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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진짜 우주를 관측하다

코페르니쿠스를 증명한 갈릴레이

충돌구덩이,산,골짜기가 많은 달,수많은 별들이 흐르는 은하수,목성 주위를 돌고 있는 4대 위성,달처럼 차고 기우는 금성.지금은 조그만 망원경이나 쌍안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하지만 최초로 망원경을 하늘로 향했던 갈릴레이에게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17세기 초 인간 시력의 한계를 능가하는 도구인 망원경이 하늘의 신비를 밝히는데 새롭게 등장했다.그 첫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은 이가 바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였다.갈릴레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일이 자연의 의문을 해결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많은 사람의 머리에 남아있던 편견을 뛰어넘어 모든 대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했다.이로써 천문학에 대한 케플러의 수학적 접근이 구체화됐을 뿐 아니라 물리학에서는 뉴턴과 그의 계승자들의 길이 열렸다.

코페르니쿠스의 신봉자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난 갈릴레이는 열살 때 예수회 수도원에 보내졌다.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을 배웠다.

1589년 피사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며 3년 후 베니치아 공화국의 파도바 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였으며 당시 파도바는 학자들이 별다른 걱정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종교적 억압이 짓누르던 시대에 파도바의 환경은 갈릴레이의 연구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갈릴레이는 대학에서 지구중심설에 기반을 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가르치긴 했지만 그 체계를 믿지는 않았다. 1597년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수년 전부터 믿어왔고 이미 오래 전에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는 꺼려집니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후로도 10년이 넘게 믿지 않는 내용을 강의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대학의 방침에 따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낡은 천문학을 가르쳤다. 왜일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성서에 모순됐기 때문에 공개적인 지지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르던 시대였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에서 화형을 당한 사건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한데에 부분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갈릴레이는 당장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보다는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으려 했다. 망원경이 그 증거를 제시해주기를 바랬다.


갈릴레이가 거쳐간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9배율짜리 망원경 제작


갈릴레이가 직접 만든 망원경,그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달의 다양한 지형,별들이 가득한 은하수,목성의 위성 등을 발견했다.


망원경은 언제 누구에 의해 발명됐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인들은 유리가 보급된 후 수백년 간 유리를 이용해 구슬이나 병을 만들었다. 이 기구들을 통과한 물체가 실제보다 비틀어지고 커보이는 것을 보고 망원경을 고안해냈을 법한데 망원경의 등장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1608년 10월 네덜란드의 안경제작자로 알려진 한스 리페르세이가 긴 통에 렌즈를 넣어 만든 장치를 멀리 볼 수 있는 기구로 특허신청을 낸 기록이 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깝고 크게 보이도록 하는 기구는 이미 몇년 전부터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제작해 팔았으며 1608년경 이미 파리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물체가 확대돼 보이기는 해도 두세배 정도이고 희미한데다 상도 일그러져 보였다. 당시 과학자들도 망원경의 기능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품격있는 진리와는 거리가 먼 환상이나 환영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1609년 베네치아를 방문한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설명서를 구해 그 원리에 대해 이해한 후 곧장 망원경 제작에 몰두했다. 갈릴레이는 직접 렌즈를 깎고 갈았다. 다행히 베네치아는 렌즈 가공이 발달해 있어 필요한 재료와 물품을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드디어 아홉배율의 망원경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8월 베네치아 종탑 위에서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망원경의 능력을 실연해 보이기도 했다. 대성공을 거둔 갈릴레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그 망원경을 기증했다. 원로원은 이 새로운 기구를 군사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고 갈릴레이의 월급도 즉시 두배로 올려주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17세기 초에는 과학계에 커다란 논쟁이 벌어지려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2천년 전부터 강요돼온 프톨레마이오스의 낡은 사상에 던진 의문이 서서히 기지개를 펴고 있었고,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임으로써 대논쟁에서 승리할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달에 있는 산 높이를 재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본 달을 스케치한 작품.달표면에는 충돌구덩이인 크레이터가 보인다.


갈릴레이가 스스로 만든 망원경으로 처음 겨냥한 천체는 달이었다. 많은 사람이 달은 수정처럼 매끈하고 윤이 나는 공이라고 알고 있는 시대였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본 달은 전혀 다른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수많은 크레이터, 산맥, 계곡, 넓은 평원으로 뒤덮여있음을 보았다. 멋진 달 사진에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망원경으로 실제 달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면 그 놀라움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갈릴레이는 달 표면의 산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길이로부터 산의 높이를 계산해내기도 했다. 어떤 산의 높이는 7천m에 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당시 알려진 지구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았다.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달이 더 높은 산을 지니고 있다니 놀라움은 더해갔다. 또한 망원경으로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초승달이나 그믐달일 때 달의 어두운 부분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지구조)에 대한 설명도 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은 달 스스로 만든 빛이 아니었다. 달이 우리에게 반쪽의 어두운 면을 보일 때 지구는 정확하게 반쪽의 밝은 면을 달로 향하는 것이다. 그 희미한 빛은 달을 향해 지구가 비춘 빛이다. 결국 지구도 달처럼 태양 빛을 반사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수천년 전부터 인간은 은하수, 즉 하늘을 가로지르며 희미하게 빛나는 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져왔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곧 답을 주었다. 은하수는 다름아닌 무리지어 있는 수많은 별이었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별의 들판을 갈릴레이는 헤집고 달렸을 것이다. 미처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별에 대해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소자리에 있는 별무리에서 40개 이상의 별이 모여있는 것을 관찰했고 오리온자리를 모두 그리려 했으나 성운이 포함하고 있는 별들이 수백개로 너무 많아 시간이 없어서 포기했다. 맨눈으로도 보이는 여덟개의 별과 삼태성, 그리고 80개의 별이 있는 오리온의 칼부분만을 그렸다.”(주: 황소자리의 별무리는 플레이아데스성단으로 맨눈으로도 예닐곱의 별이 보인다. 오리온자리의 성운은 오리온대성운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이용해 스케치한 오리온자리(왼쪽)와 태양흑점(위).


달처럼 차고 기우는 금성 최초 관측

갈릴레이가 만든 다섯번째 망원경은 30배로 성능이 좋아졌다. 그는 이 망원경으로 또하나의 중요한 발견을 했다. 목성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네개의 달을 관찰했던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관념, 이를테면 당시에 통용되던 모든 천체는 지구 주위를 공전한다는 믿음에 도전하는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을 뒤엎을 중대한 발견이었다.

갈릴레이의 발견은 계속됐다. 그는 토성의 양옆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두개의 반점이 목성의 위성보다 크고 행성에 더 가까이 위치해있는 위성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행성의 주위를 도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갈릴레이는 이들이 잠시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것이 토성의 고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망원경의 성능이 너무 약했다. 토성의 고리는 45년 후에야 네덜란드의 호이겐스에 의해 확인됐다.

망원경을 통한 갈릴레이의 새로운 발견은 금성에 이르러 활짝 꽃피우게 됐다. 금성은 달처럼 변화해 때로는 둥근 모양이 되고 때로는 초승달 모양이 된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금성의 모양 변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반박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금성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지구나 달처럼 금성도 태양의 빛을 받아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을 가지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태양중심설을 따를 때 지구와 금성의 거리는 많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지구에서 보이는 금성의 크기도 많이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맨눈으로 보면 금성은 항상 빛나는 점으로 보인다. 밝기가 변하기는 것은 확실하지만 금성이 지구에 실제로 접근하는 만큼 밝아지지는 않았다. 바로 이 사실이 그때까지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런데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는 금성의 크기가 코페르니쿠스의 예견대로 변화했으며 지구에 가장 가까워질 때 커다란 초승달 모양으로 보였고 태양 너머로 멀어질 때는 작은 보름달 모양이 됐다. 금성이 지구에 접근하는 만큼 밝아지지 않았던 이유는 금성의 크기가 커지긴 해도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갈릴레이는 명백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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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김동훈 아마추어 천문가
  • 김지현 대장
  • 진행

    강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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