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시에 사는 한 건축가가 이상적인 거주지의 조건을 시민들 1천명에게 물었다. 응답자의 70% 이상이 전망이 탁 트인 숲 속에 집을 짓고, 가능하다면 강이나 호수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다고 했다. 첨단 문명에 둘러싸인 도시민들이 전망 좋은 숲 속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자연을 대표하는 숲은 회색빛 도시 생활에 찌든 우리들의 심성을 맑게 해주고, 심리적 안정과 정신적 치유효과를 주는 녹색의 안식처로서 독특한 구실을 한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자연환경 중, 그나마 자연의 진수가 비교적 잘 간직된 곳이 숲이고, 산업화와 도시화로 자연과는 유리된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자연 회귀 본능을 숲이 달래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이 살아가는데 산림을 위시한 녹지공간은 어떤 역할을 할까? 흥미로운 연구가 많지만 그 일부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도시의 녹지비율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고 심리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따라서 숲이라는 녹지공간은 시멘트벽으로 단절된 도시의 삭막한 정신을 치유해주는 병원과 같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창 밖에 마지막까지 붙어 있는 나뭇잎의 생명력을 보면서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환자의 이야기를 그린 감동적인 소설이다. 과연 이같은 사실을 과학적으로 검정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된 한 연구에 의하면 이것이 사실이라고 밝혀졌다.
미국 델라웨어 대학의 울리치 교수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중에서 병실 창을 통해서 숲을 볼 수 있는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를 구분해 수술 뒤 회복율을 조사했다. 조사결과는 놀랍게도 숲을 볼 수 있는 환자가 그렇지 못한 환자보다 입원기간이 훨씬 짧았고, 진통제의 투여가 적었으며, 간호 보고서에 나타난 부정적인 측면도 적었다고 보고됐다.
숲이 질병을 치유하는 병원역할을 한다는 것이 처음 과학적으로 보고된 것은 1900년대 초 뉴욕의 한 병원에 의해서였다. 입원환자들이 너무 많아 병실이 모자랐던 뉴욕의 이 병원은 결핵환자만을 따로 분리해 숲 속에서 야영을 시키며 치료를 계속했는데, 그 치유율이 상당히 높은 것을 발견하게 됐다.
이후 숲은 정신병의 치료, 이상행동의 교정, 사회성의 증가, 마약 또는 알코올 중독 치료, 소년범의 재범률 저하, 신체의 균형조절, 신경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보고가 계속됐다. 이밖에 몇몇 연구에 따르면 숲의 이용빈도가 증가할수록 학습능력이 증진되고 학교나 교사에 대한 자세도 호의적으로 변한다는 보고도 있다.
자아실현 욕구의 촉매
위와 같은 치유적 효과와 더불어 숲이나 녹지 공간을 빈번하게 그리고 충분히 접촉하는 사람일수록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것으로 보고됐다. 자아실현 욕구는 심리적 효용 중에서 가장 빈번히 거론되는 효용이며 최상의 효용으로 인정받는 욕구다. 자아실현 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매슬로는 인간의 기본욕구를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이들은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친화 욕구, 평가 욕구, 자아실현 욕구를 말한다. 피라미드 구조로 된 이 다섯 단계의 욕구 중, 생존에 가장 긴요한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는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심미적 특성이나 창의적 개성을 추구하는 자아실현욕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자아실현 욕구는 자기 자신의 충만, 즉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경향의 욕구다. 자아실현은 개인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아실현이란 궁극적으로 한 개인의 인간화를 뜻하고, 자아실현자는 비자아실현자보다 창조적이며 효과적인 삶을 산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매슬로는 자아실현의 과정에서 ‘정상경험’이란 용어를 사용해 인간이 어떻게 자아실현 욕구를 실현시키는가 설명했다. 그는 정상경험이라는 것은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최상의 즐거움과 깊이를 가진 시간이며 이를 통해 자아실현이 가능하고 한다. 또한 심리학자들은 자아실현된 인간은 자주 정상경험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분야 연구에 따르면 음악감상, 독서, 운동 등 많은 정상경험의 매체 중에 숲은 아주 좋은 매체로 보고되고 있다. 숲을 통해 자연의 리듬을 깨닫고 자연에 일치되는 과정에서 정상경험을 체득한다고 한다. 산림 체험과 정상경험과의 관계는 과거 산림을 이용했던 사람들(레오폴드, 뮈어, 쏘로우)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은 산림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정상경험을 가질 수 있었음을 자주 언급했다. 그리고 지난 20여년간 자아실현과 산림과의 관계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도 개인이 산림 속에서 지내므로 즐거움을 얻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아실현 욕구가 생성된다는 긍정적 관계를 실증적으로 보고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사한 연구가 실시됐다. 전국 제일의 녹지비율을 가진 과천시와 상대적으로 낮은 녹지비율을 가진 청주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상대로 자연에 대한 인식도와 자아실현 정도를 비교했던 연구가 그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도를 심사한 결과 산림을 위시한 녹지 공간이 월등하게 많은 과천 시민들이 청주 시민에 비해 자연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과천 시민들의 높은 인식도는 숲을 위시한 녹지 공간의 이용빈도와 관련 있음이 밝혀졌다. 특히 과천 시민들은 청주 시민에 비해 녹지 공간의 기능을 더 높이 평가했으며, 녹지 인식도에 대해서도 청주 시민에 비해 높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토대로 두 도시의 시민들 간에 자아실현 정도를 분석했을 때, 자아실현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가 과천 시민들이 청주 시민들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우리가 녹지를 지키려고, 아파트 건설로 사라질 노거수 한 그루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국립공원을 지키기 위해서 쏟는 정성의 근원은 이처럼 숲이 가진 소중한 효용에서 유래된 것이다. 삶의 질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이 녹색에 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녹색에 대한 본능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원조상은 숲에서 왔기 때문이다.
숲은 국토의 얼굴
숲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뿌리이며 국토의 얼굴이기도 하다. 흔히들 숲에는 그 나라의 정신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숲은 수천년, 수만년 동안 조금씩 변모하고 달라지긴 했지만 우리 조상들의 영혼과 숨길을 간직한 채 살아있는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멀게는 송강이 감상했던 바로 그 숲을 단원이 다시 감상하고 음미했으며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가깝게는 소월과 청록파 시인들의 시정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우리 숲인 것이다.
숲 속에는 이렇게 많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숨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숲에 간다는 것은 바로 조상들을 만나러 고향에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상들과 대화하기 위해, 또 그들이 느꼈던 멋과 풍미를 조금이라도 함께 하기 위해 숲에 가는 것이다. 그래서 숲은 그저 바라 보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숲은 나무의 거친 줄기나 새봄의 부드러운 새싹을, 찔레의 가시를 느껴볼 수 있는 장소이며, 새들과 벌레와 나무와 개울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며, 부드러운 흙과 꽃과 풀잎 향기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자리, 한국의 자리는 바로 우리 숲에 가서 체험할 수 있는 냄새, 소리, 감촉 등으로 얻어질 수 있다. 앞으로 우리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만 지속성장을 할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지속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의 것이 무궁무진하게 담겨져 있는 숲을 통해 좀더 우리의 것을 찾는 노력을 할 때, 삶의 질은 향상될 것이고 보다 높은 수준으로 자아실현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숲은 다음 세기의 지구가족 모두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생태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교실이자 교과서이다.
생태맹을 치유하는 교과서
환경의 세기, 21세기는 지구 가족에게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생태학적 소양을 요구한다. 인류는 3개의 거대한 혁명적 변혁기를 넘어왔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과학기술혁명이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넘고 있는 과학기술(정보)혁명은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통신 기기를 익히도록 강제하고 있다. 정보혁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을 일컬어 컴맹이라고 한다. 산업사회에서 문맹이 제구실을 할 수 없었고, 정보화사회에서는 컴맹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듯이 이제 환경의 세기에는 생태적 소양이 결여된 생태맹(生態盲)이 사회부적응자가 될 것이다.
생태맹이라는 용어는 비교적 최근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태맹과 유사한 개념은 오래 전부터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염원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피력됐다.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철 카슨이나 ‘생태(환경)윤리’ 개념을 ‘샌드 카운티 알마낙’에 처음 소개한 알도 레오폴드는 생태맹으로 가득찬 사회가 몰고올 파멸을 그들의 저작을 통해서 이미 인류에게 경고한 바 있다.
생태맹과 관련된 저술은 다른 나라의 예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법정 스님이 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와 도정일 교수가 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생태계를 대표하는 숲이란 단어를 책 제목 속에 포함시킨 배경도 자연의 가치를 망각한 오늘의 물질문명을 질타하기 위한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생태맹은 생태적 지식의 결여라는 의미와 더불어 인간이 자연과는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파생된 인공적 환경을 당연시 여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루 한걸음도 흙을 밟지 않는 삶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만들어진 도시의 인공 환경을 당연시 여긴다. 그래서 자연과 화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 정서, 교감의 가치를 옳게 인식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주부가 쓰레기 분리수거는 철저하게 하면서도 새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멀쩡한 가구를 새로 개비하는 양태가 바로 생태맹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환경인식이다. 새롭게 개비하는 가구에 사용된 목재는 열대림의 벌채로 얻어진 것인데도 쓰레기와 환경의 연관성은 생각하지만 가구와 환경은 관련짓지 못하는 것이다. 멀쩡한 가구를 버리고 새가구를 구입하는 일은 열대림의 벌채를 알게 모르게 촉진시키고, 이것은 다시 생물다양성를 감소시키며 기후변화를 초래한다. 생태맹은 우리네 일상적인 삶이 모두 지구 생태계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작은 환경보호는 잘 실천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환경보호활동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생태맹의 눈을 뜨게 하는 숲과의 친화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생태맹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이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이들이 서로 조화롭게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에 맞게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즉 동물과 식물은 물론이고 토양과 강과 바위와 산과 같은 자연환경 요소와의 접촉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연과의 교감을 회복하고 공생을 모색하는 일이 생태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산림은 더 이상 임산물만을 생산하는 단순한 경제자원이 아니다. 산림은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를 생산하는 환경자원이자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순화와 예술적 감흥을 안겨주는 문화자원이다. 더불어 산림은 생태적 소양을 길러주는 원천이다.
산을 찾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산림이 자아실현욕구의 원천이며 생태맹을 치유하기 위한 살아 있는 교과서이자 교실이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