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덜난 나라를 살리겠다고 장롱 속 돌반지를 꺼내들고 나온 착한 국민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정표의 상징으로 하나 둘 선물받은 금붙이 하나 하나를 모아 쓰러진 나라를 살리겠다는 애국심이 눈물겹기만 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고마운 것은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일개 광물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기록에 따르면 금이 돈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백60년경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이 자신의 얼굴을 새긴 금화를 만들면서부터. 그러나 이 금화가 등장한 이후로도 금은 여전히 귀족이나 왕족 등 소수의 전유물이어서 주로 장신구를 치장하는데 사용됐다.
도대체 금은 왜 '귀한 대접'을 받을까. 이는 기본적으로 희귀성에 기인한다. 세계 금 평의회(WGC)에 따르면 지난 6천년 동안 채굴된 금의 총량은 대략 12만5천t에 불과하다. 19m의 정육면체로 만들어 쌓는다면 에펠탑 높이(3백17m)에도 이르지 못하는 양이다.
골드 러시 이후 전세계 금 홍수
여러 모로 금은 돈으로 사용하기 안성마춤이다. 자연적인 희소성으로 금 홍수가 일어날 우려도 없다. 게다가 작고 편리하면서 높은 가치를 지닌 금은 녹이 슬지 않으며, 주조하기도 쉽고 감정하기도 쉽다. 금은 모스 경도계상의 석고나 방해석 수준인 2.5-3의 굳기로 무르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금을 깨물어봄으로써 쉽게 감정할 수 있었다.
금이 인류에게 한발 다가온 것은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불붙은 신대륙 탐험이 계기가 됐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했던 16세기의 스페인 탐험가들은 그곳의 무수한 금장신구들을 약탈해 싣고 온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금이 전세계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손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벌어진 이른바 '골드 러시'의 덕택이었다.
사실 현재 유통되는 금의 90% 이상은 골드 러시가 시작된 1848년 이후에 캐낸 것으로, 그 이전까지 전세계에서 채굴된 금의 양은 모두 합쳐 1만t 정도에 불과했다. 기술이 지금만 못했던 기원전 2000년의 이집트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엄청난 금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고작 1년에 1t 정도씩을 생산했을 뿐이라고 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에서 생산되는 금의 양은 1년에 2천3백t 정도. 전세계 생산량의 3분의 2를 내놓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뒤를 이어 미국, 옛소련, 호주, 캐나다, 브라질, 칠레, 중국, 가나, 인도네시아에서 10t 이상의 금이 생산된다. 우리나라는 최근 유일한 금광인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이 채산이 안맞아 채광을 중단함으로써 '금맥'이 끊긴 상태.
금이 귀한 이유는 자연 상태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많은 사람들이 금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지금까지 연금술이 성공한 예는 없다. 바닷물 1t에 0.1-2g의 금이 함유돼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꽤 오래 전이지만, 아직 이를 금으로 만드는 연금술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금은 석영이나 화강암 등의 광맥(山金)과 충적토(砂金)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로 섞여 있다. 종종 채광 과정에서 바위나 기타 광물질에서 떨어져 나오기도 하지만(노다지), 이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광석에서 금을 추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일단 채굴된 광석을 물 속에서 분쇄하고 수은으로 아말감을 형성하도록 한 다음 수은을 증발시키는 수은혼합법과, 시안화나트륨((NaCN)의 수용액이 공기와 합쳐질 때 금을 녹이는 성질을 이용한 시안화법.
그러나 이들 제조법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믈고, 대개는 병용되고 있다. 보통 1t의 광석에서 8g 정도의 금이 나오면 채산성이 맞는다.
경박단소와 궁합 맞아
불멸의 상징답게 지금까지 인류가 캐낸 금의 85%는 아직도 어떤 형태로든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금은 도대체 어디에 얼마만큼 사용될까.
금의 다양한 용도 가운데 뭐니뭐니 해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부분은 장신구다. 전체 생산량의 70%가 이 용도로 소비된다. 그리고 재산 보전 수단인 금괴가 그 뒤를 따르고 있는데, 대략 20% 가량이다. 그러나 금의 본모습은 3백t 정도의 양이 소모되는 나머지 분야에서 보석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발한다.
금이 가진 물리적 성질은 여타의 금속을 압도한다. 무엇보다 두드리거나 압착했을 때 얇게 펴지는 성질인 전성(展性)과, 늘어나는 성질인 연성(延性)에서 금을 따라올 물질은 지구상에 없다.
게다가 금은 유연하며 부식되지도 않으며 열과 전기전도율은 최고인 은 다음이다. 한가지 금속이 이처럼 다채로운 성질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쓸모가 무궁무진하다는 얘기다.
우선 산업에 투입되는 금의 첫째 수요처는 전기 전자 분야다. 우리 시대의 높은 기술력은 금을 주머니 속의 계산기나 컴퓨터, 세탁기 등에서부터 미사일,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 분야의 금소비는 꾸준히 늘고 있는 추세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이 분야가 요구하는 덕목인 경박단소(輕薄短小)와 금의 물리적 성질은 궁합이 맞아떨어진다. 금이 지구상에서 가장 무거운 물질이어서 가벼움 면에서는 결격사유가 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금덩어리를 통째로 쓰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전자산업의 요구사항을 맞도록 금을 최대한 가늘고 얇게 만드는 기술의 발전으로 1천분의 1mm 이하에 불과한 두께로 펼 수 있고 1g의 금으로 최대 3km까지 늘일 수 있다.
전자 제품을 뜯어보면 각종 부품이 회로기판에 가득 꽂혀 있다. 여기서 발견되는 스위치나 릴레이, 커넥터 등 부품의 접점은 대개 금도금 제품을 사용한다. 또한 이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해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된 회로기판의 연결 부위 역시 매우 얇은 금 필름으로 도금된 접촉면을 가지고 있다.
우주왕복선의 추진 엔진과 동체의 연결 부분은 열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금이 들어간 합금으로 땜질을 함으로써 열을 반사하도록 한다.
또 달탐험선인 아폴로의 표면은 얇은 금막을 입힘으로써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방사선을 차폐한다. 이들 장치에 금을 사용하는 것은 열과 입사된 적외선의 98%까지 반사시킬 아니라 어떤 온도에서도 산화나 부식되지 않으며, 거의 0에 가까운 저항을 유지하기 때문.
전자 분야에서 금의 사용처를 얘기하면서 반도체를 빼놓을 수 없다. 반도체 제조공정을 보면 재봉틀 같은 기계가 칩 외곽을 빠른 속도로 찍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바로 리드 프레임 기판에 반도체 소자상의 전극을 연결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골드와이어, 즉 금실이다.
이 공정에서 금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정밀 부품 내부를 연결하는데 금만큼 믿을 만한 물질이 없는 탓이다. 골드와이어는 99.99의 순도로 정제됐으며, 지름은 1백분의 1 mm에 불과하다.
못쓰게 된 컴퓨터를 회수해 재처리하는 회사에 따르면 CPU가 포함된 컴퓨터 메인보드 하나를 녹이면 구리 1백g, 은 2.3-9g 등과 함께 0.7g 정도의 금이 나온다.
더구나 여기서 나오는 금은 순도 99.9% 이상으로 매우 품질이 좋다. 이에 따라 1년에 폐기 처분되는 컴퓨터를 25만대로 잡으면(환경부 추산) 모두 1백75kg의 금이 나온다는 계산이니, 이는 1돈(3.75g)짜리 아기 돌반지 4만6천여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우황청심환 금박의 효능
고대인들의 금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 그들은 금이 발하는 빛이 악마와 귀신을 물리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물론 개명한 요즘 세상에 금의 주술적 효과를 믿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질병 치료 효과를 주장한 고대인의 믿음은 일견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금을 약품원료로 사용하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금이 들어간 주사약과 경구용 약이 등장한 것이다.
이 연구의 바탕에는 철이나 동, 지르콘, 마그네슘 등의 원소가 인간의 생물학적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도 인체에서 모종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추측'이 깔려 있었다.
미국의 스미스클라인 비첨사를 비롯한 제약업체들은 금제재가 함유된 류머티스성 관절염 치료제를 개발했다. 금을 이르는 라틴어인 오럼(Aurum : 금의 원소기호 Au는 여기서 파생됐다)에서 이름을 따 오로노핀 등의 성분명으로 불리는 이 약은 리소좀에서 만들어지는 연골 파괴 효소의 생성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 역시 중금속이어서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나노(10-9) 단위의 극소량이 인체에 축적되면 일정한 효과를 얻는다는 얘기다.
20세기 들어서야 의료용으로 금을 활용한 서양의학과 달리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금을 약재의 하나로 써왔다. 동의보감이나 방약합편 등 동양의 상당수 의서에는 금이 신경안정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동의보감 처방에 따라 제조되는 우황청심환은 환약의 겉을 순도 높은 금으로 코팅한다.
일부 부유층에 한정된 경우이긴 하지만, 금은 술을 담거나 차를 끌이는데도 사용된다. 또 고급 일식집에서는 김밥에 금가루를 뿌려 팔기도 한다. 몇년 전에는 순금이 피부노화를 방지해준다는 선전과 함께 고가의 순금화장품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당시 업체들은 화장품 속의 순금이 체내에 흐르고 있는 미세한 전류의 이온 밸런스를 유지시켜주며, 혈액순환을 돕고 신진대사의 부산물을 배설하는 등 해독작용을 해 피부노화를 방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기질인 금이 곧장 인체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상당수 학자들은 금의 직접 섭취가 가진 효과에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있다고 해도 매우 미미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희대 본초학교실 이상인 교수는 "동의보감에 금의 효과를 언급한 구절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환약에 들어가는 사향 등 방향성 약재 성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는 용도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설명한다.
금 자체가 특별한 약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교수는 또 "탕재에 금을 쓰는 경우는 없으며, 금을 입히는 것은 그 약이 그만큼 귀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거나 아직 정확한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긴 했지만, 현재 진행중인 금의 인체 내 작용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된다면 금을 필요로 하는 의약품이나 식품은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니용으로 1년에 60t 사용
금의 사용처 가운데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분야는 바로 치과용 재료다. 요즘에는 세라믹 등 대체 재료들의 등장으로 사용량이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산업용으로 사용되는 금의 용도 중 치과용 금은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금 다음으로 소비가 많다. 이 분야의 금 소비량은 1년에 대략 60t 정도.
번쩍이는 금니는 얼핏 부(富)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뛰어난 전성과 항부식성, 그리고 인체에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는 점은 금이 치과용 재료로 사용되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실제 금은 이미 3천년부터 치과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원전 7세기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이가 빠지면 그 대용물로 금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16세기에 발간된 치과 교과서에도 충치를 때우는데 금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다.
치과용 금은 팔라듐, 은, 구리, 아연 등 다른 금속과 합금을 해서 사용한다. 순금의 무른 성질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금속과 섞는다 해도 변색과 부식 저항성을 유지하기 위해 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60% 이상을 유지한다.
여의도에 우뚝선 63빌딩처럼 건축물에도 금을 사용한다. 금도금한 유리는 1차적으로 건물의 미관을 고려해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금의 뛰어난 열반사율을 이용해 여름과 겨울철의 냉난방 효과를 거두기 위한 면도 있다.
1온스(1온스는 보통 28.35g이지만 금을 잴 때는 트로이 온스란 도량형을 사용해 31.1g을 적용)의 금으로 3백m2의 유리를 도금할 수 있으며, 이는 열 소모의 40%를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즈음 젊은 남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귀고리는 사실 옛날 선원들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항해 중 배가 난파돼 이름 모를 곳에 살아서 도착하면 돈으로 바꾸거나, 혹 죽으면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는 사람이 귀에 걸려있는 금을 팔아 장사지내는데 써달라는, 비상용의 의미다.
출범 당시 각국이 금을 출자해 설립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가 난파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배의 선원인 국민들이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귀고리를 빼내야 한다. 만년필촉, 시계 케이스, 안경테, 피뢰침 등 우리 생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금 극소량이나마 아쉬운 때다.
♣금의 단위 K의 유래
금을 재는 단위로 K를 쓰는데, 이는 중동지역에서 나는 식물의 한 종류인 캐럽에서 유래한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이것으로 요기를 했다 해서 '요한의 빵'이라 불리는 캐럽을 말리면 보통 어른 한 손에 24개가 잡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를 기준으로 금이나 소금 등 작고 가벼운 물건을 교환할 때 척도로 삼았다. 순도 99.99의 순금을 24K로 표시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따른 것이다.
순금은 장신구용으로는 그리 단단치 못하다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한두가지의 다른 금속들과 섞어 쓰게 마련인데, 이때 합금에서 금의 비율을 K로 나타내며 순금은 24K가 된다. 따라서 18K라면 24분의 18,즉 75%가 금이고 14K는 24분의 14인 58.3%가 금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