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나노세계의 요술지팡이 갖고 노는 물리학자 임지순

대롱모양이면서 굵기가 10억분의 1m밖에 안되는 탄소나노튜브는 도체이다가 다발로 있을 때는 반도체가 된다. 또 이들이 십자모양으로 배열되면 트랜지스터로 만들어지고, 디스플레이에서는 전자총으로 쓰인다. 이렇듯 요술지팡이 같은 탄소나노튜브와 인연을 맺은 물리학자가 있다. 곰곰히 생각하기를 즐기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임지순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크지 않은 키, 정리되지 않은 머리, 닥종이 인형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개구쟁이 모습의 한 남자가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탄다. 그가 향하는 곳은 임지순 교수라는 명패가 붙어있는 서울대 27동 226호. 지난 1998년 1월 탄소나노튜브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국내 언론을 달군 인물이라고 보기엔 너무 평범하다. 사실 그는 평범하지 않다. 경기고 시절 3선 개헌에 반대한 시위를 준비하다가 적발돼 한달 간 학교를 쉬었고, 서울대 수석입학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20대에 획기적인 박사학위 논문을 낸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고체물리학의 고전으로 통하는 그의 논문은 고체의 전자구조를 양자역학적인 방법을 이용해 컴퓨터로 계산하는 길을 열었다.


임지순 교수


탄소나노튜브와의 인연

탄소나노튜브하면 임지순교수(49)가 떠오를 정도로 그는 탄소나노튜브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와 탄소나노튜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996년 9월 그는 안식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논문 지도교수였던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의 마빈 코헨 교수를 찾는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던 그에게 탄소나노튜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사실 당시 많은 과학자들에게 탄소나노튜브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직관적으로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연구 레이더망에 탄소나노튜브가 걸려들었다고 하면 좋을까.

그는 곧 미국 라이스 대학의 스몰리교수가 발견한 다발형태의 탄소나노튜브가 반도체 성질을 갖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왜 다발형태의 탄소나노튜브가 한가닥일 때는 도체이다가 다발로 있을 때는 반도체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머리는 슈퍼컴퓨터와 함께 바쁘게 움직였다. 결국 그간의 모든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거울대칭성’(mirror symmetry)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대칭성은 자연계를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예요. 탄소나노튜브의 전기적인 성질을 생각하다가 계산 결과를 보고 해석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대칭적인 탄소나노튜브의 대롱모양에 착안하게 됐어요. 그 모양 때문에 특별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신이 자연에 숨겨놓은 아름다운 질서가 대칭성으로 풀린 것이다. 탄소나노튜브 하나는 거울대칭성을 갖고 있어 금속성질을 갖지만 다발로 있을 경우 거울대칭성이 깨지면서 반도체가 된다는 이론이 발표되면서 실리콘 반도체보다 집적도가 1만배 이상 되는 새로운 반도체의 출현을 위한 연구는 가속화됐다.

그는 2000년 4월 21일자 ‘사이언스’지에 미국의 연구팀과 공동으로 ‘최소형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 제작기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반도체가 실현 가능함을 보였다. “탄소나노튜브가 십자형으로 만나는 부분에서 힘이 작용해 전기가 많이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계산해 미국 버클리대 연구진에게 넘겨줬고 실험그룹에 의해 탄소나노튜브 트랜지스터가 만들어졌어요.” 사실 1년 전에 네덜란드의 데커박사 그룹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트랜지스터를 만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크기가 너무 커 탄소나노튜브의 장점인 소형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반도체가 실용화되려면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소자를 어떻게 집적시키느냐가 관건이다. 집적의 문제는 중요한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실리콘 반도체의 성능이 포화에 다다를 2010년경에는 탄소나노튜브가 차세대 반도체로서 자리매김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임지순 교수의 탄소나노튜브^다발형태의 탄소나노튜브. 나노(10-9m)수준 인 개개의 탄소튜브는 원의 지름을 중심으로 정확히 좌우 대칭이다. 즉 중심축에 거울을 놓 고 보면 원래 튜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거울대칭성이라 한다. 이런 구조 때문 에 두개의 에너지 띠가 서로 교차할 수 있어 금 속 성질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튜브들을 그 림처럼 다발로 만들거나, 튜브에 다른 원자를 붙이거나, 튜브 모양을 변형시키면 거울 대칭 성이 깨진다. 결국 교차하던 에너지 띠가 갈라 져서 반도체가 된다는 이론이다.


지하철도 연구실

탄소나노튜브의 반도체적인 특성을 규명하고, 십자형으로 배열해 트랜지스터를 만들도록 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 그는 “자꾸 앉아서 생각해보면 되죠. 하하…”라며 이론물리학자의 개성이 물씬 풍겨나오는 평범한 진리를 언급한다. “초등학교 자연시간에 태양계 행성의 운동에 대해 배울 때였던 것 같아요. 달의 모양이 바뀌고 밀물과 썰물이 일어난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유는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죠. 머릿속에 달과 지구와 태양을 그리고 그들의 운동을 잘 생각해보니까 우리에게 보이는 현상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가 생각하기를 즐긴 것은 오래된 일이란 말이다.

그에게는 실험실이 없다. 굳이 실험실을 찾자면 그의 두뇌가 실험실이다. 연구주제가 머릿속에 맴돌 때 그의 두뇌는 슈퍼컴퓨터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 모든 가능성의 조합 속에서 자신이 관심있는 것을 알아내려면 어떤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위해 어떤 실험값이 얻어져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다. 그는 아이디어를 찾고 실험물리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뭔가를 찾을 수 있고 실현시킬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주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뭔가를 하면 빠져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그의 버릇이다. 어렸을 때 책을 읽다가 밥먹으라는 소리를 놓친 것은 비일비재하다. 뭔가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귀까지만 오고 머릿속까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며 웃는다. 이런 그의 습관은 생활 속에 그대로 묻어난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그는 지하철에서 여러가지를 한다. “졸리면 자기도 하고, 다음날 강의 준비할 때도 있고, 여러 책을 보기도 하고, 논문을 쓸 때도 있죠.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지 모르지만…” 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생각을 곰곰이 해야한다’는 것은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자기 혼자 깊이 생각할 때 가능한 것 같아요. 그래서 학생들한테 내일까지 이것하고 모레까지 저것 하라는 식의 말은 잘 안해요. 누가 하라는 대로만 해서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 어렵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인 것 같아요. 정해진 문제는 잘하는 편인데 스스로 뭔가를 찾는 것은 어려워 하니 말이예요”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제자인 한승우박사도 인정하는 점이다. “선생님은 무한번의 기회를 주세요. 7년째 선생님께 배웠지만 학생들한테 ‘왜 안해왔어’라는 말을 하신 적이 거의 없어요. 덕분에 시간에 쫓겨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그는 “학생들한테 조금 더 연구에 대한 압력을 가하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라며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임지순교수의 1대 제자인 유병덕교수(서울시립대 물리학과)는 그의 지도철학에 지지를 보냈다. “보통 학생들은 연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산을 정신없이 해요. 그리고 결과를 얻으면 다 풀었다고 생각하죠. 박사과정에 있을 때 저도 그랬어요. 당시 선생님은 결과의 물리적 의미를 물으셨어요. 물론 대답을 못했죠. 선생님은 문제를 풀고 답을 구하는 것이 절반의 일이라면 나머지 절반의 일은 답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이러한 가르침은 현재 유교수 연구생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무한번의 기회를 주려는 그의 철학은 학생의 장래를 멀리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명쾌한 강의, 지저분한 강의 노트

인터뷰를 위해 두번 만났는데 모두 파란색 양복을 입고 있어 파란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고 같은 색깔이면 아침에 선택의 고민에 빠질 필요가 없어 편해요. 헤헤…”라며 수줍게 웃는다. 알고보니 그의 파란색 양복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는 독특한 강의 스타일과 세미나 시간에 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의할 때 들고 오는 지저분한 강의 노트, 강의 후 양복 전체에 묻어있는 분필가루, 바지 주머니에서 등장하는 분필 등 그의 수업에 얽혀있는 에피소드는 많았다. 박노정(서울대 박사과정)씨는 “교수님께 대학원 과목 중 제일 어렵다는 전자기학을 배웠는데, 어렵고 많은 내용들의 아이디어를 콕콕 집어내서 설명하시는데 감탄했어요” 라며 수업과 관련된 그의 모습은 명쾌한 강의의 재미있는 액세서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세미나 시간에 눈을 감는 그의 모습이다. 물론 조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분명히 다른 연구자가 발표할 때는 자는 것 같았는데 질문은 핵심적인 것을 하니 사람들로선 의아스럽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그는 불을 끄면 졸리기 마련이고 연구자의 발표내용이야 미리 알고 있으면 질문할 꺼리는 이미 갖고 있는 것 아니냐며 겸연쩍어 한다.

그는 일주일에 3번 정도는 관악산에 오른다. 등산을 할 때 그는 모든 생각을 지우려고 한다. 충분히 방전해야 충분히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 외 특별한 여가활동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것 외에 없다. 전에는 바둑도 두고 테니스도 했지만 요즘은 시간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집에 가서는 평범한 남편, 아버지인 그가 자녀들한데 거는 기대는 조금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뭘 하라고 하셨던 적은 없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안보이게 도와주셨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도 특별한 욕심은 없어요. 단지 자기들 적성에 맞는 것을 하길 바랄 뿐이죠.”

덧붙여 그는 학생들이 진로를 정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흥미라고 강조한다. “흔히들 물리학은 천재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아인슈타인 시대까지는 그랬을지 몰라도 현대에 와서는 할 수 있는 분야가 매우 많아요. 그래서 물리가 재미는 있는데 능력이 안될 것 같아 포기하는 일은 없길 바래요” 라며 “그리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어렸을 때 책을 다방면으로 많이 읽어서 그런지 다양한 시각으로 현상을 보고 종합하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학가서 미국학생들의 창의적인 발상에 놀랐어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거죠. 하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힘주어 말한다. 부족한 것을 아쉬워하기 보다 장점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뼈있는 한마디였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산파

그는 요즘 탄소나노튜브가 실제적으로 응용되는 디스플레이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브라운관에서 시작한 디스플레이는 액정표시장치(LCD)와 플라스마 디스플레이패널(PDP)까지 발전했다. 하지만 LCD 모니터는 시야각이 좁고 해상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고, PDP는 전력소모가 많고 가격이 비싼 것이 흠이다. 이런 것에 비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디스플레이(전계방출 디스플레이, Field Emission Display: FED)는 소비전력과 제작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화질도 기존의 브라운관 이상 수준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탄소나노튜브는 약간의 전압을 가해도 안정적으로 전자가 방출돼 전자총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그 모양이 전자총이 되기에 딱 좋은 형태예요. 화면 뒤에 있는 수십억개의 나노튜브가 전자총이 된다는 말이죠.”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디스플레이를 설명하면서 그는 시종일관 웃는다. 마치 탄소나노튜브가 그에겐 요술지팡이라도 되는 것 같다. 도체의 모습을 띠었다가 다발로 있을 때는 반도체로 되고, 십자 모양으로 배열해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이제는 디스플레이의 전자총으로까지 쓰니 왜 안그렇겠는가. 또 그의 미소 뒤에는 그의 연구가 현실화된다는 기쁨의 의미도 숨어있다. 탄소나노튜브 반도체가 2010년경이 돼야 그 실체를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데 반해 FED는 최근 삼성종합기술원 김종민박사팀에 의해 세계 최초로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의 기반에 든든한 이론물리학자인 임지순교수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2003년 정도면 꿈의 디스플레이로 불릴 FED가 상용화될 전망이다. 우리의 생활과 관련된 것을 하고 싶어 고체이론 쪽으로 전공을 정하게 된 그의 꿈이 하나의 결실을 맺는 것이다.

요즘 탄소나노튜브로 눈코 뜰 새 없지만 기회가 닿으면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있다.“생물학에 흥미로운 것이 많잖아요. 물질의 구조를 밝혀낸 물리학의 아이디어나 계산 방법을 생물학 쪽에 적용하고 싶어요. 생물학은 현상적으로 많은 것을 이뤄 냈지만 단백질의 구조와 같은 물리적인 특징은 규명되지 않았잖아요.”그만큼 할 일이 많다는 말이다. 아이들처럼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물리학자, 임지순교수. 그는 오늘 나노세계에 감춰진 자연의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임지순 교수가 걸어온 길

1951년 서울 출생,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경기중, 경기고 졸업
1974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7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물리학 석사
1980년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물리학 박사
1980년-1982년 매사추세츠 기술연구소 박사후 연구원
1982년-1984년 AT&T 벨연구소 박사후 연구원
1984년-1986년 벨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연구원
1986년-현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1991년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최우수논문상 수상
1995년 제5회 대한민국과학상 수상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장경애 기자
  • 사진

    장성환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전자공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