우월함을 공적인 자리에서 선언한 것이다. 최 교수는 이어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는 책을 통해 남성 중심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모두가 과학계에서 그동안 ‘이단시’ 했던 입장이었다.
그는 또 생태적 삶과 생명 존중을 설파하는 환경전도사를 자임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며 인간의 오만이 가져온 생명파괴에 대해 각성해야 한다는 평소 지론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남달리 과학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다.
문학을 사랑한 소년, 동물학자가 되다
그런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개울가 가재며 민물게, 연못을 활개치는 소금쟁이나 물방개의 발랄한 움직임에 시간가는 줄 몰랐던 때였다. 유년 시절 그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향인 강릉을 찾아 산이며 들로 뛰어 다니며 온갖 동물들과 친구가 됐다. 특히 고향집에 있던 외양간 소에 대한 애틋함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그는 말한다.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던 소에게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어요. 더 열심히 쇠죽을 끓여주고 돌봐줬죠.”
유년 시절 그는 글쓰기와 책읽기에 전념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사다주신 문고판 소설을 읽으며 문학도의 꿈을 키웠다.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헤세 같은 문호들은 자연과 더불어 그의 또다른 스승이었던 셈이다. 때로는 깊은 상념에 빠졌던 그의 청소년기를 지켜본 사람들은 요즘도 그를 ‘생각이 많던 아이’ 로 기억한다.
최 교수가 처음부터 동물행동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전공인 동물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대신 학부시절의 대부분을 인문학과 스포츠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던 중 삶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기회가 찾아왔다. 대학 4학년이던 그에게 1976년 한국을 찾은 하루살이 권위자 조지 에드먼즈 박사의 조수 역할이 우연히 맡겨진 것. 한달 가까이 산천을 헤매며 하루살이 채집을 도우면서 최 교수는 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산천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연구를 하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어요. 나도 그렇게 놀면서 연구하는 직업을 가졌으면 했는데 마침 제 전공이 안성맞춤이었죠.”
그는 곧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4년 내내 방치했던 성적을 다시 메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뜻있는 자에게 길이 있는 것일까. 인생의 이정표가 돼 준 에드먼즈 박사의 적극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길이 열린 것이다. 당시 에드먼즈 박사의 추천서에 ‘뭔가 하나 시작하면 큰일 저지를 사람이니 잘 보살펴달라’ 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79년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그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박사과정으로 입학했지만 자진해 석사과정으로 자신을 낮추고 그것도 모자라 전 학부과정을 다시 수강했다. 기왕에 하는 건데 기초부터 확실히 다지겠다는 생각에서다.
“1990년에야 박사를 끝냈으니 좀 길게 공부한 편이죠. 지금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지독히 공부했어요.”
유학생 시절 최재천을 설명하는 일화 하나가 있다. 어느날 최 교수에게 함께 유학 생활을 했던 서울대 한 동료 교수가 찾아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 는 농을 건넸다. 우연히 출연한 방송에서 달변하는 모습이 ‘과묵’ 했던 유학시절 때와 영 딴판이라는 것이다. 유학 초기 영어를 빨리 배우려고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탓에 말주변 없는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족한 학업을 보충하려고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생활 방식이었다. 그렇게 펜실베이니아주립대와 하버드대를 마친 그는 학위를 받은 하버드대에서 학자로서 첫발을 디뎠다.
자연의 이치에서 사회를 배우다
전공으로 동물행동학을 선택한 그는 처음엔 사회성 곤충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분야로 잡았다.
“개미 연구는 사람의 행동과 사회에 대해 연구자들에게 여러가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개미는 인간과 비슷한 사회성을 갖기 때문이죠.”
오랜 개미 연구끝에 지난 1999년 처음 출간된 ‘개미제국의 발견’ 은 그를 처음 대중과 만나게 한 계기가 됐다.
하지만 원래 그는 영장류 연구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관련 연구자가 많은 미국에서조차 연구에 여러 한계가 많았다. 주위에서 모두 극구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다 세계적인 동물생태학자 제인 구달 박사와의 인연은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1996년 방한한 그녀를 만난 최 교수는 다시 영장류 연구에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영장류 보호와 연구에 대한 구달 박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조언, 성원은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다시 연구에 뛰어들 용기가 났어요.”
최근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한국영장류연구소에는 그의 오랜 염원이 담겨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강연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앞으로 세워질 연구소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꼼꼼히 챙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를 연구하는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을 만들려면 그만큼 신중함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 교수는 “어쩌면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침팬지들을 보존 연구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안에서 동물과 인간, 사회가 서로 공존하는 청사진을 그리겠다는 포부다.
과학자도 사회 문제에 적극 발언해야
최 교수는 과학이 일반인과 함께 숨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과학이 좀더 일반인에 가깝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그는 쏟아지는 강연과 청탁을 마다하지 않는다. 저서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 ‘열대예찬’ 역시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그만의 원칙이 있다.
“흔히들 과학의 대중화를 말하는데 저는 대중의 과학화로 불러야 옳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과학적 마인드를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과학 대중화를 핑계로 저질 과학으로 한몫 챙기려는 풍토는 경계해야 합니다.”
학문간 연구에도 관심이 깊은 그는 인문과학과 같은 전혀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토론하길 좋아한다.
“학자는 모름지기 잡담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학문이 학문으로만 멈춰있지 않으려면 새로운 것에 대해 항상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토론과 참여를 통해 과학자들도 사회 병폐에 관심을 갖고 이를 치유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인터뷰를 마치며 최 교수는 청소년에게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방황은 젊음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학창시절의 방황은 아름답죠. 원하는 일이 있다면 악착같이 그 길에 매달려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