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탁월한 리더십 발휘한 과학자 베스트5

연구재능은 기본 로비 마다않은 적극성 발휘

이제 과학은 막대한 지원과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과학자는 혼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사회와 연구집단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연구를 수행해야 큰 업적을 세울 수 있다.강력한 리더십으로 거대한 업적을 세운 역사 속의 걸출한 과학자들을 만나보자.

노벨상을 받을 만큼 훌륭한 과학 연구성과가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답을 알고 싶어하는 문제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과학연구의 토양이 풍부하고 비옥해져야 한다는 것이 답이다. 그렇다면 과학연구의 토양이 풍부하고 튼튼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재능있는 학생들 중 과학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고, 과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의 연구를 위한 안정적인 지원, 적절한 보상 등 여러가지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것이 연구를 이끌어갈 리더십을 가진 과학자의 존재다.

근대 이전의 유명한 과학자들은 혼자서도 엄청난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현대로 올수록 과학은 많은 연구비와 연구인력이 참여하는 집단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따라 특히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과학자의 리더십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21세기 과학자의 덕목은 리더십

과학연구는 기본적으로 창의적인 활동이다. 과학연구의 규모가 커지면서 조직이나 연구행정의 측면이 과거에 비해 중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과학자들의 연구의욕을 고취하고 창의적인 발상을 자극할 수 있는 과학자를 이끌어가는 과학지도자의 리더십이 여전히 중요한 요소다.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한 과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국가, 기관, 분야에서 과학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공통의 결과를 보여준다. 또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구내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기 힘들고, 재능있는 다른 과학자들을 이끌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업적이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서 모두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시 말해 연구능력 외에도 리더십에는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포함돼 있다. 그 요소들은 과학자 개인이나 그가 처한 주변조건에 따라 달라지고, 그에 따라 각각의 리더십의 형태와 범위도 다르게 나타났다.

정치권의 후원이나 정치권력 같은 과학 외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경우, 학계의 제도적 수단을 장악한 경우, 감동할 만한 인간성을 소유했거나 다른 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재주를 가진 경우, 연구비 운영이나 새로운 주제 발굴 등 연구행정 능력이 뛰어난 경우 등 다양하다.

‘출판이냐 죽음이냐’슬로건 걸린 실험실 유스투스 프라이헤르 폰 리비히 1803 - 1873


유스투스 프라이헤르 폰 리비히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독일은 상대적으로 과학의 발전이 늦었지만, 19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1850-60년대까지 독일은 화학염료 산업에서 뒤처져 있었지만 1880년대를 지나자 유럽에서 사용되는 화학염료의 대부분을 공급할 정도가 됐다. 그 배경에는 새로운 염료를 개발하려는 기업의 연구의지와 유기화학의 발전, 능력있는 유기화학 연구자들의 성장이 있었다. 그 기원은 1840년대의 화학자 유스투스 프라이헤르 폰 리비히(1803-1873)의 실험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비히는 학생들을 독자적인 유기화학 연구자로 키워주는 연구내용과 제도적 장치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는 독일의 작은 지방대학, 기센대학에서 1826년에 실험실을 하나 열고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약제사 지망학생들이 화학 강의를 들었고, 처음 10여년 간 학생수는 20명을 넘지 않았다. 특히 유기화학으로 졸업논문을 쓴 학생은 몇명 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리비히는 연구활동에 열중해 새로운 분석과 합성방법을 개발하고 필요한 실험도구들을 고안했다. 유기화학자로서 리비히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고, 곧 저명한 학술지의 공동 편집장을 맡았다. 그는 화학 전공학생들에게 연구방법을 가르치고 그 결과를 자신이 편집하는 학술지에 논문으로 출판하게 했다. 리비히의 명성과 더불어 그의 실험실에서는 연구자들이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학생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840년경이 되자, 리비히 실험실은 유기화학 전공자만 20명을 넘어설 정도가 됐다.

1840년대에 리비히는 수많은 화학 전공학생들을 조직해 유기화학 연구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기가 기획한 연구과제의 일부분을 배정하고 그 결과를 출판하도록 독려했다. ‘출판이냐, 죽음이냐’(publish or perish)는 이 실험실의 슬로건이 될 정도였다. 그 결과 리비히의 학생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학생시절부터 연구경력을 쌓을 수 있었으며, 그 업적을 충분히 알릴 수 있었다. 때마침 연구업적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수 임용 관행이 독일의 대학에 정착함에 따라 리비히의 학생들은 쉽게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자신이 배운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유기화학 연구자들을 양성했다. 리비히의 연구중심적 리더십의 결과 독일은 유기화학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19세기 후반 유럽을 장악한 독일 화학염료 산업계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정치력과 사교력 출중 피에르-시몬 마퀴 디 라플라스 1749 - 1827


피에르-시몬 마퀴 디 라플라스


나폴레옹 1세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프랑스 과학은 내용과 제도면에서 모두 유럽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과 에콜 폴리테크닉에서는 수준높은 교육이 이뤄졌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대접받고 정부의 고위 관료가 되는 일도 흔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프랑스 과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도자는 피에르-시몬 마퀴 디 라플라스(1749-1827)다.

라플라스는 뉴턴이 제기한 고전역학의 원리를 천체에 적용하는 영역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그의 ‘천체역학’은 고전 천체역학의 집대성이다. 더 나아가 천체뿐 아니라 모든 자연현상이 밀고 당기는 뉴턴식 힘에 의해 설명된다는 기본입장을 가진 라플라스는 이러한 원리에 입각한 과학을 널리 발전시키고자 했다.

사교력과 정치력도 뛰어났던 라플라스는 나폴레옹 1세의 신임을 받아 내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과학기술을 새시대의 이념으로 생각한 나폴레옹 1세는 과학의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나폴레옹의 지원을 등에 업은 라플라스는 에콜 폴리테크닉의 장래가 촉망되는 졸업생들에게 개인적인 후원을 베풀면서 과학 연구를 조직화했다.

라플라스는 학사원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현상공모 문제와 심사위원회 구성을 장악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재능있는 평민 출신이 출세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중 하나가 프랑스 학사원의 현상공모에 당선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라플라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유능한 젊은이들이 그의 이념에 동조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능력있지만 다른 입장을 택한 과학도들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라플라스의 강력한 리더십은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프랑스의 정밀 수리과학을 높은 수준에 올려놓는 초석이 됐다.

인간적 매력으로 신뢰감 형성 죠셉 존 톰슨 1856 - 1940


죠셉 존 톰슨


19세기 중반까지의 과학 연구가 대부분 개인활동이었다면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 연구소는 과학연구에 새로운 측면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연구소는 공식적인 ‘이름’과 물리적 공간인 ‘건물’이 있다. 따라서 리비히의 실험실같이 비공식적인 연구조직이 경제적인 사정에 따라 쉽게 없어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연구소는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영속성을 가진다.

규모에 상관없이 연구소에는 전체 연구를 지휘하고 감독을 수행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연구조직이 있다. 연구소의 성패는 능력있는 연구자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어주는 요소가 있는지에 달려있다. 연구소에 어떤 점이 필요한지는 연구주제와 시대 문화적 배경에 따라 여러가지로 달라질 수 있으나,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과학지도자의 존재는 언제나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연구활동의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리더십의 대표적인 예가 전자 발견으로 유명한 영국의 죠셉 존 톰슨(1856-1940)과 수소원자 모형을 제시한 덴마크의 닐스 보어(1885-1962)다. 톰슨은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후 28세의 젊은 나이로 캐븐디시 연구소의 소장이 돼, 1919년에 은퇴할 때까지 35년간 재직했다. 그동안 노벨상 수상자 6명을 포함, 3백여명에 가까운 제자를 배출했다. 특별히 연구비를 더 주거나 연구설비가 넉넉한 것도 아니고, 그저 2-3년 연구하고 자리를 잡아 떠나는 연구소가 이렇게 왕성한 연구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 답은 톰슨의 리더십이다. 톰슨은 뛰어난 연구자이자 리더십이 강한 스승이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톰슨은 수학에 밝고 실험에도 능했으며, 음극선, X선, 기체 이온화, 원소 특성, 방사선 연구 등 다양한 연구주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지녔다. 이 주제들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면서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기 때문에 톰슨의 학생들은 폭넓은 주제 선택이 가능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연구주제를 권했고, 리비히처럼 강제성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케임브리지대학 소속의 캐븐디시 연구소는 자유방임적인 전통이 강했고, 학생들에게는 자율적으로 선택할 권리를 주어졌다.

귀족 전통이 강한 케임브리지대학은 다른 대학 출신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는데, 1895년에 규정이 바뀌어 영국의 다른 대학이나 호주 등 식민지 출신도 캐븐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곳에서 학생들이 모이면 학생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소지가 있었지만, 큰 갈등없이 정보를 교류하고 자율적으로 서로 도와가며 연구하는 분위기는 지속됐다. 오히려 타대학 출신학생들의 지속적인 유입은 캐븐디시 연구소에 큰 활력소 역할을 했다.

이것은 자유로운 연구분위기를 유도하는 톰슨의 인간적인 매력에서 비롯됐다. 학생들이 톰슨의 지도를 믿고 따르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학생들간의 관계, 학생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그의 인간적인 능력이었다. 톰슨은 모든 제자들의 생활, 연구, 진로에 대해 공정하고도 한결같은 관심을 기울였다. 학생들은 연구소를 떠난 후에도 계속 톰슨을 찾아와 의논하고 자문을 구했다.

사제지간 예의 무시한 파격적 분위기 닐스 보어 1885 - 1962
 

닐스 보어


톰슨이 한결같은 애정과 신뢰에 바탕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였다면 보어의 리더십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치밀한 토론이었다. 보어는 언제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발상을 중시하고 즐긴 사람이다. 그의 수소원자 모형 이론도 당시로서는 결과는 훌륭했지만 발상은 ‘황당’한 이론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보어가 물리학자로서 명성을 얻자, 덴마크의 칼스버그 재단은 1921년 코펜하겐에 닐스 보어 연구소를 설립하고 보어에게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양자역학의 성립과 발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보어 연구소의 가장 큰 성과였다. 양자역학의 주역들이 대부분 이 연구소에서 보어와 다른 동료들과의 격의없고 격렬한 토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완성했다. 양자역학의 주역들은 대부분 20대 중반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이었고, 보어는 이미 지위가 확고한 40대 지도급 과학자였다. 그러나 코펜하겐 연구소의 연구분위기를 조성하고 주도한 것은 아버지격인 보어였다.

그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발상과 자유로운 토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연구진행에서는 파격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보어 연구소의 특징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보어가 칠판에 무엇인가를 잔뜩 써놓고 그 앞에 서서 열심히 설명할 때 20대의 란다우(1908-1968)는 책상에 옆으로 길게 누워서 듣고 있었다. 상식과도 전혀 다르고, 고전물리학과도 전혀 다른 이론인 양자역학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은 이런 분위기에서만 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어는 또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 젊고 유능한 물리학자들에게 장학금을 주선해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 유학생 니시나 요시오(1890-1951)가 양자역학 발전의 결정적인 시기인 1923년에서 1928년까지를 보어 연구소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가 주선해준 장학금 덕분이었다. 캐븐디시 연구소와 보어 연구소를 거치면서 니시나는 새로이 형성되는 물리학이론뿐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과 자율적인 연구분위기를 익혔고, 이를 일본에 도입했다.

니시나는 귀국 후 첨단 현대물리학을 강의하는 한편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연구자들과 일본 사회에서 허용될 수 있는 수준에서 자유롭고도 자율적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니시나와 그의 학생들은 다양한 연구주제를 섭렵했고, 함께 토론하고 점심을 먹고 맥주 파티를 열기도 했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파격적인 것이었다. 니시나의 학생들 가운데 유가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노벨상을 받았고, 상당수의 다른 학생들이 일본 현대물리학의 주역이 된 것은 지식전달 못지 않게 중요하게 작용한 자유로운 연구분위기에서 촉발된 지적 자극 덕분이었을 것이다.

유망한 연구주제 발굴의 귀재 제임스 드웨이 왓슨 1928 -


제임스 드웨이 왓슨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함으로써일찌감치 명성을 얻은 제임스 드웨이 왓슨(1928-현재)은 20세기형 리더십을 가진 과학자의 또다른 모습이다. 그는 30대 초반에 이미 노벨상을 수상한 하버드대학 교수였고, 곧이어 출간한 ‘이중나선’으로 대중적인 지명도도 얻었다. 미국에서 그는 분자생물학의 대명사였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할 나이인 60대 후반에 야심찬 ‘인간게놈프로젝트’ 출범을 주도했다.

왓슨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무서운 아이’다. 그는 유망한 연구주제를 발굴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또 경쟁심이 강하고 도전적이며, 관습과 전통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의회나 영향력있는 인사들에게 로비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지만 비판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다.

그는 1969년에 하버드대학을 그만두고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소장이 됐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1940년대부터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소였다. 그러나 왓슨이 부임할 무렵에는 재정상태나 규모가 아주 나쁜 상태였기 때문에 하버드의 연구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왓슨은 부임 이후 ‘암의 유전학’에 연구소의 모든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놀라운 연구비 모금능력을 발휘해 연구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왓슨의 재임기간 동안 연구소는 유전자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규모, 재정, 연구성과 면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분자생물학·유전학 연구소로 발돋움했다.

리더십 발휘할 기회 없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 - 1955


알버트 아인슈타인


훌륭한 과학자라고 모두 리더십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라는데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가 리더십을 가진 훌륭한 과학지도자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전세계의 모든 물리학자가 다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유머가 풍부하고 자유주의적인 성품을 가져 항상 사람이 따르는 그였다. 만일 그가 원했다면 훨씬 더 많은 세속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과학 발전에 기여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어느 나라, 어느 대학의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재량껏 운영할 수 있는 연구소도, 연구프로젝트도, 학과프로그램도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예는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고, 리더십의 자질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적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은경 과학기술정책연구원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물리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