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여러 학문 중 가장 거리가 먼 사이가 물리학과 생물학이다. 현재 이 두 분야의 확연한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융합하려고 하는 분야가 자라나고 있다. 생명현상을 물리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생물의 기본 법칙을 찾고자 하는 생물물리가 바로 그것이다.
중학교 때 한권으로 된 과학 과목을 두 선생님이 둘로 쪼개 가르쳤다. 물상과 생물로 말이다. 이때 자연스럽게 과학이란 학문이 무생물이냐 생물이냐는 대상에 따라 나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시절 과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대조적인 두가지 부류로 나뉜다. 물리를 좋아하는 친구와 생물을 좋아하는 친구. 이 두 분야에 모두 관심을 보이는 친구는 매우 드물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다양한 분야들 중 가장 성격이 다른 학문을 꼽을 때 물리학과 생물학이 지목된다. 전통적으로 물리학은 보편적인 법칙을 찾았다면 생물학은 복잡한 생명체에 관심을 둠으로써 개별성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DNA 구조 규명에 동원된 X선 회절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물리학과 생물학이 전혀 아무런 교감을 주고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780년 이탈리아 과학자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두 종류의 금속으로 이으면 다리가 오그라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이 동물의 근육에서 전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볼타를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갈바니의 실험을 되풀이해봤다. 이것은 전기생리학·전자기학·전기화학 발전의 계기가 됐다. 갈바니의 연구는 두 분야 모두에 발전을 가져왔던 것이다.
19세기에는 물리학의 대법칙인 ‘에너지보존의 법칙’이 독일의 한 의사의 독창적인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졌다. 그 주인공은 폰 마이어. 그는 1840년 동인도를 항해하는 선박의 주치의로 활동할 때 열대지방에서 사람들의 동맥피와 정맥피의 색깔차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까닭을 열대지방 처럼 따뜻한 기온에서 사람이 열을 덜 생산해도 체온유지가 가능해, 이로 인해 피 속의 산소가 덜 이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이어는 먹은 음식을 피 속 산소로 산화함으로써 동물이 열을 얻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음식 섭취로부터 얻은 화학에너지가 사람의 움직임에 대한 운동 에너지와 체온유지를 위한 열에너지로 전환된다고 생각 했고,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보존된다고 착안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물리학이 생물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건이 있었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 나선을 발견하는데 물리학이 이룩한 X선 회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지난 2백여년 간 물리학과 생물학은 교감의 수는 적었지만 서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셈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물리학과 생물학은 어떤 관계로 진전될까. 20세기 초∙중반 물리학과 화학의 교감으로 물리화학이, 그리고 화학과 생물학의 결합으로 생화학이 탄생했다. 뒤늦게나마 20세기 후반 들어 물리학과 생물학의 확연한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물리학에서는 적극적으로 생물학적 대상을 연구하자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생물물리학이란 분야가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물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생물물리학이란 생명현상을 물리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학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를 내린다. 지금까지 발전된 물리학의 여러 방법을 생물에 확대 적용해 생명현상의 본질을 물리적인 법칙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통적인 물리학은 전체를 단순하게 봄으로써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냈다. 물리학자는 비본질적인 요소를 제외시키고 문제의 핵심을 봄으로써 나무에서 숲을본다. 이에 반해 생체가 엄청나게 복잡한 대상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은 이에 대해 개별적인 관점을 갖고 연구돼 왔고, 그 특성이 다양하고 개별적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접근방법으로는 개개 나무에서 전체 숲을 보기가 쉽지 않다고 생물물리학자들은 얘기한다. 물리학적 접근은 생명현상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는 의미에서 생물물리학은 시작됐다.
포항공대 물리학과 김승환 교수는 실제로 아주 달라 보이던 자연현상이 사실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물리학자에 의해 증명된 예를 소개했다. 타이정글에서 한밤중이 되면 반딧불이가 일제히 동시에 깜박 거리는 자연현상, 심장세포들이 동시에 수축해서 심장이 뛰는 생체현상, 그리고 수천억개 뇌 신경소자가 함께 번쩍거리면서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일이 모두 동기화라는 한 항목으로 묶였다. 동기화는 어떤 사물이 동시에 일정한 박자로 운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물리학자가 이같은 생명현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단지 물리학의 영역 확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현상은 지금까지 물리학자가 연구했던 그 어떤 대상보다도 복잡하기 때문에 기존의 분석적이고 환원적인 방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생명현상에 대한 물리학자의 연구결과 과학적 연구에서“부분의 단순한 합이 전체가 아니다”는 격언이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런 까닭에 포항공대 성우경 교수는“물리학의 눈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될것”이라면서“생명을 물리의 시각으로 봄으로써 물리에 생명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분야 학자의 공동연구 기본
그렇다면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생명현상을 연구하고 있을까. 한 예를 통해 살펴보자. 생명의 실로 불리는 단백질에 대한 비밀을 푸는 문제는 생물물리의 대표적인 연구 분야다. 20종류의 사슬로 이어지는 실같은 단백질이 ${10}^{-1}$-${10}^{3}$초만에 생체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실타래처럼 뭉친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하고자 많은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물리학자는 우선 단백질 접힘의 메커니즘에 대해 수학적으로 기술되는 이론적 모형을 만든다. 단백질 접힘 과정에 작용하는 힘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 모형을 강력한 컴퓨터에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이때 얻은 결과가 실제 단백질의 데이터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비교해보면 모형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후 이같은 일을 반복함으로써 모형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물리학자가 생명현상을 지나치게 모형화하는 일을 피하려면 생물학자의 실험적 자료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물물리는 물리학자와 생물학자의 공동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분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언어적 코드나 접근방식이 너무도 다른 두 분야의 학자가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기란쉽지 않다.
해외 대학에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다리를 이어주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두 분야에 대한 이해가 이뤄지도록 학제간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생물물리 분야는 대개 의대나 생명과학 관련 학과 내에 소속돼 있다. 생명과학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물리학적 관점을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점이 매우 미비하다. 대개 생물물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물리학과에 소속돼 있어서 생물학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다른 곳에 비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곳이 포항공대인데, 이 대학도 우리나라의 여느 대학과 마찬가지로 생물물리학자는 물리학과 소속이다.
하지만 4명의 생물물리 분야 교수 중 한명을 생물학 박사로 임용해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기반이 다른 곳에 비해 잘 마련된 편이다. 고득수 교수가 그 주인공으로, 그는 생리학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교수는 현재 물리학자와의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포항공대의 이같은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생물학 박사학위자가 물리학과의 교수로 임용되는 일은 해외에서도 3-4건에 불과하다.
물리학 먼저 생물학 나중
생물물리를 하려는 사람의 일반적인 길은 대학과정에서 물리학을 먼저 공부하고 대학원으로 생물물리 분야로 진학하는 것이다. 물리∙수학적 기반을 먼저 쌓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다양한 분야의 기반으로부터 생물물리 분야로 진출하는 학생들 중 50%가 미리 물리학을 전공한다.
고교수는 이와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그는“현재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쉽지 않으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가 이 길을 걷을 수 있었던 동기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생물물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수학에 자신이 없지만 물리학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고교수는 생물물리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이 강의를 진행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말한다. 수강자들은 물리, 화학, 화공, 생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인데, 이들을 전체적으로 통합해서 교육하기란 무척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두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갖고 강의 하기 때문에 두 분야 학생이 모두 만족하기가 어렵다. 생물학 관련 내용에 대해 가르칠 때 물리기반의 학생은 심리적으로 거부하면서 따분해하고, 생물학 기반 학생은 새로운 내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상황인 물리내용일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생물물리를 가르치기에 적절한 교재도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생물물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현재 이 분야는 완전한 틀을 갖춘 상태가 아니다. 워낙에 서로 다른 두 분야가 만나서인지 통합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 통일성과 일반성을 추구하는 물리학과 다양성과 특수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생명현상 사이에는 방법론과 언어의 차이로 인해 높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매우 높은 분야이기도하다. 만약 단백질이 접히는 메커니즘이 밝혀진다면, 이는 곧바로 신약개발에 응용될 수 있다.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이 어떤 아미노산 서열을 갖는지는 현재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접히는 모양에서 실질적으로 단백질의 기능이 밝혀지기 때문에, 이 단백질의 기능을 차단하려면 그 구조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 그러면 단백질의 구조와 딱 맞는 약물을 개발하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그래서 생물물리학자들은 생물물리가 21세기에 가장 유망한 물리 분야라고 얘기한다. 20세기에 물질의 근본적인 구조를 밝히는데 혁명적이었던 물리학은 양자물리학을 통해 전자 산업혁명의 기초를 마련해줬다. 그 결과반도체 혁명이 불러올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물리학이 생명과학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가져올 뿐 아니라 신약개발, 의학, 생명공학처럼 생명 산업의 획기적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과학의 발전 역사를 통해 학문의 경계에서 중요한 발전과 새로운 분야가 전개돼 왔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학생들이 생물물리에 도전할 만한 가치가 높다고 말할 수 있다. 투철한 도전 정신, 성격이 너무 다른 두 분야를 수용할 자세, 이를 기반으로 두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분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