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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 속에 나타난 태양 에너지

미 연구팀 ‘초음파로 핵융합 실현’ 주장

커피 잔 두개 크기의 비커 속에서 핵융합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는 연구결과를 두고 전세계 과학계가 논란에 빠졌다. 핵 시대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에서부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지난 1989년의 상온핵융합 소동과 마찬가지라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 과연 찻잔 속의 태풍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꿀 새로운 발견일까.


세계적 과학전문지인 ‘사이언스’를 발행하고 있는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는 3월 5일 아침, AAAS에 등록된 전세계 과학기자들에게 긴급 메일을 보냈다. 사이언스 8일자에 게재될 한 논문에 대한 엠바고(보도일자제한)를 4일자로 해제했으며 해당 논문과 관련 자료를 인터넷 웹사이트에 공개했다는 것. 사이언스가 비중이 큰 논문을 정식 출판에 앞서 미리 발표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애초 엠바고를 걸어둔 논문을 스스로 해제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커 속에서 일어난 핵융합

미국 에너지성 산하 오크 리지 국립연구소 루시 테일야칸 박사와 렌슬리어 폴리테크닉 대학(RPI)의 리처드 레이 교수,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로버트 니그마툴린 박사 공동연구팀이 발표한 이 논문은 상온에서 비커에 든 용액에 기포를 만들어 터뜨리면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아세톤 용액을 초음파로 진동시키면서 고속의 중성자를 쏘았더니 작은 기포가 생성됐다가 터지면서 핵융합 반응의 결과 생성되는 고에너지의 중성자가 검출됐다는 것. 연구팀은 이 과정에서 기포의 내부 온도는 태양 핵과 맞먹는 1천만K(절대온도, 0K=-273℃) 까지 올라갈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일반 수소로 만든 아세톤 용액으로는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핵융합은 태양에서처럼 수소와 같이 가벼운 원소들의 핵이 서로 결합해 헬륨과 같은 조금 무거운 원소의 핵을 형성하는 물리현상. 이때 발생한 질량 결손만큼 엄청난 에너지(E=${mc}^{2}$에 따라 질량 m은 에너지 E로 전환된다)가 방출된다.

핵융합에는 일반 수소보다 무거운 중수소와 삼중수소가 주로 이용된다. 수소는 전자 하나와 원자핵에 양성자 하나를 갖고 있다. 중수소는 원자핵에 중성자 하나가 더 있는 것이며, 삼중수소는 중성자가 두 개 추가된 것이다.

연구팀은 수소를 중수소로 대치한 아세톤에 초음파 진동과 1천4백만 전자볼트의 고에너지 중성자를 고속으로 쏘았더니 기포가 생겨나 지름이 나노미터(1백만 분의 1m)크기에서 최대 1㎜ 크기까지 자랐다가 터졌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수소들을 핵융합시킬 때 만들어지는 삼중수소와 2백50만 전자볼트의 에너지를 가진 중성자가 검출됐다는 것. 중수소 두개를 핵융합시키면 헬륨과 중성자, 또는 삼중수소와 양성자가 만들어진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기포가 터지면서 핵융합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미래의 청정에너지 후보 1순위

핵융합은 핵분열과 정반대 반응이다. 핵분열은 우라늄처럼 무거운 원소에 중성자가 부딪혀 핵이 갈라지는 것이다. 이때 나뉘어진 입자들을 모두 합하면 처음 상태보다 질량이 가벼운데 그 차이만큼 에너지가 나온다. 이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나오는 게 원자폭탄이고 천천히 제어한 것이 원자력발전소다.

핵융합에 의한 질량차이는 핵분열 때보다 훨씬 커 핵융합에너지는 핵분열에너지의 3백배나 된다. 게다가 원료가 되는 중수소가 바닷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화석연료처럼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의 염려가 없고, 원자력발전 10배 이상의 출력을 얻을 수 있지만 핵의 안전성과 방사성폐기물의 문제도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꿈의 청정에너지’로 인식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1㎢의 바닷물만 있으면 전세계의 모든 석유를 합한 것과 같은 에너지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의 대양에는 수백만㎢의 바닷물이 있다.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태양과 같은 높은 압력과 온도가 필요하다. 핵융합 반응이 실제 적용된 것은 수소폭탄인데, 높은 압력과 온도를 얻기 위해 수소폭탄 투하 전에는 소형 원자폭탄을 터뜨린다.

그래서 핵융합을 에너지 생산에 이용하려면 태양의 표면온도와 같은 1억K 이상을 견딜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 정도의 온도에서는 핵융합 원료 기체는 원자 주위의 전자들이 전부 떨어져 나가 자유전자와 양이온으로 이온화된 고체 기체 액체도 아닌 제4의 물질 상태인 플라스마 상태로 존재한다.

하나의 방법은 레이저로 연료구슬을 가열해 외각을 플라스마로 만들어 팽창시키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반작용으로 연료 내부로 압축되는 충격파가 발생, 플라스마 상태를 만들어낸다. 보통 축구경기장만한 시설에 레이저 발사장치들을 배열시켜놓아야 한다. 이 방식은 조그만 수소폭탄을 터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꾸준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야 하는 발전에는 적합하지 않다.

다음은 자기장 속에 플라스마를 가둬두는 방법. 플라스마는 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자기장이 걸린 차폐막 속을 원운동하게 된다. 1951년 옛소련에서 도넛 모양의 자기 핵융합 장치가 개발된 이래 지금까지 각국에서 연구되고 있는 방법이다. 우리나라가 개발중인 핵융합장치 K스타도 마찬가지 방식이다.
 

오크 리지 국립연구소 테일야칸 박사팀 의 기포 핵융합 실험장치. 특허 등을 고 려해 더이상 자세한 사진은 제공하지 않 고 있다.



상온 핵융합과 기포 핵융합

이렇게 거창한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도 핵융합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해 충격을 준 것이 1989년의 상온핵융합 실험이다. 당시 미국 유타대학의 스탠리 폰즈, 마틴 프라이슈만 박사팀은 중수가 담긴 비커에 팔라듐 전극을 넣어두고 전류를 흘려주면 중수에 들어있던 수소가 팔라듐에 쌓이고, 그에 따라 팔라듐 결정격자 안에서 압력이 급격히 증가해 핵융합이 일어난다고 발표했다. 이 실험은 1억K 이상의 고온(hot)이 아닌 상온(cold)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cold fusion’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들의 실험은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재현되지 못했고 결국 두 교수는 대학을 떠나야 했다.

과학자들은 테일야칸 박사팀의 연구도 1989년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테일야칸 박사팀의 실험 역시 커피 잔 두개 크기의 비커에 여성들이 손톱 매니큐어를 지울 때 이용하는 아세톤을 넣고 초음파와 중성자를 쏘아주기만 하면 핵융합이 일어난다는 아주 간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결과가 1989년의 상온핵융합 소동과 크게 다른 점은 유타대학의 연구결과가 언론을 통해 먼저 발표된 것에 비해 사이언스라는 저명한 과학학술지에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크 리지 연구소는 이번 연구결과가 불러올 논란을 의식해 논문 게재 이전에 연구소의 사피라, 솔트마시 박사팀으로 하여금 같은 실험을 해보게 했다. 그 결과 테일야칸 박사팀이 측정한 중성자 값이 나오지 않았던 것. 오크 리지 연구소는 이를 근거로 사이언스 발행인에게 테일야칸 박사팀의 논문 게재를 보류하거나 아니면 사피라 박사팀의 실험결과도 함께 실어줄 것을 요청했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도 논란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윌리엄 모스는 “2년 전 기포 핵융합이 가능하다고 예견한 바 있다”면서 “노벨상감”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대학의 로렌스 크룸 교수 역시 “핵융합이 일어났다는 것이 검증되면 수많은 기업들이 기포 핵융합에 매달릴 것”으로 예견했다. 그렇지만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의 세스 푸터맨 교수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은 “이 논문에서 제시된 데이터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세계 여러 곳에서 상온핵융합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미 일리노이대 밀리 교 수팀은 상온핵융합에 팔라듐, 니켈 전극 을 이용했다. 1989년 유타대 연구팀과 달리 중수 대신 경수를 이용한다.



소리와 빛이 만들어낸 체인 리엑션

그렇지만 사이언스의 편집자인 돈 케네디 박사는 이례적으로 이번 논문 게재에 대한 편집자의 글을 실어 “우리의 임무는 엄밀한 검토를 거쳐 중요한 과학적 성과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며 실험의 재현이나 해석은 과학자의 몫”이라며 논문게재의 의미를 설명했다.

또한 기포 핵융합은 상온 핵융합과 달리 널리 알려진 물리현상을 이용한 것이어서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테일야칸 박사팀이 핵융합에 필요한 고온을 얻기 위해 이용한 것은 ‘음파발광’(音波發光, sonoluminescence) 현상이다.

음파발광은 초음파를 용액에 쏘면 미세한 기포가 생겨나 점점 더 자라다가 결국 빛을 내며 터지는 현상. 이번 논문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UCLA의 푸터맨 교수 역시 “워낙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라 이제까지 기포의 온도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었지만 온도가 태양에 맞먹지 않을까 추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워싱턴대학의 크룸 교수도 음파발광을 의학적 목적에 이용하는 연구를 진행해 왔다. 테일야칸 박사팀은 음파발광으로 높은 온도가 생겨날 것으로 추정하고 아세톤 내의 중수소 사이의 핵융합을 조사해본 것. 고에너지의 중성자는 기포 생성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음파발광 현상은 1997년 키에누 리브스 등이 출연한 ‘체인 리엑션’이란 영화에도 소개됐다. 미국 에너지성 산하 아르곤 국립연구소의 감수 아래 제작된 이 영화에서 음파발광으로 막대한 에너지를 생성시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음파발광 현상을 소개한 영화 체인 리 엑션. 막대한 에너지를 음파발광으로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인 연구자도 참여해

한편 이번 기포 핵융합 연구에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일야칸 박사는 동아일보 3월 6일자에 기포 핵융합에 대한 기사가 게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와 “같은 연구실의 조재선 박사가 사이언스 8일자에 게재될 이번 연구논문의 공동 저자로 돼 있다”며 “세계적인 관심사가 된 연구에 조 박사가 참여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알려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조 박사는 1999년 2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0년 1월부터 오크 리지 국립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조 박사는 테일야칸 박사와 함께 중수소를 함유한 아세톤 용액에 기포를 만들어 터뜨리는 실험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중앙대 물리학과 이춘식 교수와 현재 박사과정에 있는 이주한 씨가 1998년 발표한 중성자 검출에 대한 논문이 이번 연구에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핵융합과 같이 소립자들의 반응이 일어나면 감마선이 발생한다. 또 우주공간에서도 항상 감마선이 날아들고 있다. 사이언스 논문의 참고문헌에도 올라있는 이 교수팀의 논문은 핵융합 여부를 알기 위해 중성자를 검출할 때 함께 들어온 감마선을 분리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결과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지만 기존의 음파발광에 고에너지 중수소를 첨가한 것과 물질의 상태변화가 용이한 아세톤을 이용한 점 등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팀은 수년 전부터 핵융합 반응률이 더 높은 삼중수소로 같은 실험을 추진한 바 있지만 국내에서 그와 같은 물질을 구하기가 어려워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음파발광 장치를 보유하고 있는 중앙대 기계공학과의 곽호영 교수도 1997년 창의적 연구진흥사업에 기포 핵융합연구과제로 지원했지만 탈락됐다는 아쉬운 소식도 전해졌다.

과학자들은 그러나 기포 핵융합이 사실로 증명된다 하더라도 당장 에너지 생산에 이용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핵융합으로 생성되는 고온을 이용해 식품을 살균하거나 화학 반응을 유발하는데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핵융합 결과 생성되는 중성자는 화물 검색장치에 이용될 수도 있다.

사이언스 편집인의 말처럼 이제 공은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테일야칸 박사는 10여개 연구그룹이 공동연구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미국 물리학회가 지난 3월 22일 정기학술행사의 마지막날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상온핵융합 부문 연구발표회에서도 음파발광을 이용한 핵융합에 대한 또다른 연구성과들이 발표됐다. 이제 노벨상 후보가 될지, 과학계의 이단아가 될지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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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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