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 바람과 함께 전통미와 친환경성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천연염색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직장에서는 천연염색 유니폼이, 가정에서는 황토옷이 유행이다. 역대 영부인들도 전통기법의 천연염색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연출을 즐겼다고 한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개설된 강좌에는 천연염색을 배우려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왜들 천연염색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천연염색은 자연염료로 섬유에 색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염료는 채취원에 따라 동물염료·광물염료·식물염료로 나뉘는데, 선조들은 이 중 식물염료를 애용했다. 동물·광물성 염료는 종류도 적고 채취량도 한정됐기 때문이다.
보통 동물성 염료는 동물 피나 즙, 조개 분비물, 붉나무 기생 벌레집인 오배자, 코치닐(Cochineal) 같은 식물의 기생충에서 얻는다. 광물염료는 색소가 함유된 흙이나 돌가루로, 초창기에는 주로 황요·주·단·먹이 사용됐다. 이에 반해 식물염료는 잎과 꽃, 열매, 수피, 심재 등 자연 곳곳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발달한 식물염료는 다시 한 염료가 한가지 색을 띠는 단색성 염료와 매염제 종류, 색소추출온도, 염색공정에 따라 다른색을 내는 다색성 염료로 나뉜다. 식물성 염료는 색소를 추출하고 염색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또 염색과정도 매우 복잡해 같은 염색재료라도 산지와 채취시기, 보관상태에 따라 다른색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천연염료은 합성염료가 모방할 수 없는 미려한 색채와 명도, 중간 채도를 잘 표현하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 더욱이 합성염료처럼 인체에 유해하거나 공해물질을 내뿜지도 않아 그야말로 친환경적인 염료다.
오묘한 자연 순리 따르는 쪽빛
19세기 생활사를 정리해 엮은 ‘규합총서’ (閨閤叢書)에는 천연염료와 염색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조상들은 쪽풀에서 하늘색을, 소나무 껍질에서 붉은색을, 황련뿌리에서 짙은 노란색을 뽑아냈다. 또 울금뿌리에서는 연노랑을, 치자나무에서 전형적인 노란색을, 감·밤·수수에서 가을색인 갈색계 색을 추출했다. 이밖에 홍화, 오배자 등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자연이 색의 원료로 쓰였다. 이런 까닭에 천연 염색재료는 일반 한약재료로 혼용하거나 방부·방충·방습 같은 독특한 성분을 함유했다.
이 가운데 민족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색은 쪽빛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은 푸른하늘을 쪽빛하늘로 불렀다. 쪽빛이란 쪽이라는 풀에서 빼낸 물감색을 말한다. 이 물감으로 베나 모시, 무명, 명주 등 천연옷감을 물들이면 가을의 맑은 하늘빛을 띠게 된다.
쪽색의 염색 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의 이치를 살피는 선조들의 예지에 새삼 놀라게 된다. 특히 천연염색의 비밀은 현대 첨단과학도 아직까지 풀지 못했기에 더욱 값지다.
하늘색 염료로 쓰일 쪽풀은 3월경 심어 8월 중순 안개가 자욱한 꼭두새벽에 베어야 색을 제대로 낸다. 베어온 쪽풀은 일단 냇물이나 지하수와 함께 큰 항아리에 넣고 일주일을 삭힌다. 냇물이나 지하수를 쓰는 이유는 칼슘, 마그네슘 같은 금속이온이 녹아 있고 산성도가 적당해 쪽물을 우려내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염료 뿐 아니라 물의 성질까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려낸 쪽물에서 색소를 뽑는 역할은 1천2백˚의 불에서 조개껍질을 구워 얻은 석회의 몫이다. 일단 구운 조개가루를 쪽풀이 썩은 물에 정확한 비율로 섞은 뒤 고무래로 2시간 정도 젓는다. 이때 같은 방향으로 일정한 힘을 들여 고무래질을 해야 색이 잘 나왔음을 알리는 가지빛 꽃거품이 생긴다. 만약 젓는 힘이 고르지 않거나 꽃거품이 일지 않으면 색이 잘 배어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염색에 실패하게 된다. 또 석회 배합비율이 맞지 않으면 염색을 하더라도 곧 색이 쉽게 빠져 버린다.
이틀 뒤 석회가 색소를 머금고 가라앉으면 위쪽에는 맑은 물이, 아래쪽에는 푸른빛 물이 남는다. 이 남은 물과 쪽대나 콩대를 태워 만든 잿물을 적당하게 섞어 두달 가량 보관하면서 가끔 한번씩 저어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석회와 쪽물 색소가 분리되는데 이를 ‘쪽이 잠에서 깨어난다’ 고도 하고 ‘물발섯다’ 고도 한다. 이때 ‘물발섯다’ 란 말은 이제 염색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잿물과 색소가 분리된다.
쪽빛 염료의 염색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느 맑은날 양조식초를 알맞게 배합한 쪽물색소에 열번 정도 옷감을 담근다. 여기서 양조식초는 착색제 역할을 한다. 그 다음 천을 흐르는 냇물에 넣고 빨아 불순물을 없앤뒤 다시 말리면, 드디어 점차 쪽빛을 띠게 된다.
홍화, 치자, 울금, 황백, 황련, 소목 등 각종 꽃과 잎, 열매, 껍질도 물을 부어 1시간쯤 끓이면 제각각 독특한 색을 내는 천연염료로 다시 태어난다.
쪽염색에 쓰이는 매염제(염색이 잘되지 않는 염료를 섬유에 연결시켜주는 약)를 분석해 보면 그 이유가 잘 설명된다. 쪽잎에서 추출한 색소를 안정시키기 위해 사용된 구운 조개가루는 굽는 과정에서 탄산칼슘(CaCO₃)과 수산화칼슘(Ca(OH₂))으로 변해 색소를 머금는 성질을 갖는다. 또 사용된 잿물은 조개가루가 머금은 색소를 다시 분리해내는 작용을 한다. 염색 시작 전 첨가한 강산성의 양조식초와 오미자물은 알칼리성 염료가 강한 산기를 띠게 해 색소가 섬유에 잘 달라붙도록 작용한다.
오묘한 색의 근원
천연염색이 처음 시작된 것은 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상 인류 역사에서 발견된 최초의 염색은 광물과 식물성 천연염료를 이용한 후기구석기시대 동굴벽화다. 대개는 주술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등 세계 곳곳에서 발견됐다.
자연에서 색을 얻는 기술은 다음 시대인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내려와 점차 가죽이나 천으로 된 의류를 염색하는데 쓰였다.
의창 다호리 목기 용기류에 주칠(朱漆)과 흑칠을 한 것과 평양 왕우묘의 ‘채화칠반’ , 채협총의 ‘채화칠협’ 은 초기 철기시대 염색기법을 설명하는 좋은 자료다. 특히 이때부터 여러 문헌에서 염색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삼한(三韓)에서는 광폭세포(廣幅細布)라는 청색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었으며 청색·적색·자색 등 여러가지 색실로 문양을 넣은 금직(錦織)이 사용됐다는 기록이 내려온다.
삼국시대에는 염직공예가 발달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왕, 대신, 관리 등 백관의 공복을 정해 색에 순위를 매겼다. 심지어 악공과 무용가들까지 붉은색·자주색·노란색·푸른색·갈색 등 염색된 옷을 입는 등 염색기술은 전성기를 맞는다. 이런 사실은 고구려, 백제의 고분벽화나 신라의 천마도에서 증명한다. 고려는 삼국의 우수한 염색기술을 바탕으로 사설공장과 관영공장에서 염직물을 대량 생산했던 염색문화의 절정기였다. 관영 직조수공업장인 도염서(都染署)에서는 전문장인까지 두어 염색을 전담케 했다. 특히 자초를 이용하는 고려의 자색염 기술은 멀리 중국까지 알려질 정도로 뛰어났다. 이런 고려의 염색기술은 조선조에까지 내려와 청염장이나 홍염장 같은 색상별 전문 장인체계의 출현을 낳았다.
음양오행과 결합한 색채관
우리겨레는 색에 대해 미적 숭고미보다 그 이상의 상징성에 의미를 뒀다. 이 때문에 전통색은 신앙적 상징성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양의 색채는 자연과 우주의 원리에 순응한다는 음향오행에 철학적 근거를 둔다. 이에 근거해 생겨난 것이 오방정색과 오방간색, 그리고 잡색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색 분류체계다. 이같은 색체관은 유교와 도교사상과 어우러지면서 우리민족 고유의 색채의식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민족의 색채의식이 일목요연하게 표현된 바로 오방색이다. 오방(五方)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포함한 다섯 방위를 일컫는 말이다. 각 방위마다 색깔이 대응되는데 동쪽은 청색, 서쪽 백색, 남쪽 적색, 북쪽 흑색으로 각각 표현된다.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다. 또 동서남북 각 방위마다 상징동물이 있다. 동쪽을 호령하는 청룡과 서쪽의 백호, 남쪽을 상징하는 주작, 북쪽은 현무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색을 눈으로만 판단하는 것과 달리 조상들은 색채를 통해 우주를 읽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선조들은 오방색을 통해 건강과 화평을 기원했다.
옷에 쓰인 색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조선의 왕이나 왕비 그리고 포도대장은 오방색 옷을 입었다. 오방색을 택한 데는 오방신(五方神)과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하양, 까망, 빨강은 재앙과 악귀를 막는 주술성을, 노랑은 중앙색 혹은 제왕색을, 파랑은 청춘색 또는 희망색을 상징한다. 궁중복식과 형리의 복식에 이같은 오방색을 쓴 데엔 왕조의 번영과 강력한 왕권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음양오행설은 우주와 인간의 생멸을 음양의 조화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만물의 탄생에서 소멸까지를 균형과 조화로 설명하는 오행설로 구성된다. 이를 이용해 길흉화복을 점쳤던 조상들은 오행을 색으로 표현해 나무는 청(靑), 쇠붙이는 백(白), 불은 적(赤), 물은 흑(黑), 흙은 황(黃)에 대응시켰다. 또 각 색채를 특성에 따라 동서남북과 중앙으로 나눠 각 방위마다 정색이 있고 그 사이에는 간색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오방색, 오간색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통 색동이 들어가는 옷의 종류로는 색동옷, 까치두루마기, 오방낭자가 있다. 까치설날인 섣달 그믐에 어린이에게 색동옷을 입히는 까닭은 색동에 무병장수와 제액(除厄)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오방색의 원리가 적용된 또다른 대표적인 사례는 건축에 있다. 사찰이나 궁궐 지붕 아래 펼쳐진 단청도 바로 이런 음양오행설을 따르는 것이다. 단청이야 말로 전통 색체계의 정수이자 고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변함없음을 상징하는 황색은 중앙에 놓이고, 발전을 상징하는 청색은 동쪽에, 깨끗함과 순결을 뜻하는 흰색은 서쪽, 부와 따듯함의 상징인 적색은 남쪽, 그리고 암울한 세계를 표상하는 검은색은 북쪽에 위치한다. 사군자인 매화(동), 난초(북), 국(서), 죽(남)도 오행사상의 원리에 따라 각자의 자리가 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실제 염색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색상 배합에도 순서 따라야
오간색은 오방색을 이용해 만드는 중간색을 일컫는 말로 흔히 음(陰)의 색으로 부른다. 오방색이 하늘과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라면 오간색은 땅과 여성을 상징한다고 하면 딱 맞겠다.
보통 쪽은 푸른색을 내는데 치자·황련·황백은 황색을 내는데 쓰인다. 또 붉은색은 소목이나 잇꽃에서 추출한 염료로 색을 낸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염료 재료가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원색에 가까운 색을 띤다. 이 때문에 원색이 아닌 색을 만들려면 간색의 원리를 알아야만 한다.
옷 염색에 쓰이는 보라색 염료는 원래 지초에서 얻는데 야생초가 아니면 염색이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야생지초는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가격도 만만치 않아 어쩔 수 없이 간색으로 보랏빛을 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화학염료인 경우 붉은색과 청색을 섞으면 보라색을 얻을 수 있지만, 천연염색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홍화로 물들인 붉은색 천에 쪽물을 들이면 색이 죽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라색을 내려면 먼저 천에 쪽물을 들인 뒤 홍화물을 들여야 제대로 된 보라색을 얻을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도 먼저 쪽물들인 천에 황련 또는 황백물을 들여야 색을 오롯이 얻을 수 있다. 간색을 내는 데에는 백(서)→청(동)→황(중앙)→홍(남)→흑(북)라는 염색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이같은 간색의 원리로 보라색, 주황색, 녹색 등 다양한 색을 표현해 냈다. 만약 이 순서를 어기면 원하는 간색을 얻기 힘들다. 백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지만 검정은 자기 색을 잃는 것들이 합쳐진 색이므로 아무색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흑색에 가까운 색부터 염색을 하면 간색이 나오기는 커녕 색은 아예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원리는 현대의 화학 염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우주의 이치를 승화한 생활의 지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