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물원을 찾는 계절이다.사람들은 동물원을 찾음으로써 도시 속에서 느낄수 없는 자연을 느낀다.그런데 동물들은 어떨까.우리 속에 갇혀 있으면서 사람들을 맞는 동물들의 생활을 들여다본다.
1956년 6월 창경원에서 필자가 겪은 일이다.당시에 태국에서 들여온 암컷 호랑이 백두호(白頭虎)와 금강호(金剛號)가 있었는데,백두는 금강보다 좀 여윈 편이고 성미도 괄괄했다.육식동물에게 구충약을 먹이기 위해 먼저 구충 검사를 해본 결과,유난히 백두에세 회충이 많았다.사흘을 굶기고 약을 고기살점 속에 감춰 넣어줬지만 백두는 첫 입에 뱉어버리고는 다시 먹으려들질 않았다.투약솜씨가 서툴러 쓴 약이 입안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투약을 미루고 여느 때처럼 고기를 주었지만,끼니마다 거부했다.사흘 만에야 조심조심 먹기 시작한 기억이 생생하다.
다시 공을 들여 가능한 자극이 덜한 약을 여러 개의 고깃점에 나눠 넣어 평상시의 사료와 번갈아 줬다. 한점, 두점…. 얼마 만큼의 약을 먹은 다음 마지막 한점은 뱉어냈다. 그러나 효과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 후부터가 문제였다. 몇일이 지나도 백두가 전혀 먹이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었다. 닷새, 엿새…. ‘저러다 죽지나 않을까’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허기져하는 것 같지 않았고 증오에 찬 태도까지 보였다. 걱정스러워 틈틈이 들여다볼라치면, 백두는 으르렁거리며 구석으로 몸을 피하든지 아니면 “어흥!” 외마디 포효와 함께 송곳니를 드러내고 날아와 창살을 물면서 동시에 앞발로 치며 공격해왔다. 그럴 때면 번번이 혼비백산해 몸이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한번은 12mm 직경의 쇠창살 한가닥이 휘고 쇠창살을 끼워 지지하는 철띠도 아래로 휘어졌을 정도였다.
백두는 열흘을 넘기고서야 겨우 다시 먹었고, 그 후에도 자주 항식(抗食)을 하다 1963년 늙어 안락사로 명을 마쳤다. 그러나 끝내 필자를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가운스트레스, 헝거스트라이크
동물원에서 좀 영리하다는 동물 중에는 흰 가운을 입은 수의사가 다녀간 후에 먹이를 의심하는 것들이 있다. 쓴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맞추기 위해 괴롭히는 일로 동물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사람이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이를 ‘가운스트레스’(gownstress)라고 한다.
이외에도 치료와는 관계 없이 이유 없는 항식을 하는 예도 많다. 원인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지만 야생에서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분명 감금상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쌓여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행동을 ‘헝거스트라이크’(hungerstrike)라고 부른다.
창경원은 일제시대 때부터 하마동물원이란 별명이 있었다. 해외 선진 동물원에서도 유례가 드문 하마의 번식을 여러 차례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때 식량부족과 폭격위험을 빌미로 도태됐다. 그후 하마가 다시 들어온 때는 1957년. 네덜란드에서 온 어린 하돌이, 하순이는 잘 자라 1968년부터 1982년 사이에는 무려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다시 그 새끼들도 번식을 순조롭게 해 일본과 국내 각 동물원에 팔려 나갔다.
여하튼 하마들이 들어와 살면서부터 동물원이 지저분하고 악취가 심하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이 때문에 간부들을 힐책하는 일이 많았다. 체중이 무려 3-4톤이나 되는 거구들이 배설하는 분뇨의 양도 많은데다 냄새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마는 뭍이나 물 속에서건 시도 때도 없이 볼일을 본다. 뿐만 아니라 항문에서 대변이 나오자마자 항문을 향해 낚시바늘 모양으로 뒤로 굽은 생식기에서 사이펀처럼 오줌이 치솟는다. 때맞춰 짧고 힘센 꼬리를 좌우로 힘껏 내저으며 대변과 오줌을 함께 아래 위 사방으로 흩날려 버린다. 이 혼합물은 온통 천장에건 벽에건 달라붙고, 금방 간 수영장의 물도 똥물로 바꿔 놓는다.
여름에는 여름대로 더워서, 겨울은 후덥지근한 온실에서 지내기 때문에 하마우리는 사철 지저분해, 사육사가 웬만치 쓸고 물갈이를 해도 청결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마우리는 너무 청결해도 병이다. 적당히 분뇨의 냄새가 풍기는 곳이어야 하마는 편안해 한다고 할까. 만약 하마를 아주 깨끗한 환경 속에서 지내게 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육사와 천산갑의 대결
대부분 동물들의 배설물에는 그 나름의 효용이 있다. 우선 배설물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데 쓰인다. 새 우리에 이주한 호랑이가 사방 벽에 오줌을 뿌려 자국을 남기는 것도, 늑대가 제 길목에 대변을 묻어두는 것도 같은 의미다. 동물에게서 이런 것을 없애면 마치 울도 문도 없는 방에서 불안해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불안에 빠진다.
유럽의 한 동물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천산갑 사육을 담당한 신입 사육사는 퍽 성실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동물사의 청소를 하고 돌아서면, 천산갑은 번번이 바로 오줌을 싸서 더럽혀 놓곤 했다. ‘사육사의 청소냐, 천산갑의 오줌싸기냐’ 경쟁을 하다 결국은 천산갑이 오줌싸기를 중지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사육사가 엎드려있는 천산갑을 일으켜보니 갑자기 몸을 떨며 그 앞에서 죽고 말았다. 수의사의 검사결과 사인은 탈수였다. 잦은 배뇨로 체내수분이 동이 난 때문인데, 자신의 영역에 오줌으로 울타리를 칠 수 없게 된 천산갑이 받은 스트레스가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고슴도치 모양이면서 토끼만한 호저(표큐파인)는 성적으로 흥분하면 대량의 오줌을 싸 상대방을 흠뻑 적신다. 기린은 막 떨어지는 암컷의 오줌을 혀로 받아 음미함으로써 혼인의 적기를 가늠한다. 오줌에 섞여있는 호르몬이 사랑을 감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말이다.
산토끼는 몸을 구부려 입을 자신의 항문에 대고 나오는 묽은 배설물을 모조리 핥아먹는다. 이것이 맹장분이고 두번째 싸는 것이 콩알같은 토끼똥이다. 이를 못 먹게 하면 산토끼는 불안해하면서 정상적인 발육을 하지 못한다.
코알라의 경우 어미의 대변은 곧 새끼의 이유식이다. 어미가 먹은 뻣뻣한 유칼리 잎이 대충 소화된 것으로 여기에는 고농도의 비타민, 미네랄, 단백질, 섬유질이 포함돼 있다. 그래서 어미 잃은 코알라 새끼를 인공적으로 기르기는 어렵다. 몇몇 예에 불과하지만 동물에게서 분뇨는 단순히 소화된 찌꺼기가 아니라 중요한 의미와 효용이 있는 것이다.
원숭이들이 놀고 코끼리들이 걷는 모습을 자세히 보는 사람이 있을까. 사육사조차도 일상적인 동물들의 모습을 쉽게 지나칠 정도인데 가끔 오는 사람에게 유심히 본 적이 있느냐를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은 든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개코원숭이 바우의 이상행동
이름이 바우와 순이인 개코원숭이 한쌍이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바우가 자위행동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장함에 따라 이들은 연중 발정이 잦았는데, 발정기에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교미를 하곤 했다. 순이는 지겨운 듯 했지만 바우의 위세에 눌려 티를 내지 못하고 피동적이나마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바우는 사이사이 자위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지쳐 쓰러질 것 같아 각방에 분리시켰다. 그랬더니 바우와 순이가 길길이 뛰고 소리치며 항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도로 함께 뒀다.
아니나 다를까, 바우는 점점 수척해져 급기야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조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 못할 일은 무엇인가 눈만 띄면 거의 반사적으로 손이 생식기로 가는 것이었다. 손님이 “이놈!” 해도 그렇고, 사육사의 열쇠고리 소리만 나도 그랬다. 그러다 바우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
일본의 동물원장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 얘기를 했더니 의외로 관심을 보이는 이가 많았다. 관리를 받는 동물들의 이해 못할 행동으로 고민하기는 이가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고 여겨질 뿐 이상행동에 대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동물원의 동물 중에는 새끼를 낳아 놓고도 돌보지 않는다든지, 나아가 제 새끼를 먹어 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또한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팔다리를 물어 뜯기며 별로 아파하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더 나아가 밤을 새워 제 발자국만을 되 디디며 왔다 갔다 하다가 창살에 눈두덩이를 스치고, 시멘트 바닥에 발바닥이 닳아 피가 낭자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처를 키우는 동물도 있다. 이런 행동은 야생에서는 없는 일이다.
동물도 빵만으로 못살아
근래 동물원의 시설은 인간에게 고급 아파트라 할만큼 문명화됐다. 사람들은 크게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동물들도 이만하면 부족할 것 없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동물들에게 그러한 생활이 행복한 것일까.
야생동물이 드넓은 곳에서 생활할 때, 동물들의 행동은 세가지 충동에 의해 지배된다. 식욕, 성욕, 방어욕이 그것이다. 이 충동이야말로 곧 그들의 생존을 뜻한다. 쉴틈 없이 그들을 몰아대는 충동이 야생동물을 한층 야생동물답게 만들어 종 고유의 생활행동패턴을 만든다.
그런데 동물원의 한정된 조건에서는 이런 충동을 받아들여 욕구를 충족할만한 기회가 거의 없다. 식욕, 성욕, 방어욕 모두가 채워지고 있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는 볼 수 없다. 스스로의 노력없이 결과만이 있을 뿐 거기까기 이르는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정한 시간에 영양식단이 배급되고, 발정하면 배우자를 데려다 준다. 철장이나 콘크리트 집 안에 있으니 적이 침범해 올 염려도 없다. 추우면 따뜻하게, 아프면 치료도 해준다. 그런 것들을 모두 사람이 해준다. 스스로 사냥하고, 투쟁하며, 소굴에 안주하기 위한 준엄한 생존경쟁의 긴장감을 맛보지 못하고 세월만 보낸다. 그래서 동물들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스트레스는 쌓여간다. 그러다보니 전에 없던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동물원의 상황에 대해 유럽의 동물원장들은 경종을 울렸다. “동물들도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몸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처리하지 못하면 동물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한다. 좌절과 욕구불만은 마침내 스트레스로 쌓이고 정신불안에 빠지는 나머지 심신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해 동물원도 대책을 세우고 있다. 우리 안에 적절한 놀이시설을 만들어주고 가능한 사육사가 놀이상대가 돼 동물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우리를 본래 살던 환경과 비슷하게 바꿔준다. 같은 환경에서 살았던 동물 중 싫어하지 않는 것끼리 같이 살게도 한다. 이 외에도 야생시절에 먹던 먹이를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궁여지책일 뿐 한계가 있다.
장자는 “늪가의 꿩은 열걸음에 한번 먹고 백걸음에 한모금 마신다. 구차하지만 풍부한 새장에 갇히기는 싫어한다”고 했다. 우리 안에 갇힌 불쌍한 동물을 위해 동물원은 없어져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