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사는 건드리면 잎을 오므리고, 대나무는 죽기 직전 꽃을 피운다. 해바라기는 해가 없는 밤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쪽으로 향한 얼굴을 동쪽으로 돌린다. 식물이 엮어내는 신비로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과연 식물도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어른들 말씀 중 ‘범띠나 용띠는 집에서 짐승을 거둘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센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짐승도 꺼린다는 말이다. 식물 역시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 버린 화분들도 싱싱하게 거두는 사람이 있다. 이와 같은 식물과 사람의 ‘궁합’은 양자간에 어떤 감정적 교류가 있음을 의미한다. 제비꽃은 주인이 아프면 따라서 아프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고 하는데….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식물들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자.
꽃을 피우는 것은 자살행위?
온실 입구에 자라는 화초 중 주인이 매일 쓰다듬어주면 놀랍게도 때이른 꽃을 피우는 경우가 있다. 주인의 보살핌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선사하려는 것일까. 물론 이 의문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없지만, 불행히도 정반대의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사실 화초에게 주인의 지나친 손길은 무척 두렵고 위협적이다. 화초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빨리 꽃을 피워 씨앗을 남기고 자신은 죽기로 작심한 것이다. 일종의 자살행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전문용어로 ‘접촉형태발생’이라 한다. 꽃에 대한 사랑은 고대 네안데르탈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아직까지 꽃에 대한 인류의 사랑은 누군가 말했듯이 짝사랑인가보다.
반면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이 경우 사람에 의한 땅과 공기의 적당한 진동은 식물들의 성장을 부추기는 자극이 된다. 여기에는 직접적인 ‘접촉형태’ 자극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1960-70년대 많은 식물학자들이 식물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실험을 실시했다. 놀랍게도 식물들은 분명히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며, 사람에게 좋은 음악이 식물에게도 좋았다. 예를 들어 옥수수, 호박, 백일홍, 금잔화 등을 대상으로 클래식음악과 록음악을 지속적으로 들려준 결과, 클래식음악을 틀어준 쪽으로 줄기가 이동해 자라났다. 또 작살나무에 매일 25분씩 5주 동안 클래식음악을 들려준 결과, 보통의 나무에 비해 잎면적은 75%나 증가됐고 키도 20%나 커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오이와 같은 작물채소에게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수확을 증가시키고 있다. 불규칙하고 강한 자극은 세포에게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지만,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자극은 식물세포의 성장을 자극하게 된다. 결국 사람과 마찬가지로 식물 역시 클래식음악에서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성적 유인물로 공격자 혼란시켜
식물사회는 그리 평화로운 곳이 못된다. 극적인 생과 사가 엇갈리는 살벌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동물들에게 생존전략이 있듯 식물들도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특별한’ 생존전략을 갖고 있을까.
동물과 달리 이동성이 없이 그대로 노출된 야생의 식물들은 특히 적의 출현에 놀라운 인지력을 보인다. 일부 식물들은 적들의 공격을 받으면 자체적인 방어전술을 펴기도 하지만, 공격자의 천적을 유인하는 물질을 분비하기도 한다. 이런 유인물질의 종류는 현재 20가지 이상 밝혀져 있다. 이들이 분비하는 물질은 휘발성가스 성분으로 자스민산, 살리신산, 에틸렌 등 다양하다. 심지어 성적 유인물을 분비해 공격자를 혼란시키기도 한다.
야생장미의 어린 순은 유난히 연하고 단물도 많아 진딧물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기 쉽다. 장미는 진딧물이 공격하는 어린 순에서 특수한 휘발성 기체를 만들어 공기 중으로 신호를 보낸다. 이 가스는 주변의 식물들에게 적이 출현했으니 대비하라는 일종의 언어 역할을 한다. 즉 전 식물들에게 휘발성 기체를 만들어내라는 지시를 하는 동시에 공개적인 구원요청을 하는 셈이다. 곤충들은 식물들이 분비하는 구원물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신호를 받은 무당벌레 일당은 근원지를 찾아 모여들고, 진딧물은 곧 무당벌레에 잡아먹힌다.
무당벌레의 공격을 받은 감자 역시 제3의 협력자를 부르는 특유의 비린 향기를 내뿜는다. 이 냄새를 감지한 빈대들은 안테나를 흐느적거리며 먹이감을 안내하는 향기의 진원지를 향해 나아간다. 옥수수는 자신의 알갱이를 갉아먹는 애벌레의 타액에서 애벌레의 종류뿐 아니라 나이까지도 알아볼 수 있다. 만일 왕성한 식욕을 갖는 어린 애벌레로 판단되면 적극적인 유도물질을 분비하지만, 고치를 만들기 직전의 늙은 애벌레로 판단되면 간단한 방어태세만 갖춘다.
식물사회의 불한당 기생식물
어딜 가나 남의 등을 쳐서 먹는 못된 군상이 있게 마련일까. 식물사회에도 땀흘리지 않고 편히 살아가려는 파렴치한이 있다. 기생식물이 바로 식물사회의 불한당들이다. 참나무의 줄기에 공중주택을 짓는 놈은 겨우살이다. 겨우살이는 애써 뿌리를 만들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 지긋지긋한 흙 속으로 몸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더욱이 힘들여 물과 양분을 땅속으로부터 끌어올릴 이유도 없다. 이놈들은 뿌리 아닌 뿌리를 참나무의 물이 지나가는 길과 양분이 지나가는 길에 박아 나무의 것을 중간에서 슬쩍 끌어간다. 그래서 이름도 겨우살이보다는 더부살이가 더 어울릴지 모른다. 겨우살이는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줄기가 고사하면 동시에 생을 마감해야 한다.
일부 기생식물들은 심지어 스스로 양분을 만드는 생산기관인 잎도 없다. 따라서 그런 식물들은 모든 살아가는 힘을 숙주식물인 나무에게서 강탈한다. 이런 종류로는 새삼이 있다. 새삼은 덩굴손으로 아래를 더듬어가며 숙주가 될 나무를 탐색한다. 새삼은 자신과 닿은 가지의 영양상태를 판단하는데, 가늘고 빈약한 가지와 닿을 경우 덩굴손을 풀고 다시 다른 튼튼한 가지를 탐색한다. 적합한 대상을 찾으면 자신의 몸을 숙주의 몸에 강하게 밀착시킨 뒤 미세한 실과 같은 조직을 숙주나무의 몸 속으로 침투시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서 곧 세력을 확장한다. 기생식물에게 뜻하지 않게 양식을 강탈당한 나무는 서서히 말라간다.
기생식물은 세계적으로 열대우림에 있는 나무들에게서 많이 관찰할 수 있다. 하나의 나무는 다양한 기생식물과 착생식물(다른 식물의 몸통에 붙어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빗물과 양분을 먹고사는 식물)의 정원이 된다. 심하게 말해 야자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무들이 기생식물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야자수에 기생식물이나 착생식물이 전혀 붙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야자수는 나무이긴 하지만 마치 풀과 같이 꼭대기의 거대한 새순에서만 성장이 이뤄진다. 잎이 일정기간 수명을 다해 떨어지면 같이 붙어 자라던 식물들도 함께 떨어진다. 결국 야자나무의 자유로움은 기생식물이 자비를 베풀어서가 아니라 야자나무의 특성 때문에 생긴 행운인 셈이다.
파리지옥풀이 곤충 잡아먹는 이유
식물에게 꽃가루를 주고 꿀을 제공받는 식물과 곤충과의 관계는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이 과정을 악용해 잔꾀를 부리는 식물이 있다. 일부 꽃들은 아주 인색해서 공짜로 수분을 하기도 하는데, 수많은 난초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속임수를 써서 곤충을 함정에 빠뜨리는데, 암펄냄새를 피우거나 암펄과 비슷한 형태의 꽃모양을 만들어 수펄을 유인한다. 서양란의 한 종류인 온시디움은 꽃잎에 벌들의 경쟁자무늬를 새겨넣어 벌로 하여금 공격을 가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벌은 꽃가루를 묻힌다. 로스차일드의 슬리퍼라는 난초는 진디처럼 보이는 점무늬를 새겨 넣어 진디에 알을 낳는 파리를 유인한다. 유인된 파리는 난초잎의 물통에 빠져 난초가 원하는 일을 하고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다.
대개 동물이 식물을 먹이로 삼는데 반해 식충식물의 경우는 동물을 먹이로 삼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파리지옥풀과 끈끈이주걱이다. 식물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고, 또한 맛있는 열매를 제공해주는 그저 온순하고 순종적인 것쯤으로만 생각해 온 사람들에게 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이 과연 식물일 수 있을까 하는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아가리를 잔뜩 벌리고 있다가 날아오는 파리를 통째로 삼키는 파리지옥풀은 말그대로 잔인한 지옥의 사자인 듯하다.
왜 파리지옥풀은 그처럼 험해보이는 식성을 갖게 됐을까. 파리지옥풀이나 끈끈이주걱이 사는 곳은 물이 고여있거나 축축하게 젖어있는 늪 또는 습지 근처다. 늪이나 습지의 토양은 일반 토양에 비해 산소가 부족하고 공기의 유통이 잘 되지 않는다.
또한 많은 종류의 일년생 초본들이 자라고 있어 이들의 해묵은 사체가 늪바닥에 켠켠이 쌓여있다. 유입되는 유기물의 양은 많지만 유기물을 분해시키는 호기성 미생물, 즉 산소호흡을 하는 미생물들의 활동은 저조해 유기물질들이 잘 썩지 않는다. 유기물의 분해는 식물의 필수영양물질인 질소공급원이라는 점에서 볼 때, 늪지의 토양은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질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곳이다.
이런 곳에 사는 식물은 만성적인 질소부족으로 고통받기 일쑤다. 뭔가 획기적인 방법을 찾지 않으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결국 파리지옥풀이나 끈끈이주걱은 과감히 식성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마치 사람이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고기를 직접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곤충을 직접 잡아먹는, 실로 놀라운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식물들은 항상 손익계산을 따져본 후 먹이를 사냥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들은 소화액을 분비하는데 드는 경비를 상회할 때만 곤충을 잡아먹는다.
소화액 분비에도 계산이 숨어있다
파리지옥풀은 두개의 좁고 두툼한 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가시모양의 돌기가 솟아있다. 곤충들이 좁은 잎의 표면에 앉는 순간 곤충은 안테나를 건드리게 된다. 곧 잎에서는 미세한 전기자극이 일어나고, 두개의 잎은 불과 0.3초만에 닫혀버린다.
그런데 파리지옥풀은 한번의 자극으로는 소화액을 분비하지 않는다. 파리지옥풀의 돌기는 서로 맞물리더라도 일정한 틈이 생기게 되는데, 이 틈보다 작은 곤충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몸집이 큰 곤충은 빠져나올 수 없으며, 곤충이 몸부림치는 동안 돌기들은 다시 자극을 받게 된다. 이때야 비로소 파리지옥풀은 소화액을 분비한다.
여기에는 어떤 계산이 숨어 있을까. 몸집이 작은 곤충은 소화하는데 소모되는 에너지를 충분히 보상받을 만큼의 영양분이 많지 않다. 별 이득이 없다는 뜻이다. 파리지옥풀은 작은 곤충이 잎을 빠져나간 후라도 바로 사냥태세를 갖추지 않는다. 자극이 있은 후 20분 정도가 경과한 후에야 잎을 연다. 이는 살랑이는 바람이나 작은 곤충과 같은 불필요한 자극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의 시간을 벌고자하는 속셈이다. 결국 식물들이 극단의 환경에 처하게 되면 공격의 대상이 곤충을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식물이 동물과 같이 사고하고 반응한다는 주장은 분명 억지가 있다. 그러나 식물 역시 생명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모든 생명들이 갖는 기본적인 본능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동물보다 더욱 정교한 생명질서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물은 지구상에 사실상 제일 먼저 출현한 생물이다. 눈을 주위로 돌려보면 식물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 땅이 없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식물이 지구상의 어느 생명보다 지혜로우며 외부환경과의 투쟁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강력한 생명집단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행히 식물의 생명현상에 대해 과학적 접근과 해석이 시도되고 있어 앞으로 식물의 놀라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