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몸을 던지는 환경파수꾼 그린피스


고래잡이를 막기 위해 그린피스 회원들이 일본 배들 사이로 끼어들고 있다.


코끼리의 위턱에서 앞으로 뛰어나온 앞니(상아)처럼 알류산열도는 알래스카에서 태평양으로 쭉뻗어 있다. 그 끝머리쯤 앰치카섬이 있는데, 중앙해령이 통과하는 지역으로 지진이 많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원자력위원회(AEC)는 1965년부터 이곳에서 지하핵실험을 실시해왔다.

1969년 10월 2일에도 미국은 1메가t에 이르는 핵폭탄을 터뜨렸다. 당시 1만여명의 캐나다 환경단체 회원과 주민들이 “해일을 일으키지 말라”(Don’t Make a Wave)고 쓴 피켓을 들고 캐나다와 미국(알래스카) 국경 지역을 행진하면서 시위를 벌였지만, 미국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게다가 1971년에는 이보다 5배나 큰 핵실험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앰치카섬 핵실험은 미국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원자력위원회가 철저하게 언론을 봉쇄한데다가, 미국의 환경운동단체들이 핵실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주요한 환경단체로는 1892년 존 뮤어(1838-1914)가 설립한 최초의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당시 회원은 약 8만명), 1905년에 설립된 오듀본협회(약 12만명), 1919년 설립된 국립공원보호협회(약 4만명)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62년 레이철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경고한 환경오염에 관심을 두기보다 전통적으로 해오던 자연보호운동에 치중했다.

좋게 말하면 신사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약한 당시의 환경운동에 적극적인 행동을 도입한 사람은 짐 볼렌과 어빙 스토우였다. 볼렌은 2차대전과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를 겪으면서 반전반핵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스토우는 예일대학을 졸업한 변호사로 퀘이커교도(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기독교의 한 파로, 세례와 찬송 등 의례를 배격하고 개인의 내면세계를 추구함)였다. 두사람은 시에라클럽에서 환경운동을 했지만, 시에라클럽이 앰치카 핵실험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자 크게 실망했다.

스토우는 앰치카 핵실험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기를 원하는 볼렌에게 퀘이커교도들이 행하는 ‘증인되기’(bearing witness)라는 일종의 저항방식을 소개했다. 증인되기란 문제가 되는 현장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봄으로써 증인이 있음을 알리는 적극적이며 비폭력적인 시위방법이었다. 볼렌과 스토우는 1971년 앰치카섬에서 핵실험을 할 무렵 그곳으로 직접 찾아가 핵실험에 항의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방법은 1958년 미국이 비키니 환초에서 핵실험을 할 때 퀘이커교도들이 썼던 방법이기도 했다.

배를 타고 앰치카섬에 찾아가 시위를 벌이자는 두사람의 계획에 하나둘 동조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자, 영화평론가, 의사, 사립탐정, 법학도 등 직업도 다양했다. 그들은 모임의 이름을 1969년 시위 때 사용했던 ‘돈트 메이크 어 웨이브 위원회’(Don’t Make a Wave Committee)로 정했다가, 일반인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그린피스’(Greenpeace)로 바꿨다.

그린피스가 앰치카섬으로 향하기 위해 구한 필리스코맥(그린피스 1호)은 24m짜리 넙치잡이배였다. 그런데 워낙 낡아 9노트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었으며, 심한 폭풍을 견디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그렇지만 12명의 대원들은 1971년 9월 15일 필리스코맥을 타고 앰치카섬을 향했다. 필리스코맥은 출발하자마자 일찌감치 미국해안경비정에 의해 나포돼 앰치카섬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결국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핵실험을 11월로 연기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그린피스의 후원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린피스는 프랑스가 남태평양 모루로아 환초에서 대기권 핵실험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963년 미국, 영국, 러시아(옛소련) 등은 지하에서만 핵실험을 하자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프랑스와 중국은 여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또 핵실험을 하게 되면 당시 영해로 인정하던 12마일 밖까지 바다를 오염시키기 마련인데, 그것은 분명 국제법 위반이다. 그러니 그린피스로서는 이를 두고볼 수만 없었다.

모루로아 핵실험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은 뉴질랜드에 살던 캐나다 출신의 사업가 맥타거트였다. 그는 신문광고를 보고 그린피스 활동에 지원해 1972년 6월 12m의 범선인 베가를 이끌고 남태평양으로 나섰다. 그러나 베가호는 프랑스 순양호에 치어 심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이듬해 8월 수리를 마친 베가호는 다시 프랑스 핵실험장으로 접근했다가 맥타거트 등 대원들이 심하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이 세계 언론에 소개되면서 프랑스는 결국 “1974년 9월 유엔총회에서 앞으로는 지하핵실험만 실시하겠다”고 한발짝 물러서야 했다.

그린피스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프랑스가 핵실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방해하고 있다. 이에 화가 난 프랑스는 1985년 7월 뉴질랜드 오클랜드항에 정박 중인 그린피스 시위용 배인 ‘레인보 워리어’(무지개 전사)를 폭파해 버렸다. 이때 배에 타고 있던 사진기자 한명이 숨졌다. 이 사건은 후에 프랑스 정보국의 소행임이 드러나 국방장관 이하 관계자들이 줄줄이 옷을 벗기도 했다.

그린피스의 중심적인 활동은 핵실험 반대이지만 야생동물 보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일본 포경선을 따라다니면서 작살총과 고래 사이에 고무보트를 타고 끼어들어가 고래잡이를 방해했다. 모피용으로 팔려나가는 바다표범을 보호하기 위해 새끼 바다표범 털에 지워지지 않는 염색안료를 뿌리기도 했다. 못을 박은 곤봉에 힘없이 쓰러지는 태어난지 2주 밖에 안된 새끼 바다표범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캐나다 정부는 바다표범에 염색안료를 뿌리거나 새끼 바다표범을 옮기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그린피스 활동을 막았다. 이 법 때문에 새끼 바다표범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그린피스 회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와 같은 스타들이 참여하면서 그린피스 활동은 날로 성장해갔다.

그린피스의 주요 활동은 핵발전소, 핵폐기물, 유독 폐기물, 산성비, 남극, 고래 등을 감시하는 일이다. 그린피스의 본부는 암스테르담에 있으며, 전세계 32국(우리나라에는 없음)에 지부를 두고 있다. 회원수는 약 5백만명, 연간 예산은 3천2백만달러(1997년). 그러나 최근 기부금이 급격히 줄면서 재정이 어려운 형편이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 진로 추천

  • 환경학·환경공학
  • 정치외교학
  • 국제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