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놀이 동산을 찾는 이유는 다양한 놀이기구에서 ‘안전한 위험’을 즐기기 위해서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출발하는 청룡열차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교묘하게 꼬인 레일 위를 따라 안전하게 플랫폼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아이들이 멋대로 꼬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레일이 사실은 뉴턴이 발견한 힘의 법칙들과 에너지보존원리를 토대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킹’도 마찬가지다. 예정된 순서대로 진동은 증폭되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안전하게 선다. 우리는 바이킹에 탄 아이들의 비명소리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기계장치들과 그것들이 맞물려 내는 기계 소음은 이성과 과학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세계를 재창조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적인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로 해석되는 테마 파크가 근대 과학으로 구축된 모조 세계라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인류학과 의학, 생물학, 물리학 등 과학 전반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과학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은 20세기형 놀이 동산에 관한 야심찬 꿈을 꾸었다. 정해진 운동을 반복하는 기계들을 대신할 놀이 동산의 테마로 그가 생각한 것은 6천5백만년 전에 멸종한 공룡들이었다. 그는 공룡들을 하나씩 부활시켜 코스타리카의 누블라섬에 몰아넣고 쥐라기 시대를 재현하고자 했다. 20세기형 놀이 동산이 동물원과 다른 점은 철조망을 걷어내고 우리를 없앴다는 점이다.
공룡 생산 공장
영화 ‘쥐라기 공원’의 목표는 케냐의 나이로비 야생 동물원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공룡들을 통제하고, 인간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과 부모들은 섬의 경치를 즐기기도 전에 난폭한 공룡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는 공룡들을 통제하고 사육해서 관광 사업을 벌이려는 해먼드 박사의 야심이 본질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위배된 것임을 ‘쥐라기 공원’에서 보여주었다. 자연은 비선형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혼돈계이기 때문에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대 과학의 이론(특히 카오스 이론)을, ‘쥐라기 공원의 파멸’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쥐라기 공원’의 속편인 ‘잃어버린 세계’는 생명의 진화와 멸종에 대한 우주적 시나리오라는 거창한 주제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룡들의 번식, 진화, 그리고 멸종의 과정을 컴퓨터 모니터에서 끊임없이 사라졌다 나타나는 라이프 게임의 패턴에 비유하면서, 현대 과학의 마지막 혁명으로 불리는 ‘복잡성의 과학’(Science of the Complexity)을 이야기한다.
전편 ‘쥐라기 공원’에서 인젠사(International Genetic Technologies의 약칭)의 해먼드 박사는 호박에 묻힌 곤충의 위장 내용물로부터 공룡의 DNA를 추출해서 공룡을 복제했다.
‘쥐라기 공원’에는 모기로부터 공룡의 DNA를 추출하고, 이 DNA를 통해 복제된 어린 공룡들이 알을 깨고 부화하는 장면이 상세하게 나온다. 영화 속 주인공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새끼 공룡의 탄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부화실이 전혀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산이나 기형 같은 문제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모든 수정란들은 하나씩 새끼 공룡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도의 기술이라 할지라도 초기 수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한마리의 공룡을 탄생시키기 위해 수천개의 공룡 수정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많은 수정란을 키우기 위해서는 거대한 산업 공정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잃어버린 세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쥐라기 공원이 사고로 폐쇄된지 4년 후, 해먼드 박사가 누블라섬에서 조금 떨어진 소르나섬에 공룡생산 공장을 두고 공룡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는 그동안 공룡들이 섬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두면서 공룡들의 생태계를 관찰하고 있었다. 전편과는 달리 해먼드 박사는 공룡들을 자연 세계에서 순수하게 보존하자는 입장이지만, 인젠사의 부회장은 샌디에고에 제2의 쥐라기 공원을 세우려고 계획하고 있다.
멸종은 자연스런 행동 양식
소르나섬에 태풍이 밀어닥쳐 설비가 파괴되자, 해먼드는 말콤 박사에게 상황을 파악해 달라고 요청한다. 섬으로 간 말콤 박사는 공룡들을 생포해서 샌디에고로 수송하려는 공룡 사냥꾼들의 음모와 싸운다. 공룡 사냥꾼들은 기어코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 Rex)와 그 새끼를 생포해서 샌디에고로 향하지만, 티라노사우루스는 평화로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공룡들은 약 2억8천만년 전인 트라이아스기에 생겨나, 쥐라기와 백악기를 거치면서 2억년이 넘게 지구를 지배했다. 그러다가 백악기 말, 약 6천5백만년 전에 공룡들이 멸종되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공룡이 왜 멸종했는지는 아직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1980년 물리학자 루이스 알바레스와 세명의 공동 연구자들은 백악기 말과 제3기 초 시대의 바위들에 이리듐이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리듐은 지구상에는 희귀하지만, 운석에는 흔하게 발견되는 원소다. 알바레스 팀은 그 시대의 바위에 이리듐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름이 수km에 이르는 거대한 운석이 그 당시 지구와 충돌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구와 운석의 충돌로 인해 먼지와 파편이 하늘을 뒤덮어 온 세상이 캄캄해졌고, 식물들의 광합성은 중지되었으며, 그로 인해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멸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공룡의 멸종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마이클 크라이튼은 ‘잃어버린 세계’에서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공룡의 멸종에 관한 이론들은 화석 기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화석 기록은 오랜 과거에 대한 한 순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얼어붙은 사진과 같다. 실제로 움직이고 계속되는 생생한 과거의 상황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멸종이라는 극적인 변화를 물리적인 사건들과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 어떤 외적이고 물리적인 사건이 멸종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운석이 지구에 부딪혀 기후를 바꾸어 버렸다거나, 화산 폭발이 기후를 바꾸었다거나, 식물이 변해서 종들이 굶어 죽었다는 식이다. 아니면 새로운 병이 생겼거나, 식물이 독성을 가지게 되어 공룡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멸종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보편적인 사건이다. 생명이 시작된 이래 지구상에는 약 5백억 종이 있어 왔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지구상에는 겨우 5천만 종의 식물과 동물만이 살아 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종들 가운데 99.9%는 멸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생명체들이 운석이나 질병에 의해 멸종되었다는 말인가? 혹시 멸종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런 하나의 패턴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생명이 환경에 맞춰 스스로 발생해서 진화하고 번성하는 것처럼 멸종도 자연스런 행동 양식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패턴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이 ‘복잡성의 과학’이다.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존
6천5백만년 전에 ‘잃어버린 세계’, 소르나섬의 공룡 생태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공룡들이 섬에서 4년만에 완벽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의 기본 질서를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공 생명’ 분야를 개척한 크리스토퍼 랭턴에 따르면, 생명은 변화에 대한 요청과 안정의 유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고 한다. 만약 심한 변화와 혼돈의 상태가 되거나, 반대로 변화가 없고 안정된 상태로 고정된다면, 살아있는 시스템은 혼돈과 함께 해체되거나 획일적으로 얼어붙어 멸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명체들이 환경의 다양한 변화에 적응하면서 스스로에게 좀더 복잡한 적응능력을 부여하고, 혼돈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가며 살아가는 생명의 영역을 ‘혼돈의 가장자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생명은 혼돈과 안정 사이에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주장은 이렇다. 6천5백만년 전 ‘중생대의 생태계’라는 복잡 적응계에서 한 무리의 공룡들이 혼돈의 가장자리를 넘어 적응 능력을 잃고 생명이 위태로워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소행성의 충돌이나 질병이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 그건 그저 갑자기 나타나는 생명의 속성일 뿐이고, 그런 행동을 하는 동물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을 뿐이다. 만약 그 공룡들이 습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놈들이라면, 그들의 행동 변화로 물의 순환이 바뀌게 되고, 다른 종들이 의존하는 생태계는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다. 생태계의 불균형은 급속도로 되먹임되어 그들은 절멸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놀라운 생명의 속성이니까.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룡들이 자기 조직화 과정 속에 내재된 속성에 의해서 스스로 멸종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만약 물리적인 사건 없이 소르나섬의 공룡들이 멸종하게 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멸종은 몇년의 관찰로 목격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따라서 그가 명확히 보여준 것은 공룡 멸종의 과정이 아니라 소르나섬의 공룡 생태계가 전형적인 복잡 적응계의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공룡들이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공생하면서, 섬의 구역을 나누어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선대 조상 공룡들의 오랜 적응과정이 학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어떻게 쉽게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을까? 소르나섬의 공룡 생태계는 어느 시스템 못지 않게 자기 조직화하는 복잡 적응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멸종의 가능성도 창발될 수 있지 않을까?
지루함 없애는데 주력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영화 ‘잃어버린 세계’에는 복잡성의 과학과 생명의 진화에 대한 은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시나리오를 쓴 데이비드 코엡은 어떤 꼬마 팬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작가 아저씨, 이번엔 제발 지루한 부분들은 줄여주세요. 공룡들을 빨리 볼 수 있게요.” 그는 작업 내내 그 편지를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에서 볼거리란 오직 공룡들의 움직임뿐이다. 스탠 윈스턴이 만든 모형과 ILM의 컴퓨터 그래픽은 전편보다 더욱 다양한 공룡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특히 사냥꾼들이 파키세팔로사우루스(Pachycephalosaurus)를 생포하는 장면과 콤피 (프로콤프소그나티드, Procompso-gnathid의 약칭, 수탉처럼 뒷발로 뛰어다니는 작은 육식성 공룡)가 사람에게 집단 공격하는 장면, 수풀에서 카르노사우루스(Carnosaurus)가 사람들을 덮치는 장면은 공포스런 분위기와 사실감이 동시에 어우러진 명장면들이다.
공룡의 움직임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뿐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추정되는 공룡들의 습성까지도 영화는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트레일러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자신의 새끼를 훔쳐간 주인공들의 트레일러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이 장면에서 티라노사우루스의 포악한 육식동물적인 습성을 엿볼 수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표시하고 방어한다. 그러나 말콤과 하딩 박사가 어린 티라노사우루스를 옮기자, 어미는 새끼를 다시 뺏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빈다. 그리고 새끼가 발견된 빈터를 자신의 영토로 재규정해서 박사의 트레일러를 밀어냄으로써 그들의 영토를 방어한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티라노사우루스가 나타나자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놈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티라노사우루스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해치지 않는다. 이 장면은 고고학자들에게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고생물학자 록스턴에 따르면, 티라노사우루스의 두개골을 연구해 보았더니 개구리의 뇌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원시적인 뇌를 가졌다고 한다. 즉 그들의 신경시스템이 움직임에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어서, 개구리처럼 정지하고 있는 물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거대한 육식동물이 움직이는 물체만 볼 수 있고, 정지해 있는 먹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피식자의 가장 일반적인 방어가 꼼짝하지 않고 서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식 동물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걸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또다른 멸종을 피하기 위하여
영화는 섬에서 공룡들과 맞서는 내용과 인젠사에 의해 생포되어 온 티라노사우루스가 샌디에고를 쑥밭으로 만드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섬에서의 장면은 ‘프레데터’를 연상시키며, 샌디에고 부분은 ‘킹콩’을 떠올리게 한다. ‘프레데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를 쫓는 괴물이 형체도 알 수 없는 외계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만든 공룡이라는 점이다. 공룡의 습성과 형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공포 영화로 만들겠다는 스필버그의 전략은 특유의 ‘죠스’식 공포에도 불구하고 다소 빛을 잃은 것 같다. ‘킹콩’을 상징하는 후반부의 결말은 어미 티라노사우루스를 잡기 위해 새끼를 미끼로 삼았다는 점과 자연을 파괴해선 안된다는 주제가 진부한 인상마저 준다.
영화는 공룡들을 소르나섬으로 다시 안전하게 보내고, 그들을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해먼드 박사의 나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평범한 주장이 이 영화에서 새롭게 들리는 것은 ‘복잡성의 과학’이 보여주는 생명의 패턴에 있다. 인간은 그동안 지구의 환경을 점점 획일화시켜 왔다. 서울과 뉴욕과 도쿄는 똑같은 빌딩숲이 돼버렸고,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은 인간의 삶을 하나의 양식으로 옭아 매었다. 전 세계를 하나의 전선으로 묶으려는 노력은 우리를 멸종으로 치닫게 할 수도 있다. 하나로 얼어붙은 환경 속에서 과연 우리가 풍성하고 다양한 생명의 패턴을 이어갈 수 있을까?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생태계를 파괴하는 우리들의 행동이 스스로를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지구 상에는 다섯 번의 큰 멸종이 있었다. 공룡들을 죽인 백악기의 멸종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끌지만,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 말기에도 멸종이 있었다. 특히 바다와 육지를 덮은 생명의 90%를 죽여버렸다는 페름기의 멸종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쩌면 인간이 여섯번째 멸종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변화와 안정의 균형에서 생명의 다양한 속성을 이어 나갈 때 우리들은 이 세계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