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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노벨상 Best3 vs Worst3 : 화학 - 현대화학의 초석 닦은 폴링

비르타넨의 사료보관방법, 미흡한 수상

양자역학을 도입해 화학결합을 제대로 설명해낸 폴링의 1954년 수상은 현대화학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와 함께 베스트1로 손꼽을 수 있다. 반면 사료보관방법을 발견한 1945년 수상자 핀란드의 비르타넨은 업적 자체도 미흡하지만 정치적 편견도 깔려있다. 역대 노벨화학상 베스트3과 워스트3을 살펴보자.


베스트1 라이너스 폴링. 화학결합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뿐 만 아니라 나선 모양으로 꼬인 단백질 구조를 밝혀냈다. 1954 년에는 반전반핵 평화운동으로 평화상도 수상했다.


과학과 관련된 노벨상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분야가 화학 분야가 아닌가 싶다. 또한 노벨화학상 1백주년을 뒤돌아보더라도 유기화학 분야의 수상이 가장 많긴 하지만 화학의 거의 전분야에 걸쳐 수상이 이뤄졌다. 이론화학에서 생화학에 이르는 기본화학의 다양한 분야뿐 아니라 응용화학까지 포괄한다. 그래서 역대 노벨화학상을 받은 업적의 스펙트럼 가운데서 베스트3과 워스트3이라는 특정 색깔을 가리는 일이 다른 분야에서보다 더 쉽지 않아보인다.

DNA 이중나선과 바꾼 평화상

업적 자체가 가지는 의미뿐만 아니라 학문적·사회적 영향까지 고려해서 노벨화학상 베스트3을 선별할 때 맨첫자리로 1954년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1994)을 손꼽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 같다.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폴링의 수상이유를 “화학결합의 성질을 연구하고 이를 복잡한 물질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적용한 업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막 태동하던 양자역학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 미궁에 빠져있던 화학결합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해결사였다. 또 폴링은 양자역학과 화학을 결합시킨 양자화학의 선구자로 현대화학의 초석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

폴링은 일찍부터 분자의 미시적 구조에 큰 관심을 가졌다. X선 회절현상을 이용해 화학구조를 광범위하게 연구하며 화학결합에 이론적으로 접근했다. 원자들 사이의 화학결합에 대한 이론은 1916년 루이스가 제시했으나 정성적인 수준이었고 1927년 하이틀러와 런던이 루이스의 이론을 보완했으나 근사적인 방법이었다. 폴링은 양자역학의 개념을 도입해 ‘원자가 결합’이라는 새로운 화학결합 이론을 완성했고, 탄소를 포함하는 복잡한 유기물질의 구조를 화학결합 사이의 거리와 각도로 설명했다. 아울러 원자 오비탈(전자의 위치를 원자핵 주변에 구름처럼 퍼져있는 확률분포로 나타낸 수학적 함수)의 혼성화와 공명 같은 화학결합의 핵심적인 개념도 정립했다.

1940년대 이후 폴링은 화학결합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직관을 생체화합물의 구조와 기능에도 적용해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이 가운데 수백-수만개의 아미노산이 결합된 단백질이 나선모양으로 꼬인 구조라는 사실을 밝힌 내용은 분자생물학이 출현하는데 기초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헤모글로빈의 구조와 기능의 관계를 알아냈고 항원과 항체 분자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나아가 DNA 구조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폴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실 중의 하나가 바로 노벨상 2관왕, 그것도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이룬 것이다. 1954년 노벨화학상에 이어 1962년 반전반핵 평화운동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전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핵실험을 제한하자는 청원운동을 벌이면서 적극적인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물론 당시 원폭과 수폭을 개발하던 미국 정부로부터 다양한 탄압을 받았다. 폴링이 DNA의 X선 사진을 보지 못해 잘못된 구조를 제시하고 노벨상을 왓슨과 크릭에게 빼앗긴 이유도 미국 정부의 출국 금지 조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1963년 모스크바에서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이 체결되는 결실을 맺었고, 생리·의학상 대신 평화상을 가져다주었다. 폴링은 자신의 삶을 통해 과학자의 사회적인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진정한 과학자였다.

하버의 암모니아 비료, 녹색혁명 주역

베스트3 중 두번째로는 과학적인 업적만으로 평가한다면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한 업적으로 1918년에 수상한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를 선택할 수 있다. 19세기 말 세계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식량이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암울한 예측을 걷어내며 식량 부족의 위기를 돌파해낸 데는 인공비료인 암모니아를 합성한 하버의 방법이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연구가 없었다면 한정된 농지에서 나오는 부족한 식량으로 오늘날 인류가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인류에게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노벨의 유언에 가장 부합한 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공기 중에 많은 질소분자에서 식량을 이루는 질소원자를 떼어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는데, 하버가 질소와 수소 기체를 반응시켜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암모니아(NH3)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하버는 반응이 원활하게 일어나기에 적당한 온도와 압력, 그리고 촉매를 찾느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후 하버는 보쉬와 협력해 대량의 암모니아가 공업적으로 생산되는 효율적인 공정, 즉 하버-보쉬 공정을 개발했다. 이 업적으로 보쉬(Carl Bosch, 1874-1940)도 1931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하버에게 악령처럼 따라다니는 사실이 있다. 바로 유대인이면서도 독일에서 태어나 1차대전 중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애국자’였다는 점이다. 하버-보쉬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암모니아는 비료로도 쓰였지만, 산화시키면 쉽게 질산이 되기 때문에 폭탄 원료가 됐다. 실제 전쟁에서 독일은 폭탄을 제조하는데 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 현재까지도 말이 많다. 이런 정치적인 측면이 강조된다면 하버의 업적은 워스트에 뽑힐 수도 있지만, 인류를 위해 식량을 대량 증산하는 녹색혁명을 가져왔다는 점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천연물 전합성의 예술가 우드워드

베스트3의 마지막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던 다양한 천연물질을 실험실에서 합성하는데 성공한 1965년 수상자 로버트 우드워드(Robert Burns Woodward, 1917-1979)를 뽑았다. 노벨상 수상위원회가 수상이유에서 “유기합성의 기술에서 탁월한 성과 때문”이라고 밝혔듯이 우드워드는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과 함께 복잡한 과정을 거쳐 키니네(남미 안데스산맥의 신코나 나무껍질에서 얻는 물질인 말라리아 치료제)에서 비타민B12까지 합성한 유기화학의 ‘예술가’였다. 특히 자연에만 존재하던 천연물의 전합성(간단한 화합물에서 출발해 복잡한 물질을 합성하는 일)에 성공한 업적은 우드워드 자신의 말처럼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행성을 항해하는 것”이자, 인간이 통제하는 자연의 영역을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또 현재 생산되는 합성 의약품도 그의 전합성 기술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밖에 베스트3에서 아쉽게 탈락한 사람은 노벨상을 두번이나 수상한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다. 그녀는 방사선 연구로 1903년 물리학상, 방사성 동위원소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1911년 화학상을 각각 수상했다. 이런 업적은 원자핵분열 과정을 통해 인류가 원자력과 방사선을 이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데 의미가 크다. 현재 원자력은 발전을 통해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방사선은 의학분야에서 암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데 활용되기 때문이다. 또 핵산의 염기서열 결정법을 고안해 1980년 화학상을 수상한 프레데릭 생어(Frederick Sanger, 1918-) 등의 업적도 오늘날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생명체의 설계도를 해독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생어는 단백질, 특히 인슐린의 구조를 연구한 업적으로 1958년에도 화학상을 수상한 적이 있어 화학상만 두번 수상한 2관왕에 올랐다.

정치적 편견도 깔려

노벨상 1백주년을 맞기까지 화학 분야의 수상은 다른 분야에 비해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선택이 많았던 것 같다. 특별히 틀린 업적에 수상되거나 격이 떨어지는 수상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수상 후에 뒷얘기가 전해오는 업적 몇가지를 뽑아본다.

워스트3의 첫번째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하나를 고른다면 1945년 아르투리 비르타넨(Artturi Ilmari Virtanen, 1895-1973)의 업적이다. 노벨상 수상위원회는 그의 수상이유를 “농업과 영양화학, 특히 사료 보관방법의 발견과 연구”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이것이 화학상감인지는 1912년 등대불 자동점멸장치 발명으로 물리학상을 수상한 달렌의 경우와 비슷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료 보관법은 오늘날 축산 농가에서 많이 쓰이는 사일로 이용법(사일로라는 용기에 사료를 저장하는 방법)에 해당하지만, 어쩐지 지금 와서 보면 화학상을 받기에는 미흡해보인다.

또 비르타넨은 핀란드의 국가주의자였는데, 그의 수상 이면에는 정치적 편견도 깔린 것으로 보인다. 심사위원 중 한명인 한스 폰 오일러(화학상 심사위원으로 18년 재직)는 핀란드가 소련과 전쟁으로 황폐화돼 핀란드의 과학과 문화 재건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비르타넨의 화학상 수상을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베스트3 로버트 우드워드. 간단한 물질로부터 복잡한 천연물질을 합성한 그는 유기합성의‘예술가’였다.


화학자로 변환된 물리학자 러더퍼드

워스트3에서 두번째로는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가 19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일이다. 노벨상 선정위원회는 러더퍼드의 수상이유를 “원소의 붕괴와 방사성 물질의 화학적 성질에 대한 연구”라고 밝혔지만, 러더퍼드 자신은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방사성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되듯이 물리학자인 나도 어느 틈엔가 화학자로 변환돼 버렸다”고 농담할 정도로 불만스러워했다.

노벨상 수상 초기에 화학상의 영역은 물리학상과 명확히 구분되지 못했다. 초기 화학상 수상 심사위원 가운데 한명이었던 아레니우스(1903년 화학상 수상)는 화학자였지만 화학보다 물리학에 가까운 이론의 주창자였고 화학보다 물리학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레니우스는 1908년 러더퍼드를 물리학상과 화학상 양쪽에 모두 추천했다. 실제로 러더퍼드는 1907년과 1908년에 물리학상 후보로 모두 12명의 추천을 받은 반면, 화학상 후보로는 6명의 추천밖에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러더퍼드가 화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아레니우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또 러더퍼드에 이은 1909년 빌헬름 오스트발트(Wilhelm Ostwald, 1853-1932)의 수상을 워스트3의 마지막으로 선택했다. 오스트발트는 물질 분자의 원자구조설을 반대하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비록 수상이유가 이와 다르더라도 물질의 기본구조가 밝혀지는 단계에서, 원자구조의 대가인 러더퍼드를 맹렬히 비난하던 오스트발트가 러더퍼드의 바로 뒤를 이어 수상한 일은 의아하게 생각된다.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혼란스러워했다.

사실 20세기 초 화학이 번창했다는 점은 물리의 기본적인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1897년 톰슨의 전자 발견(이 공로로 1906년 물리학상 수상)은 화학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즉 원자가 화학결합의 기본단위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실이었다. 물론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이 화학과 직접 관련돼 발전됐다. 연금술사의 꿈인 원소 변화를 이뤄냈던 러더퍼드의 공로도 이와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다.

또 화학상을 받은 업적에서 물리학자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물리학자가 화학자와함께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998년 계산화학 분야의 업적으로 존 포플과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월터콘이 물리학자이며, 작년 전도성 고분자를 만든 업적으로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앨런 히거도 물리학자다. 이제 화학은 화학물질 중 가장 복잡한 유기물을 다루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물리학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학인 것이다.


워스트2 어니스트 러더퍼드. 물리학자인 그는 화학상을 수상한 후 무척 불만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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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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