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과 서양의학. 수백년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의학이 서로 손을 잡았다.인류 최대 난치병 중 하나인 암을 정복하기 위해서다. 한∙양방 병용치료가 어떤 원리로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보자.
부정거사(扶正祛邪). 한의학으로 암을 치료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무슨 뜻일까. 바른 것(正)은 북돋우고(扶) 사악한 기운(邪)은 떨어낸다(祛)는 뜻이다. 바른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북돋운다는 말인가. 더구나 사악한 기운이라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한의학은 과학적 원리가 부족하다’는 선입관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이 의심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한의학이란 말에 민간요법과 전통의술 등의 처방까지 포함해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뚜렷한 근거 없이 사안별로 각각의 처방전을 제시하는 민간요법과 한의학은 분명히 다르다. 한의학 자체는 근거와 체계가 있고 질병마다 대처하는 처방전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한의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우리에게 낯설다. 그동안 서양의학 개념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정’이나 ‘사’, ‘기’와 ‘경락’이라는 말은 낯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용어가 낯설다고 해서 그 학문 자체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의학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수백년 동안 우리의 질병을 고치고 건강을 지켜왔다.
보완적 대체의료법으로 주목
최근 한의학은 서양적 암 치료법의 단점을 보완하는 대체의학으로 주목받고 있다. 보완적 대체의학이란 증상과 질병위주의 기존 서양의학을 제외한 모든 치료법을 말한다. 넓게 말해 치료의 철학, 접근 방식, 치료방법 등이 모두 서양의학과는 다르다. 보완적이란 말은 통상 병원에서 받는 의학적 치료에 보조적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이고, 대체란 의학적 치료 대신 사용된다는 말이다.
보완적 대체의학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후반부터다.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암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들은 암 정복을 달 착륙과 비슷한 일로 여겨 신속한 승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적의 화력이나 전략·전술은 예상보다 막강했다. 닉슨이 암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4반세기가 지나도록 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 서양의학으로 개발된 암치료법인 수술, 항암제, 방사선요법은 환자의 부작용을 가중시킬 뿐 만족할 만한 치료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후유증이 심하고 생명연장도 보장하지 못하는 기존의 암치료법에 불만을 느낀 환자들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대체의학이었다.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독특한 비법을 쓰기도 했고, 엄격한 식이요법을 강행하기도 했다. 마음을 다스려 암을 이기고자 했으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효과가 있다는 식물과 동물의 추출물을 먹기도 했다. 그 중에는 효과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치료가 끝나기 전에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었다. 1990년 하버드 의대의 조사 결과는 서양의사를 찾는 환자보다 대체의학을 찾는 횟수가 많음을 밝혀 충격을 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 국립보건원(NIH)은 국립 보완대체의학연구소(NCCAM)를 설립해 보완적 대체의학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검토 결과 대부분의 대체의학은 과학적 원리와 치료법으로서의 재현성이 부족했다. 치료효과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임상실험에 의해 그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동일한 암에 대해 한가지 치료법이 환자마다 제각각의 결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의학의 과학적 원리와 체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한의학이 보완적 대체요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소가 미국 내에 속속 생기고 있으며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학문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한의학은 암치료에 어떻게 적용되는 것일까.
한·양방 병용치료가 주된 흐름
암에 대한 한·양방 병용 치료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이미 1970년대 초부터 병용치료에 대한 기초실험과 임상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전문 연구기관이 전국적으로 설립돼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한의학을 이용해 암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의학을 이용한 암 치료법은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함께 쓰는 병용치료가 주된 흐름을 이룬다. 암의 특성에 따라 수술과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면역요법 등의 서양의학적 방법으로 암조직을 1차적으로 제거한다. 이후 한의학적 방법을 써 인체의 면역기능을 향상시키고 인체 내부의 환경을 조절한다. 환자 자신이 암에 대항해 싸우는 능력을 높여서 암세포가 재발하거나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동서의 장점만 취합하는 것이다.
한의약을 이용한 암 치료법은 수술, 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면역요법 등에 골고루 적용된다.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한 수술 전에는 환자의 저항력을 높이는 약제를 투여해 수술의 진행을 순조롭게 한다. 주로 사군자탕이나 팔진탕, 십전대보탕 등이 활용된다.
수술 후에는 손실된 환자의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음식물의 섭취와 영양대사에 관련된 기능을 향상시키는 한약을 투여한다. 자연적으로 체력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체의 기능을 돕는다는 생각이다.
항암화학요법에서도 한의학의 역할은 크다. 현재의 화학요법 약제는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능력이 떨어지며, 독성이 비교적 커 신체의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 예가 골수에 미치는 항암제의 부정적 영향이다. 대부분의 항암제는 인체에서 세포분열이 활발한 곳을 찾아 공격한다. 암세포 자체가 왕성한 세포분열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수도 세포분열이 활발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항암제는 골수기능을 억제해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의 수치를 떨어뜨린다. 이 경우 여정자, 산수유, 맥문동, 구기자 등의 보신양음 약제와 인삼, 황기, 토사자 등의 보기보양 약제를 투여해 약화된 골수를 보호함으로써 조혈기능을 회복시킨다. 항암제의 부작용을 한의학으로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한약은 방사선에 대한 암세포의 민감성을 높여서 방사선치료의 효과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한약의 병용치료는 방사선 치료의 부작용과 후유증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인체의 면역체계 일깨워
암치료법 중에서 한의학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분야는 면역요법이다. 면역요법은 인체의 방어체계인 면역시스템을 이용해 암의 성장이나 확산을 억제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한의학에서 인체의 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주는 부정(扶正)작용과 병을 유발하는 나쁜 요인을 제거하는 거사(祛邪)작용과 유사하다.
인체의 면역시스템은 세포성 면역과 체액성 면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체액성 면역은 외부의 이물질인 항원에 대해 인체 내부에서 이를 격퇴할 항체를 만들어 방어하는 방법이다. 한번 본적 있는 항원이 인체에 다시 침입하면 이를 기억하는 항체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항원을 쉽게 물리친다. 이를 ‘면역 기억’이라 한다. 한의학의 부정작용에 해당하는 약제는 이 면역 기억 과정을 도와 병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준다. 즉 항원에 대응하는 항체를 보다 쉽게 생산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세포성 면역은 흉선에서 유래한 T세포가 항원을 인지해 면역활성화 물질인 림포카인을 분비하거나 감염된 세포를 직접 죽이는 것을 말한다. 분비된 림포카인은 면역세포인 대식세포나 킬러세포를 활성화시켜 외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직접 제거한다. 거사작용에 해당하는 한약제는 바로 이 세포성 면역작용을 돕는다. 즉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의 이상이나 암 전이 과정의 비정상적인 생리작용을 인지하는 T세포를 도와 암의 전이와 발생을 억제하는 것이다.
동서 따로 없는 암 극복 방안
현재 우리나라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의료제도상으로 나뉘어져 동서 의학의 협동진료가 어려운 형편이다. 더욱이 서양의사는 암에 대한 한방치료를 잘 이해하지 못해 대부분이 병용치료를 거부하는 풍토다. 물론 한의학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약의 효능을 증대시키는 길이라면 서양의학의 장점을 적극 도입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약의 약리적 효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암치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하루빨리 건강한 몸으로 치유시키겠다는 마음가짐이다. 현존하는 각종 치료법과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치료효과를 거둘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암 정복의 길에 동서가 따로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희의료원 동서암센터의 김진성 교수는 환자를 대할 때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본다고 한다.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는 말기 암 상태로 서양의학에서 특별히 치료할 방법이 없을 경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아온다”며 “이렇게 말기로 진행되기 전에 한·양방의 병용치료를 받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한다.
최근 국내에서는 몇몇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암치료에 대한 동서협진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경희의료원의 동서암센터이며 세브란스병원과 국립암센터, 서울의대 암연구소 등에서도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접목방법을 연구 중이다.
서양의학의 단점과 동양의학의 부족한 점을 서로의 입장에서 보완하려는 움직임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물론 암을 극복하기 위한 한·양방의 병용치료는 아직 부족한 점과 개선해야 할 사항이 많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암도 인류 앞에 무릎 꿇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